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앞서
이 글은 지식기반산업 근로자로서 느끼는 불편을 호소하는 글입니다.
따라서 전체 산업군에 대하여 주 40시간 근로 및 체크에 재고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아니며, 그것은 성급한 일반화가 될 수 있음을 밝힙니다.
(대기업과 스타트업에서) 주 40시간 근로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회사는 이를 감시하기 위해 개인 컴퓨터에 프로그램을 설치한다. 근로자는 자리에 앉아서 [출근] 버튼을 누른다. 출근 버튼은 오로지 출근지에서만 누를 수 있다. 이것은 적어도 특정 시간에는 출근지를 사수하겠다는 상호 합의 구속 계약이다. 논리는 단순하다. 자리에 앉으면, 출근 버튼을 눌러 자신이 출근했음을 알리기. 그리고 퇴근할 땐 [퇴근] 버튼을 눌러 출근과 퇴근 사이의 근로 시간을 계산하기. 그러나 근로란 그렇게 기계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외근을 하기도 하고, 업무와 관련된 일정으로 로컬 컴퓨터에 출근 버튼을 못 누르는 날도 있다. 외부 워크샵이라도 있는 날에는 전산상 회사 전체가 무단결근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근로자는 자신의 업무 외에 새로운 고민을 시작한다. 앞서 설명했던 예외사항은 사실상 회색지대(grey area)에 있기 때문에, 매니저와 대화 결과에 따라 근로 인정 여부가 결정된다. 어떤 상황에서는 매니저와 커뮤니케이션 미스로 인해 자신이 놀기 위해 혈안이 된 것 같은 이미지를 줄 수도 있다. 결국 근로자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불안감을 억누르고 매니저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근로자는 근로 시간 측정제 도입으로 일을 잘하기 위한 고민이 아니라,
일하는 시간을 준수하기 위한 고민을 시작한다.
이번에는 이 사안을 회사 입장에서 바라보자. 주 40시간을 체크하기 위한 프로그램에 근로자가 불편을 겪는다. 그리고 이 불편의 이유가 합리적이다(외근, 야근, 원격 비상근무로 인한 추가 취침 등). 근로자는 정당한 채널과 형식으로 매니저에게 불편을 표현하고, 매니저는 이 주장을 수용한다.
매니저는 근로자의 근로 시간을 수정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켠다. 그러나 근태 수정 프로그램에 근로자가 말한 항목에 대한 수정 기능이 없다. 이것은 아직 보고된 적 없는 보고다.
따라서 매니저는 [기타] 항목을 만들고 매번 출근부를 정정한다. (어떤 회사는 출근 정정을 매니저 선에서 끝내지 못하고 경영진까지 결재를 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프로그램 유지보수팀에 이런 예외사항 추가를 요청한다. 주 40시간 출근기록 프로그램은 각 부서의 예외를 수용하느라 복잡해진다. 일감도 쌓인다.
월말이 되면 사무실에 좀비처럼 앉아있는 직원들이 보인다. 이들은 모두 할 일은 없고 기본 근로 시간을 때워야 하는 인원들이다. 회사는 이들에게 ‘생산적인 놀 것’을 만들며 회사에 기여하길 기대하지만, 일반적으로 (40시간 근로 체크 프로그램을 만드는) 회사가 구글은 아니고, 모든 직원이 구글러가 아니다. 때문에 이들은 자리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인원을 찾아 수다를 떨거나 인터넷 쇼핑을 한다. (경영진의 기대와는 달리) 결국 월말 근로 시간이 부족한 직원들은 기본 근로 시간에 딴짓을 한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인터넷 쇼핑, 다음 휴양지를 검색한다.
당신은 경영진이다. 어느 날 당신이 한 직원과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다고 해 보자. 만약 그 직원이 일 얘기가 아닌, 사회, 여행지, 또는 최신 유행에 대한 해박하고 매력적인 지식을 자랑한다면, 당신은 그 직원이 어떤 시간을 활용해서 그렇게 깊고 해박한 정보를 획득했을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혹시 당신도 이 직원과 비슷한 수준의 외부 정보를 근무시간에 탐닉하고 있진 않은지?)
일을 잘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그 일을 잘하면 된다.
