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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ldsmiths May 19. 2019

군벌의 시대

청말 이후, 군벌들이 벌이는 군웅할거부터 중국통일에 이르기까지

(*이 글도 개인 정리 차원에서 적어보았습니다. 따라서, 다듬어지지 않았습니다. 공개로 설정한 이유는 저의 거친 정리라도 누군가에게 필요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입니다.)




군벌의 시대


중국의 역사는 일치일란, 이합집산의 역사이다.

한 번은 강력한 중앙집권제로 다스려지다가 한 번은 어지러운 난세가 되는 역사,

각 지역에서 여러 세력들로 할거하다가 다시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고 다시 흩어지는 역사이다.

중국의 역사에서는 항상 반복되는 일인데 그 때마다 군벌이 난립하는 시대가 왔다.

이 글의 군벌의 시대는 그중에서도 청나라 말기의 군벌들이 난립했던 시기를 말한다.


군벌의 시대는 청나라가 무너지고, 다양한 군벌집단이 난립하며 존재한다.

이 시기는 마치 우리가 잘 아는 삼국지에서, 조조, 원소, 원술, 손책, 유표, 유비, 유장, 장로, 한수, 공손찬 등 여러 군벌들이 자웅을 겨루었던 것처럼, 군벌의 시대 역시 여러 인물들이 이끄는 세력들이 할거하고 자웅을 겨루던 시기이다. 삼국지가 동탁이 황제를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자 대동탁 토벌군이 형성되면서 본격 군벌의 시대가 시작된 것처럼, 군벌의 시대도 원세개가 스스로 황제에 오름으로서 시작되었다.

그 군벌의 쟁투가 시작되는 시점부터 모든 군벌이 하나로 통합되는 통일과정까지 개괄적인 내용을 담았다.




원세개 군벌의 시대를 열다

북양군을 쥐고 있던 당대의 실세 원세개는 쑨원의 추천을 받아 초대총통에 오른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시대(공화정)의 지배자보다 전통적인 황제가 되고 싶었다. 결국 스스로 황제라 칭한다.

원세개는 당대 최고의 실력자였지만 그가 지배하고 있는 지역은 베이징 중심의 북부지역이었다. 서부와 남부에는 북양군과는 별개로 독자적 지방군벌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이들, 즉 쑨원을 필두로 한 서부, 남부의 군벌들은 원세개의 황제 등극에 반기를 들고 저마다 자치독립을 주장하며 타도 원세개를 외쳤다  이것이 호국전쟁이다. 

전국의 군벌들이 자신에게 맹렬히 반발하자, 원세개는 황급히 황제직을 취소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얼마 후 원세개는 요독증을 앓다가 죽고 만다.


군벌할거

원세개라는 강력한 실력자가 죽자, 북양군은 3개의 파벌로 나뉘게 된다. 단기서의 환계, 풍국장의 직계, 동북왕 장작림의 봉계.

반면, 남부에는 서남군벌을 묶어 광주를 중심으로 한 손문의 남부정권이 메인이며, 북양군이 갈라진 북부와 달리, 남부는 각 성들이 자치를 선포하며 일어선 지방군벌들로서, 천군, 계군, 진군, 전군 등 여러 지역기반의 군대들이 난립하고 있었고 북부 정권타도를 외치며 손문이 주도하는 연합군의 성격이었다.


이렇게 군웅할거하던 군벌의 쟁투과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북양군의 계파싸움 중심으로 정리가 되는 북부지역 군벌쟁투와 광동을 중심으로 통합되는 남부지역 군벌전쟁이야기이다. 남북의 군벌들은 호법전쟁(뒤에 곧 설명)으로 남북이 다투면서도 각각 남과 북 내에서도 주변의 군벌들을 제압하고 성장한다. 그러다가 남부의 군벌이 북벌을 감행하면서, 결국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되게 된다.


북부 군벌들의 격돌

원세개가 죽자 북양군은 2인자들의 계파싸움을 벌이게 된다. 안휘성 출신 단기서의 군대라는 뜻으로 환계군벌과 또 다른 2인자였던 풍국장이 직례 출신이라 직계라 불린 군벌. 그리고 만주에서 세력을 키워온 봉천출신의 장작림의 군대의 봉계군벌이 있었다. 중국 북부는 이 3개의 군벌로 삼분되어 다투게 되었다.


