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세계가 보편 세계일 것이라는 착각
원래 쓰려던 주제는 이게 아니었다. 원래는 “데이터 만능주의를 경계하자”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글을 쓰기 위해 조사를 하다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이제 필자는 데이터 만능주의에 대하여 경고를 외치는 사람, 그리고 4차 산업혁명을 말하는 사람을 경계하자고 주장한다.
필자는 세계적인 것을 좋아한다. 세계적인 것들 중에서도 세계적인 단어 사용을 선호한다. 세계적인 단어란 학문적, 대중적 근거가 충분하여 세계인들에게 보편적 용어로 자리 잡은 말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세계적인 단어는 북미나 유럽에서 발생했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이 중학교 때인지라, 필자는 성장기에 강한 인과의 오류를 겪고 강력한 대세에 굴종해버렸다. “세계적인 단어가 보통 북미나 유럽에서 발생했다”는 사상이 “북미나 유럽이 곧 세계적인 것들을 만든다”는 착각으로 발전했다.
주장과 사상을 뜬금없이 등장시키는 이유는 이 이후의 이야기가 필자의 사상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
4차 킹 갓 혁명. 한국인이라면 귀에 딱지가 내려앉도록 들은 단어다. 그런데 이 단어, 어디서 나왔는지.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영문 위키피디아를 찾아봤다.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이상하다. 4차 산업혁명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키워드다. 조금 더 깊게 파봤다.
4차 산업혁명(4th Industrial Revolution, 4IR)이란 말은 Industry 4.0이란 말로도 쓰인다. 이 단어는 클라우스 슈바프(Klaus Schwab)가 2015년 세계 경제 포럼에서 처음 만들었다 [1]. 그런데 4차 산업혁명이란 단어는 정작 클라우스 슈바프 아저씨의 위키피디아 바이오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2].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단어 하나 만든 것이 큰 업적이 아닐 정도로 대단한 분이셔서 그럴 수도 있다(실제로 대단하신 분이다).
자, 여러분. 클라우스 슈바프에 대해 아는가? 그는 위대한 4차 산업혁명이란 용어를 만든 사람이다. 대한민국에선 오늘자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뉴스가 609만 개가 있다. 그런데 누구도 클라우스 슈바프를 기억하지 않는다. 물론 다 웃자고 하는 소리다. 컴퓨터의 아버지는 앨런 튜링이지만 다수가 ‘빌 게이츠’라고 답한다. 그리고 그것을 (전문가조차도) 이상하다 생각지 않는다. 4차 산업혁명이란 단어가 대중적이라고 해서 클라우스 슈바프 아저씨를 기억할 이유는 없을 테니까.
이제 4차 산업혁명이란 단어의 국가 검색 빈도를 보자. 검색 빈도가 단어의 세계성을 엄밀히 보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중들에게 새로운 용어니만큼 검색 서비스를 많이 이용할 테고, 그것이 세계적인 단어라면 강대국 또는 인구 순서대로 관심을 보일 것이다.
클라우스 아저씨의 ‘Industrial 4.0’이라는 단어는 놀랍게도 세인트 헬레나에서 가장 인기가 높다. 검색 빈도는 중국이 32위, 미국은 55위, 대한민국은 62위다.
4차 산업혁명 ‘4th industrial revolution’이라는 단어는 어떨까? 놀랍게도 에스티와니라는 국가가 가장 관심이 높다. 검색 빈도는 대한민국이 7위, 미국 13위, 영국은 15위, 중국이 32위다.
대한민국 위키피디아 4차 산업혁명[3]의 하부 카테고리에 있다고 알려진 인공지능,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3D 프린팅의 검색 인기 빈도는 아래와 같다. 검색 결과 4차 산업혁명의 하부 카테고리는 모두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단어보다 검색 빈도가 높다.
그렇다면 관심도는 어떨까? 놀랍게도 4차 산업혁명의 관심도는 순위 2위는 대한민국이다. 미국은 19위, 중국은 43위, 일본은 55위다.
슈바프 아저씨가 쏘아 올린 작은(?) 날갯짓이 대한민국을 들썩이고 있다. 이런 한국인의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아저씨에게 닿는 날이 올까.