우리는 모두 일에 몰두해 본 경험이 있다. 일이 재밌는 때가 있다. 그런 날엔 하루 종일 일만 생각하다가 친구들과의 약속을 잊기도 한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에 한밤중 버스 안, 회사 입구 사진을 올리곤 “아 회사 최고야. 일 최고야. 만족감 쩔어” 같은 포스팅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다수 근로자는 시간이 갈수록 패색이 짙어지고, 좌절감이 깊어지며 근로 의욕을 상실한다. 물론 모든 근무일이 즐거울 순 없다. 그럴 때는 쉬면 된다. 그리고 의욕이 생길 때 다시 열심히 일하면 된다. 만약 아무리 쉬어도 의욕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미안하지만 당신은 함께 일하기 좋은 동료가 아니다. (휴식으로 근로 의욕과 기여도가 향상될 수 있다는 가정 아래) 지식기반산업 근로자는 컨디션에 따라 조금 일찍 퇴근할 수도 있어야 하고, 일찍 출근할 자유도 보장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조항은 주당 40시간 측정기 앞에 모두 [기타] 버튼 항목 감이다. 그리고 이것은 근로자가 매니저에게 함부로 보고할 수 없는, 근로 능률을 떨어뜨리는 어떤 것이다.
지식근로자들의 생산성은 사람마다 그 차이가 크다. 이것은 육체노동에 비하면 수 배 다르다. 그런데 현 제도는 이런 사람들을 모두 40시간이라는 시간표 위에 똑같이 올려놓는다. 주 40시간 측정 프로그램은 지식근로 사회의 펀칭 카드다.
나는 주장한다. 일이 없는 근로자는 일찍 퇴근하는 것이 옳다고. 이들은 일을 잘 해낼 의무가 있을 뿐, 주당 40시간, 일 8시간을 반드시 채워야 하는 의무를 가져선 안된다고.
그러나 필자의 주장은 K-현실성이 떨어진다. 그 이유는 같은 지식근로자들의 불만 때문이다. 어떤 지식근로자는 다른 동료의 조기 퇴근을 비난하고, 자신의 근무 시간을 성과처럼 자랑한다. 일을 잘 해냈거나, 그 과정이 있기까지 무수한 고민을 성과로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초과 근무 시간, 피곤한 얼굴, 절어있는 셔츠를 업무 성과처럼 들고 온다. 매니저는 이런 진상 고객들의 감정적인 호소를 떨치기 어렵다. 이들은 조기퇴근에 시간제한을 두거나, 제도를 더하여 일이 없는 이들의 손 발을 묶는다.
이것은 옳지 않다. 제 일을 다 한 근로자는 낮이든 밤이든 퇴근해야 한다. 조기 퇴근 문제는 차라리 업무 안배를 제대로 하지 못한 매니저의 문제다. 그러나 무능한 매니저들은 노동 분배와 일감에 대한 감이 없고, 감정적 호소에 약하다. 이런 상황에서 주당 40시간 근로 측정기는 세우기 좋은 허수아비가 된다.
근로시간 측정 프로그램은 무능한 매니저/경영진의 허울을 가리기 좋다. 또한 근로자들끼리 능력차를 “절대 시간이 가져다주는 성실함”이라는 억지로 평준화하기도 좋다. 마지막으로 이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무능한 인력이라고 비난하기 좋다.
물론 근로시간 측정기는 착취를 막는 좋은 안전망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악한 업주는 근로자에게 퇴근 버튼을 누르고 일을 시킬 것이다. 근로자 측에서도 얼마든지 오/남용이 가능하다. 따라서 근로시간 측정기란 근로 안전망이기 이전에 근로 규제에 가깝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필자는 어떤 일을 잘하는 방법은 그냥 그 일을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매니저가 근로자에게 JD(Job Description, 업무 설명서)에 적혀있는 일을 요구하고, 일감에 대하여 충분히 조정이 가능하다면, 지식근로 결과물 납기의 책임은 전적으로 근로자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근로계약서에는 업무 시간 준수가 아니라, 매니저와의 깊고 충분한 대화가 규정으로 적혀있어야 한다. 업무는 촘촘하여 주당 40시간을 고민의 시간으로 채울 만큼 충분히 바빠야 한다. 이상적인 직장의 매니저와 근로자는 일을 잘하기 위해 협력해야 할 뿐이다. 제도를 잘 지키는 일은 제도를 잘하게 만들 뿐, 성과와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이유로 근로계약서, 그러니까 의무, 는 느슨해야 한다. 여기에는 근로자로서 마땅히 보장받아야 하는 인간적인 권리와 일을 잘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약만이 필요하다. 근로자는 자유를 보장받은 만큼, 맡은 바 소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최선이라는 용어 속에는 공부와 자기 발전이 포함된다. 육체노동에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근력과 연령이 있다. 스스로 공부하지 않는 지식근로자는 몸이 상한 육체 노동자와 같다. 이러한 의미로 느슨한 근로계약서에는 지식근로자의 자기 계발과 시장성 확보를 위한 노력이 포함될 것이다. 회사는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 인원에게 무거운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눈치나 분위기, 심증으로서가 아닌 지식근로자의 책무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