3개의 군벌 중에서 풍국장은 권력투쟁에서 단기서에 패하여 단기서가 베이징을 장악하게 되었다. 단기서는 총리와 1차대전 참전에 대한 의견을 놓고 정쟁을 펼치게 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부원지쟁(총리와 원수의 정쟁)이다. 그 과정에서 총리는 단기서의 환계를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의 마지막 독군(도독이 이끄는 군대) 장훈의 군대를 끌어드린다. 변발을 한 청나라 마지막 충신 장훈은 이 참에 푸이를 다시 청황제로 옹립하자, 남부의 군벌들이 반발하며 베이징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것이 호법전쟁이다. 장훈을 끌여들여 전국의 반발을 사게된 총리는 사퇴를 하게 되고 단기서(환계)가 정권을 쥐게 된다


직환전쟁, 그리고 직봉전쟁

남북대결을 벌이는 1차 호법전쟁 중에 중앙을 장악한 단기서의 환계와, 풍국장 뒤를 이은 조곤의 직계 간의 갈등이 폭발하여, 직환전쟁이 벌어졌다. 장작림의 봉계와 누가 손에 잡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라졌다. 결국 환계 서수쟁의 농간에 당해온 직계와 봉계가 연합하여 환계를 무너뜨린다.


북경은 이제 직계와 봉계의 차지였는데 둘의 병립도 당연히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직계와 봉계의 전쟁이 벌어졌고, 북양군 정예의 적통을 잇는 조곤(과 그의 부하장수 오패부)이 활약한 직계를 동북의 마적단 출신인 봉계가 당하지 못했다. 이것이 1차 직봉전쟁이다.


그러나 절치부심한 장작림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군사를 정병으로 재무장한 후, 몰락한 환계(단기서)와 남부정권(손문)과 삼각동맹을 맺고 직계를 공략한다. 이것이 2차 직봉전쟁이다. 문제는 직계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직계의 맹장 오패부의 횡포에 불만을 느낀 풍옥상 등이 반기를 들면서 북경에 있던 조곤은 체포되었고, 때문에 직계(오패부)의 군사행동은 주춤하게 되었다. 풍옥상의 반란 탓에 결국 봉계의 최종 승리가 되었다


막강했던 직계가 패배하면서 직계군벌은 분열되었고, 이전의 환계 등 주변 잔당들을 통합하면서 몇개의 군벌이 새롭게 잉태되었다. 재편된 북부 군벌은 다음 세력들로 나눠졌다.

직계 오패부는 조금 남쪽으로 이동하여 남부군벌들과의 최전선에 자리잡았다. 오패부가 남쪽으로 물러나자 염석산이 독립된 세력으로 성장했다. 또, 절강을 중심으로 흩어진 5성연합군을 형성하여 손전방이라는 군벌이 성장하게 되었다. 봉계에서 파생된 장종창은 직노연합군으로 산동지역에 자리잡게 되었다. 반란을 일으킨 풍옥상은 북경을 장악하였다가 북방대전 이후 서북지역으로 옮기게 된다. 


북방대전

장작림의 봉계는 풍옥상의 배반으로 직계의 맹장 오패부를 제압할 수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풍옥상과 장작림은 서로를 신뢰하지 않았다. 결국 둘의 다툼이 시작되었다. (직봉대전 때, 풍옥상은 베이징을 점령했다. 그 때, 그가 마지막 황제 푸이를 내쫓았다.) 장작림은 풍옥상을 제거하기 위해, 풍옥상의 배신에 이를 갈고 있는 오패부와 직노연합군 장종창, 5성연합군 손전방이 연합하여 반적동맹을 맺고 베이징을 점거하고 있는 풍옥상을 공격했다. 기회를 보던 염석산 역시 풍옥상 공격에 가담했다. 북부의 모든 군벌이 풍옥상을 공격하기 위해 반적동맹을 맺고 전쟁을 벌였고, 이 전쟁이 북방대전이었다. 결국 풍옥상은 베이징을 버리고 서북지역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풍옥상은 이제 남부정권과 손을 잡는다.


남부 군벌들의 쟁투

남부군벌은 사천, 귀주, 운남, 양광(광동, 광서) 등 지역중심으로 군소세력이 난립했지만, 결국 전계인 당계요와 계계인 육영전이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다. 북부에서 장훈이 푸이를 옹립하는 복고운동이 일어나자 손문 등의 남부군벌들은 호법전쟁을 일으키며 북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남부의 군벌들 역시 호법전쟁은 명분이었을 뿐 주변지역을 힘으로 통합하며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데 급급했다. 그러다 보니 남부의 군벌들은 북양군들과 휴전을 맺어 버리게 되고 손문의 1차 호법전쟁은 이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물러났던 손문은 진형명의 세력을 등에 업고 다시 등장했다. 그러나 진형명은 손문을 배반하게 된다. 그는 손문이 하고자 하는 북벌을 통한 통일은 세상을 더욱 어지럽힌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그는 오패부와 사실은 내통하며 서로 힘을 소비하지 않고 싶었고, 북벌보다는 남부정권 내에서 실권을 쥐고 싶었다. 진형명이 손문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결국 손문의 2차 호법전쟁은 멈추고 만다. 이 시기, 북부의 풍옥상은 베이징을 점거하고 있었고, 남쪽의 손문 정권과 협력하고 있었다. 풍옥상은 손문을 베이징으로 불렀고, 손문은 베이징을 방문한 후 숨을 거두고 만다.


