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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파의 몰락

노력 서사의 기만

by Yong

공중파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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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딛고 일어나 스포츠계의 전설이 된 한 방송인을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한다. 그는 특혜가 아닌 실력으로 자신을 증명했고, 수많은 비난과 견제를 겪으면서도 꿋꿋이 성장했다. 그의 삶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런 호감과 별개로, 나는 그와 그의 가족이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에는 좀처럼 몰입하지 못한다. 그것은 개인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미디어의 기만적인 연출 방식에 대한 불편함 때문이다.


'노력하면 된다'는 거짓말, 그리고 환경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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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명인들의 자녀가 해외 명문대에 진학했다는 기사가 연일 쏟아진다. 축하할 일이다. 나라도 내 자식이 좋은 대학에 갔다면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적인 성취가 메인 뉴스에서까지 반복적으로 소비되는 현상은 씁쓸하다. 해외 명문대는 합격보다 유지가 더 어려운 곳이다. 연간 1억이 훌쩍 넘는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하는 것은, 평범한 가정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


애초에 그들 가족은 예능을 통해 서울 최고급 주거지에 거주하며 고액의 사교육을 받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치열한 국내 입시 경쟁을 피해 해외 유학으로 눈을 돌릴 수 있었던 것 또한, 그 정도의 능력을 갖춘 부모였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물론 진학 이후의 성공은 본인의 몫이겠지만, '환경'이라는 절대적인 출발선을 무시한 채 모든 것을 '개인의 노력'으로만 포장하는 언론의 태도는 위선적이다. 나는 15년간 사교육 현장에서, 실력은 노력으로 어느 정도 올릴 수 있지만 '기회'는 환경이 만든다는 것을 뼈저리게 목격해왔다.


가족 예능의 기만, 그리고 공중파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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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층 가족 예능은 "그들도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한다"는 식의 스토리로 대중의 공감을 얻으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히 연출된 기만이다. 그들은 비난받을 이유가 없는 좋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을 둘러싼 콘텐츠 구조는 계급 격차를 감추고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나는 그들이 가진 이점으로 방송 활동을 하는 것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런 위주의 예능이 결국 공중파의 전성기와 몰락을 동시에 가져온 핵심 요소 중 하나라고 본다.


언론의 이중성은 더욱 역겹다. 평소에는 유명인 가족을 미화하며 '노력 서사'를 팔아먹다가, 만약 그들에게 입시 비리나 다른 문제가 터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가장 잔인하게 물어뜯으며 '조리돌림'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들에게 인간은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 시청률을 위한 소모품일 뿐이다.


하지만 대중은 더 이상 속지 않는다. 한때 통했던 '상류층 엿보기'와 '감동 포르노'는 이제 식상해졌고, 사람들은 공중파를 떠나고 있다. 그 증거가 바로 황금 시간대를 채우는 건강식품과 안마의자 광고다. 한번 떠난 시청자는 웬만해서 돌아오지 않는다. 과거에는 공중파를 실시간으로 봐야 시대의 흐름에 동참하는 기분을 느꼈지만, 요즘 공중파를 보면 오히려 시간이 멈춘 듯한 기시감마저 든다.


트로트 열풍, 그리고 마지막 발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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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파의 몰락을 가속화한 또 다른 요인은 '트로트 열풍'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다. 트로트라는 장르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손쉬운 시청률 장사의 도구로만 소비한 공중파의 안일함이 문제였다. 젊은 층은 학을 떼고 떠나갔고, 공중파는 스스로 '고령층 매체'라는 낙인을 찍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트로트 열풍의 1인자였던 임영웅조차 그 자리에 오른 후에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발라드 음악으로 돌아갔다. 트로트 시장은 여전히 건재하지만, 그 무대는 이미 공중파가 아닌 유튜브와 OTT로 넘어간 지 오래다.


물론 공중파의 상징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유재석이 진행하는 예능에 출연하는 것은, 여전히 그 인물이 '대세'라는 증명서와도 같다. 유튜브에서 아무리 인기가 많아도, 유재석의 프로그램에 나오는 순간 '메이저'로 진출했다는 인식을 준다. 하지만 그것은 공중파 시스템의 힘이 아니라, 유재석이라는 대체 불가능한 개인의 신뢰도에 기댄 마지막 자존심일 뿐이다. 이제 공중파는 스타를 키워내는 곳이 아니라, 외부에서 이미 성장한 스타를 뒤늦게 초대하는 곳으로 전락했다.


나는 이제 내가 원하는 콘텐츠를 검색 한 번으로 찾아보고, 별로면 미련 없이 다른 것을 찾아 떠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감정과 시간의 주도권은 이미 시청자에게 넘어왔다. 공중파는 그 거대한 흐름을 외면한 채, 여전히 낡은 방식으로 우리를 붙잡으려 하지만, 한번 떠난 마음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이 이 몰락의 시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유일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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