퇴사했습니다. 1년 7개월을 다녔네요. 이곳은 제가 정규직으로 이름을 올린 첫 직장이기도 합니다. 회사 이름은 버즈니(Buzzni)입니다. 저는 여기에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로 취직했습니다. 처음엔 어시스턴트 격으로 프로젝트 2개 정도를 완성하고, 마지막엔 퍼포먼스 마케팅 담당자로써 자동화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고 나왔습니다. 명확한 숫자는 이력서 위에만 공개할 수 있겠습니다만, 마지막 프로젝트의 성과는 인터미디엇(Intermediate) 기준에서 흥미로울 수준이라고 자평하고 싶습니다. 관점이란 자신이 선 자리마다 다르겠지만 말예요.
퇴사는 몇몇 지인에 한해서 프리-오픈(pre-open)했습니다. 만약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 제 지인이시면서, 퇴사 소식을 글로써 알게 되셨다면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현대인에게 만남이란 친밀과 영리적 목적이 복잡 미묘하게 점착된 행위입니다. 부디 마지막 만남 이후로 서로 긴한 목적이 없었구나 하고 너그럽게 양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여러분이 저를 생각하시는 것만큼 저도 여러분을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구구절절한 사연을 읽는 것 마저도 서운하다 느끼신다면, 연락해서 직접 아쉬움을 토로하시거나, 연락처를 지워주세요.
다시 퇴사 이야기로 기수를 돌립니다. 퇴사 프리-오픈 과정에서 공통되게 들었던 질문이 있습니다. 저는 그때 기억을 되살려서 이 글을 보시는 분들께도 궁금해하실 것 같은 질문을 앞으로 꺼내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뒤로 보내겠습니다. 고객의 시간과 우선순위를 고려한 문단의 배치는 고객 참여(Engagement rate)와 고객 유지 가능성(Retention rate)을 높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렇게 떠벌리는 시간에도 제 퇴사 글의 흥미도는 점점 떨어지고 있어요. 태풍이 오고 있습니다(There's a storm coming, Mr. Wayne).
제가 생각하는 스타트업과 회사가 이야기하는 스타트업의 방향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라 할 수 있습니다. 윗 문장 띄어쓰기 사이로 구구절절한 입장차와 사연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우선 이렇게 정리하도록 합시다. 그리하면 회삿밥 좀 드셔 보신 분들께서는 '그렇지. 그럴 수 있지.'하고 고개를 끄덕거리실 겁니다. 단순한 조직과 개인 간 갈등이 아니라 정말로 멀리 가고 싶은 관점이 있고, 그것을 서로가 극복(또는 합의)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어렵게 들어간 회사, 3년 안에 절반이 떠난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오늘도 불철주야 밤낮으로 인적성 문제, NCS 문제를 푸시는 예비 직장인분들께는 참으로 송구스런 소식입니다. 그 자리가 내 자리였어야 하는데. 공채 최종 발표 후, 6개월이 지나고, 1년, 3년이 지나면 전체 신입사원 중 62%는 옆자리에 없대요. 저도 짧게나마 NCS를 쳐 본 입장에서 정말로 화가 날 것 같습니다. 나를 떨어뜨린 친구가 1년 내로 사기업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며 떠난다니요. 면접장 내 옆자리 지원자 넥타이 색깔이 아직도 생생한걸요.