장개석의 등장과 북벌의 시작

손문이 죽자, 장개석은 광주를 중심을 빠르게 군대를 장악해갔다. 북부가 서로 다투는 동안 그는 손문에 반기를 든 진형명을 제압하기 위해 두차례 동정을 실시하고 동시에 손문에 반기를 든 등본은을 제압하기 위해서 남정해갔다. 이렇게 장개석은 주변을 통합하고, 손문의 뜻을 이어 북벌을 시작한다.


북부의 군벌들은 기본적으로 남부정부가 북벌 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를 견제하며 자신의 군사만 보전하는 것만 관심이 있었다. 사실 북양군 소속이었던 북쪽의 군벌들을 다 합치면 남부군벌의 합보다 훨씬 컸다. 그럼에도 장개석은 북부군벌들간의 이런 관계를 잘 알기 때문에 각개 격파를 통해 가능하다고 보았다.


우선은 북벌의 가장 첫번째에 오패부의 군대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동쪽 절강방면에는 손전방이 버티고 있었다. 오패부의 뒤에는 염석산이 포진하고 있고, 손전방 뒤에는 직로연합군 장종창이, 그 뒤 동북에는 장작림이 있었다. 다만 서안에서부터 밀고 내려오는 풍옥상만큼은 북벌군 편이었다.


장개석의 기본전략은 '오패부를 공격하고, 손전방과 타협하며, 장작림을 자극하지 않는다'는 전략이었다. 워낙 강력했던 오패부를 두려워하기는 손전방도 마찬가지여서 손전방은 장개석이 오패부를 공격하는 동안 우선 관망했다. 서로 싸우다가 힘이 소진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남부정권의 분열

남부군은 여러군데에서 승리를 거두며 야금야금 북으로 진격했다. 계속 상승하던 남부정권은 내부 권력다툼을 하게 된다. 장개석이 군사적 책임자로서 세력을 키워갔다면 정치적 책임자로서 왕정위가 있었다. 결국 장개석을 중심으로 하는 남경파와 왕정위 중심으로 하는 무한파로 두개의 정권으로 나뉘게 된다.


이 즈음, 오패부가 계속 수세에 몰리자 마침내 다음 상대는 자신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손전방이 참전했다. 오패부를 돕기보다는 오패부가 무너지기 전에 남부군벌들을 같이 상대하고자 한 것이다. 직로연합군의 장종창도 마찬가지였다. 강력한 적이자 같은 북부군이었던 직계의 거물 오패부가 무너질 것 같자, 장작림도 가담하게 되었다.


손전방은 작전에 능했고 장개석의 남경군대가 서주공략에서 패퇴하게 됐다. 이 때를 노리고 무한정부의 당생지가 손전방과 내통하여 장개석을 노리고 다가오자 장개석은 전권을 놓고 물러났다.

장개석이 하야하자, 왕정위는 장개석의 총사령관직을 사면하게 하고 풍옥상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풍옥상이 서북쪽에서 진격하고, 자신은 남부에서 북벌을 해 나가는 것으로 했고 결국 정주에서 만난다. 여기까지 1차 북벌에 해당된다.


원세개 시절의 북양군


북벌전쟁

장개석이 복귀했다. 그는 특유의 장악력으로 빠르게 장악한다. 그는 서정을 통해 당생지의 반란을 제압하게 되고 당생지의 잔당을 흡수하면서 이종인-백숭인 세력이 부강하게 되었다.


장개석은 서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서 북벌을 다시 감행한다. 그는 우선 오패부의 잔당을 확실히 소멸시키기 시작했다. 오패부가 괴멸할 무렵 손전방도 참전하였다. 오패부 뒤에 도사리고 있던 염석산은 마지막까지 주판을 튀기다가 결국 그는 북벌군에 동참한다.


이로서 북벌군은 제4집단군으로 편성하여 본격적인 북벌을 한다.

제1집단군은 장개석 군단으로 가장 동부지역을 따라 북진한다. 5성연합군 손전방과 직로연합군 장종창의 본진이다. 제2집단군은 풍옥상 군단으로 서에서 동으로 밀고 가는 것이다. 풍옥상은 그보다 조금 더 북부에 있는 제3집단군인 염석산과 제1집단군의 장개석을 지원하면서 그 사이 존재하는 북부군들을 격파해갔다. 제3집단군은 염석산 군단이다. 그는 풍옥상보다 조금 더 북쪽에 있었으므로 조금더 전방에 있어서 장작림의 봉계를 직접 상대했다. 제4집단군은 반란군 당생지를 처벌하고 다시 북상해오는 이종인-백숭회 군단이었다. 그들은 급할 것이 없으므로 천천히 북상했다.