세계적 언론지 포브스(Forbes)에서는 2020년 1월 15일이 되어서야 4차 산업혁명에 관한 기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었다 [4].
경제 포럼에서 사용된 용어가 대한민국과 남아프리카에서만 유행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 괴현상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르겠다. 한국이 세계적인 용어를 빨리 발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발화자의 지식수준을 의심하겠다. 보통 4차 산업 혁명과 함께 따라오는 자료들은 세계적인 것들(클리셰 적으로 알파고, 넷플릭스, 아마존, 페이스북, 테슬라, 바이두, DJI, 보스턴 다이내믹스 등)이다. 필자에게는 국내 유통 용어를 가지고 세계를 눙쳐 설명하려는 애절한 노력처럼 들린다. 4차 산업 혁명과 함께 따라오는 카테고리들은 하나의 분야로 설명할 만큼 단순하지 않다. 필자는 “4차 산업혁명”이란 단어를 들을 때마다 자꾸만 CDO가 떠오른다 [5]. 레이 커즈와일[6] 아저씨라면 모를까 이렇게 추상적인 학제 간 발언은 위험하다.
영화 <빅 쇼트>의 한 장면
없는 용어를 만들거나, 있지도 않았던 개념을 크게 주장하는 사람은 둘 중 하나다. 선지자나 양치기 소년. 그리고 이 사람을 믿는 사람들도 둘 중 하나다.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과 선동되는 사람들. 당신은 누구인가? 4차 산업 혁명이라는 용어가 세계 보편어인 줄 알고 계셨다면,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주기 바란다.
데이터 만능주의(Data mammonism) 또는 인공지능 만능주의(AI unilateralism)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많은 데이터 또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모든 고민을 해결해 줄 것이다’라는 믿음이다. 이것은 단어 자체보다는 엄정한 경고의 의미로 사용된다. 예를 들면, “방금 말씀하신 내용이 데이터 만능주의에 빠져 있지 않은지 다시 한번 생각해주시기 바란다” 같은 말이다.
이런 용어는 트렌드가 형성되지도 않았다 [7]. 필자가 검색어를 잘못 선정했을 수도 있으니, 적절한 영문 용어가 떠오르시는 분들은 제보 바란다.
다시 데이터 만능주의로 돌아와서, 데이터 만능주의 같은 건 없다. 태도도 없다. 데이터 만능주의인지, 인공지능 만능주의인가는 앞으로 나아가는데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우리는 데이터/AI를 사용하기 적합해 보이는 문제를 찾아서 해결하거나, 문제를 풀 수 있는 실정에 맞게 데이터/AI를 혼합해서 써야 한다. 일을 마치기 위해서는 ‘신봉자’를 찾아서 처리하기보다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문제 정의보다 문제 발언자 색출이 쉬우니까 적절한 허수아비를 만들고 세게 때리는 것으로 보인다 [8].
용어 또는 전문 용어는 업무 의사소통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이것은 개념을 명확한 언어로 정의 내림으로써 의사소통의 혼선을 방지한다. 그런데 용어 선정을 너무 포괄적으로 해 버리거나 방언을 표준어처럼 사용하면 사람들은 원관념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시작한다. 당신이 ‘4차 산업혁명이란 단어가 뭐가 어때서?’라는 생각이 든다면 4차 산업혁명이란 단어를 가지고 얼마나 다양한 개념이 파생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그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용어는 전문성의 힘을 잃는다. 전문성을 잃은 용어는 깊이가 없고, 깊이가 없는 용어는 실체를 갖기 어렵다.
당신은 데이터 만능주의를 경계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데이터 만능주의가 어떤 태도를 의미하는지 정의 내려보자. 그 경계에 대한 대답이 질문을 들은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하게 나올 수 있다면, 그 용어는 힘이 없으며 실체를 갖기 어렵다.
버블은 허상의 뼈대 위에 붙는다. 내가 신나게 사용한 용어는 다른 사람에게 거품이 되거나 내 거품이 다른 거품의 토대가 될 수 있다. 추상적이고 어려우며 범용적인 용어는 사람의 혼을 쏙 빼놓고 기분을 좋게 만든다. 그러나 신나는 거품 파티가 끝났을 때 우리 집 바닥에 깔려 있을 것은 영광보다는 유리조각일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