처음엔 (개인과 회사 간) 입장차는 얼마든지 극복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입장이 있어봐야 얼마나겠어' 하는 안일한 생각과 함께요. 그러나 회사와 개인 간 문제란 반드시 생기더군요. 사랑을 시작할 땐 모든 장애물을 살라버릴 듯 하다가도, 그 어려움이 상대방에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부턴 불질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 뒤론 입장을 이해하고, 회유도 하고, 설득도 당하고, 돌보고, 배려하는데 시간을 쓰기 시작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스타트업은 신뢰를 기반으로 한 업장입니다. 저는 버즈니가 신뢰가 없는 회사라는 뜻이 아님을 밝힙니다. 이어서 '신뢰'라는 단어는 대단히 모호하기 때문에 예시와 대조를 통해 제가 생각하는 단어의 범위를 밝히고자 합니다.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이라면, 모두들 조별과제를 해 본 경험이 있으시리라 생각됩니다. 그 경험이 생각보다 괜찮았을 수도, 다시는 경험코 싶지 않은 공산주의의 체험판 버전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저는 윗 그림(조별과제에서) 수레를 끄는 사람이었습니다. 뜬금없게 자랑이라고요? 아닙니다. 오해가 커지기 전에 결론부터 말할게요. 저는 '수레를 혼자 끈다며 스스로의 생산성을 믿는 이'를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수레에 올라타서 편승하는 이 못잖게 나쁜 마음일 수 있습니다.
쉽게 생각해봅시다. 저는 왜 혼자 수레를 끌어야 할까요? 답은 간단해요. 아무도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최소한의 역할은 분배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답을 알고 있어요. 역할을 분담한 조원 두 사람이 일주일 내내 조사한 내용이, 발표 전 날 조장이 두 시간 리서치한 내용보다 빈약하다는 사실을요.
그러니까, 보통 수레를 끄는 사람은 수레에 탄 이들보다 일률(일의 능률)이 좋습니다. 보통 그래요. 조장들은 자기 점수가 걸린 일이기에 씩씩대며 밤을 새웁니다. 나머지 친구들은 인터넷을 켜거나, 게임을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들 쏠쏠한 점수를 나눠갖습니다. 조장은 인생의 쓴 경험치를, 조원들은 달콤한 성적을 얻어갑니다. 참으로 정교하고 훌륭한 보상체계입니다.
조별과제는 선-악이 분명해 보이고, 규모가 작기 때문에 제가 제기한 문제의식을 느끼기 쉽지 않습니다. 회사 이야기를 해 보죠, 회사에서 일률이 좋은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네. 맞습니다. (상사가 사람 수준이라는 전제 아래) 대리, 팀장, 과장, (규모가 작은 스타트업이라면) 대표일 것입니다.
군대를 경험하신 남자분들이라면 공감하실 텐데, 군대 초반엔 명문대고, 미국 엘리트고, 4년 장학생이고 모두들 똑같습니다. 어리바리합니다. 시선은 바쁘고. 누가 일을 한다 싶으면 나도 기여해야 할 것 같은데. 어디서부터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입을 오물거리고, 발만 동동 구릅니다.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에서 강의자료만 밑줄 긋다 온 친구들이 회사의 역학 관계를 파악하거나 유도리를 발휘할 순 없습니다. 신입이 융통을 부리면 백 퍼센트 사고 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임은 중요하고, 경력자는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겠지요. 방금 조별과제 그림으로 치자면 경력자는 수레를 끄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력자가 모든 일을 도맡아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첫째로 후임이 바보가 됩니다. 시키는 건 아주 잘 하는데, 사고가 닫혀요. '내가 친구들이나 아는 분들께 건너 들었던 비기들을 여기에 조금만 응용하면 잘 될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은 싹조차 나지 않습니다. 그냥 시키면 하는 이가 됩니다. 이 경우엔 시간이 지나면서 후임은 조별과제에 올라타 있다가, 슬며시 옆에 내려 수레를 살살 미는 사람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둘째로 선임이 병목이 됩니다. 바보가 된 후임에게 누가 일을 맡기겠어요? 클라이언트, 손윗상사, 동료들도 선임에게 일을 부탁합니다. 선임은 점점 자신감이 올라갑니다. 자기가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갈 것 같고, 내 일률은 쟤(후임)의 서너 배는 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일률이 그리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여기서의 일률은 선임 자체의 일률(throughput)입니다.