북벌군이 4개 방면으로 밀고 올라오자, 전략의 달인이라는 손전방(5성연합군)과 장종창(직로연합군)마저 차례로 무너진다. 봉군의 장작림은 사방에 흩어진 군대를 한 곳에 모아 재정비하여 대적하기로 마음먹고 군대를 산해관 밖으로 철수한다. 장성 밖으로 같이 이동해 합류하려던 장종창은 봉군이 그 누구도 장성을 넘지못하게 철벽처럼 막는 바람에, 장작림과 장개석 사이에 낀다. 결국 직로군과 장종창은 봉군과 북벌군 사이에 빠져 괴멸되고 말았다.


이로서 북벌군은 북경까지 장악하고, 사실상 북벌을 성공한 듯 했다. 이제는 남은 것은 거대세력 봉군 뿐이었다. 



봉군의 결단

한편, 산해관 이북으로 철수하던 장작림의 전용열차가 황고돈 역에서 도착했을 때 일본군이 미리 설치해둔 폭발물이 폭발하여 장작림은 폭사하고 말았다. 

봉군은 산해관  밖이자 자신의 본거지인 동북지역에서 북벌군을 상대하고 했지만 징작림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변화가 왔다. 


봉군은 큰 고민에 빠졌다. 그동안 봉군을 지원해주었고, 현재 만주에 있는 일본군과 손을 잡느냐, 같은 민족인 장개석에게 복속하느냐. 장학량은 아버지 장작림을 폭사기킨 주범이 일본인 것을 알았던 것 같다. 장학량은 장개석의 국민군에 복속했다.

이로서 장개석은 군벌들을 통합하고 천하를 통일했다.


중원대전

이제 공식적인 적이 없다.

그러나 장개석도, 풍옥상도, 염석산도, 장학량도, 이종인(계계)도 자신의 군대도 있었고 야심도 있었다. 그들의 관계는 시한폭탄을 품고 있는 것과 같았다. 이 4개의 거대군벌을 '장풍염계'로 불렀다.


그러나 천하는  통일됐고 그 수많은 군벌들은 필요가 없게 됐다. 적어도 겉으론 그랬다. 어마어마한 군유지 비용으로 국가 및 지방의 경제는 파탄이 나고 있었다. 

장개석은 군벌들에게 각자 군대를 감축하자고 제안했다. 누구나 알듯이 그것은 그 때 있던 명분이었고 진실은 권력투쟁이었다. 군사를 잃는 것은 정치적 패배를 의미했다.


풍옥상도 염석산도 최고 실세 장개석과 손을 잡고 나머지 군벌들을 정리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풍옥상을 정리하는 것이 장개석에게도 유리했다.


장계전쟁

장개석의 이러한 구조조정에 가장 먼저 남부의 계계군벌(이종인-백숭회)이 반발했고 풍옥상도 불만을 표시했다. 장개석은 남과 북을 동시에 상대할 수 없었고 풍옥상과 다시 손을 잡고 계계군벌을 먼저 제압한다.


반장연합

남부가 정리되자 남은 것은 풍옥상과 염석산이었다. 풍옥상은 염삭산과 손을 잡고 반장연합을 수립한다. (초기에 풍옥상이 염석산과 손을 잡으러 찾아갔다가 염석산 감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풍옥상이 무너지면 그 다음은 자신이라고 깨달은 염석산은 풍옥상을 풀어주고 반장동맹을 맺는다). 남아있는 계계군벌도 동참하여, 반장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염석산, 부총사령관으로 풍옥상, 이종인으로 구성되었다.


장개석은 풍옥상-염석산 등 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염석산은 간사한 자였으며, 풍옥상은 우직한 군인이었다. 풍옥상이 공격할 때 염석산이 제 때 움직여줬다면 충분히 승산있는 전쟁이었음에도 염석산은 자신의 군대를 아끼며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따라서 풍옥상은 대패했다.


이 때, 기회를 보던 동북의 장학량이 장개석을 돕는다고 선언했다. 염석산은 아연질색했지만 풍옥상은 염석산이 제대로만 움직여준다면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염풍연합군은 동북군의 개입으로 무너졌다. 대적해보려던 풍옥상과 달리 정치적 계산이 빠른 군벌장군들은 이탈하고 장개석에게로 돌아섰다. 결국 염석산과 풍옥상은 하야했다.


이로써 장개석은 천하를 통일했다.



부록: 그럼 마지막 군벌 장학량은 어떻게 되었는가. 장개석은 장학량을 괴멸시키지 않았고 장학량은 훗날 서안사변을 일으킨다. 서안사변 이후, 장개석은 내리막길을 걷는다. 그러나 장개석의 몰락을 불러온 것은 군벌이 아니라 공산당이라는 새로운 정치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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