사례로 설명드리죠. 일 잘한다고 소문난 선임에게 사람들이 몰립니다. 선임은 머리가 아주 좋아서, 우선순위를 잘 골라가며 일을 처리합니다. 훌륭한 사람이에요. 그렇지만 선임에게 일을 맡기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선임이 능력이 좋다는 이유를 들어가며 피드백이나, 일을 부탁합니다. 선임도 24시간을 쓰는 사람입니다. 서서히 피드백 시간이 늘어집니다(delay). 5분, 10분이 늦습니다. 아, 깜빡하고 있었어요, 오늘 중으로 드릴게요. 하는 메시지가 날아옵니다. 한 팀과 개인 간 관계로 보면 여전히 괜찮아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회사 전체를 생각해보세요. 결재받는 5분, 10분, 하루는 모든 회사 프로세스의 5분, 10분을 정체시킵니다. 선임이 문제를 검토하고 아웃풋을 뱉는 5분 정체 기간 동안, 개발팀은 5분이 늦고, 그것을 또 받아서 기획해야 하는 팀이 5분이 늦습니다. 과장하자면 회사 전체가 5분씩 늦는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 번째 사건이 실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며 매일 넘어갑니다. 미시적으로 보면 한 사람이 5분 늦는 일일 뿐이니까요. 그 사이에 개발팀은 다른 개발을 하면 되고, 기획팀도 다른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일을 해 보신 분들은 압니다. 저렇게 밀린 5분 동안, 다른 팀들은 거의 아무런 것도 하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못 합니다. 이 일에서 저 일로 넘어가는데 발생하는 맥락 이동(context switching) 비용과 맥락 이동 중 발생하는 공백 사이에 침투하듯 밀려올 잡생각(주식, 쇼핑, 뉴스, 점심메뉴)이 훨씬 더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이 맥락 이동을 못하는 다른 팀 잘못일까요?
스타트업은 자본이나 여건상 대표가 하드캐리하는 구조가 흔합니다. 경력 실무자들 또한 가끔 생각할 겁니다. '모든 직원이 일을 내 절반 만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요. 물론 그럴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겁니다. 그런데, 혹시요. 팀원이 얼마나 능력이 좋은 친구인지 잊고 계신 건 아니신지요? 그 친구 이력서랑 다른 친구 이력서. 심사숙고해서 고르신거잖아요. 아니요, 그냥요. 혹시나 해서요.
퇴사를 결심하게 된 이유는 이겁니다. 속도가 안 나서요. 그리고 컨디션이 급격하게 나빠진 무릎도 문제가 있었어요. 제가 생각하는 스타트업의 신뢰란, 구성원이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하며 자신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에 집중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면 허술한 서비스가 나오기도 하고, 망작이라는 평을 들을 수도 있어요. 어떤 때엔 '어떻게 일처리를 이따위로 하지?' 싶어서 헛웃음이 날 때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요. 그렇게 어렵게 뽑은 신입이, 자생 능력이 부족할지. 저는 의문입니다. 자신이 밤을 새워 만든 제품이 어딘지 모르게 엉성하고, 시중의 것과는 한참 거리가 있음을 모를리 없는데 말예요. 그렇다고 매 과정마다 상사가 개입해서 회사의 전체 시간을 늦춰야 할까요? 아니면 각자 속도를 내서 진짜 고객이 원하는 것을 끝끝내 만들어야 할까요?
요즘은 스타트업뿐 아니라 크고 작은 기업 내에서도 속도, 속도, 속도 하는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그런데요, 그분들의 말처럼 속도가 정말로 중요하다면, 왜 속도가 중요한지, 그리고 혹시 자신이 속도를 내는데 병목은 아닌지. 생각해보신 적은 있으신가요? 왜 속도가 중요할까요?
사유가 길었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이 계시다면 필경 이전 회사 관계자 시거나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분일 것 같습니다. (반갑습니다, 동지) 어쩌면 제가 생각하는 관점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제가 틀렸을 수도 있어요. 아마 제 생각도 변할 것입니다. 미래의 저는 지금의 생각을 바꿔야만 합니다. 저는 바쁘고 싶었고, 제가 잘 한다 믿고 있는 것을 더 잘하고 싶었습니다. 속도를 내면서도 관계를 해치지 않는 연습이 필요했습니다. 우리네 시간은 모두 소중하고 아깝습니다. 모름지기 시간이란 자본주의 사회의 화폐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더욱 적극적으로 최적의 의사소통 지점을 찾아야 하고, 일률을 높여야 합니다. 그런 와중에도 구성원은 모두 존중받아야 하지요. 어렵습니다.
버즈니는 제게 좋은 회사였습니다. 사람들은 따뜻하고, 대화를 할 줄 압니다. 그렇지만 제가 생각했던 스타트업의 신뢰(또는 속도)엔 견해차가 있었습니다.
있었습니다. 이전 회사분들과 함께 제주도에서 놀았습니다. 정말이지 훌륭한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과 함께 근무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다시 못 올 시간에 다시 못 할 경험을 했습니다.
이 글은 신뢰기반 사회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의 투사쳅니다. 한 편으론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기도요.
저는 비교적 일찍 일을 시작했습니다. 아르바이트 활동, 과외, 희한한 일감도 제법 경험해 봤습니다. 모두 의무 소득 신고 금액에 한참 못 미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일감은 사소할수록 노동 강도가 높은 편입니다. 대학생 때, 영혼 없이 밀대로 바닥을 닦는 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근로자란 성별도, 지역도, 마음도 없는 이라고. 남겨야 하는 것이라곤 생산성과 근로 기대치 같은 수치적 요소뿐이라고요.
이전 회사는 제가 가지고 있던 편견을 보기 좋게 깨 줬습니다. 일터에 앉아 있는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사람이고, 우리는 공동체이며, 구성원이라는 인식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회사예요. 제게 대표님은 아이돌 같았어요. 대학교 2학년 때, 버즈니에서 서비스 했던 영화가이드 어플리케이션이 신문에 나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한국에 이런 분이 계시는 구나 하고, 기사를 오려 스크랩했었어요. 그로부터 3년 뒤에 외부 프로그램을 통해 대표님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같이 프로젝트를 하고 싶다고 이야길 하면서 손도 벌벌 떨었죠. 그때 경험이 좋은 인연이 되어 회사에 합류하게 됐을 때도 정말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회사에서 좋은 분들을 만났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일이 끝나도 삶은 계속됩니다. 우리는 가끔 이것을 간과합니다. 어떤 이들은 다신 안 올 관광지라 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진상 부리고, 쓰레기를 몰래 버립니다. 그렇지만 삶은 계속 그 자리를 흐릅니다. 저는 '법적 조치나, 권고, 권유, 공식입장' 등에 겁을 집어먹고 맥없이 타협하는 인물입니다만, 회사의 선의와 나의 선의가 의외의 결과를 낼 수 있음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글이 올라가는 오늘이 있다면 오늘부터 3년, 5년 후에도 삶은 흐를 것이고, 우리는 지금의 자취를 조금은 더 성숙해진 눈으로 돌아볼 수 있길 기대합니다.
퇴사 이유가 너무 길었네요. 이 항목에 대한 답은 다른 글로 대체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맞아요. 이거 상술입니다. 부디 한 번만 더 방문해주세요.
대답하기 어렵지만, 두 번 이상 받았던 질문이라 올렸습니다. 네, 행복합니다. 근로자의 행복이 뭐 거창하겠나요. 그저 김연아가 크게 세 바퀴 뛰어오르고, 예능인들이 제 역할 꾸준히 하고, 왕좌의 게임이 밀리지 않게 나오기나 하고, 호기심 많고 선한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지면 됩니다. 그뿐이에요. 앞으로도 이 정도로의 파고만 있길 바랄 뿐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군가 이 글을 읽으실 수 있겠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제게는 큰 행복입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