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일이 있으면 자주 가는 바에서 위스키를 마시는 편이다. 한두 잔 정도 느긋히 마시다 보면 긴장과 스트레스가 풀리고 어느새 편안한 마음으로 집에 가 잠들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이 평일이며 내일이 출근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향한 것은 마음의 평화가 그만큼 간절했던 결과이다.
찬란한 시내와 조용한 거주지 사이 그 어딘가 2층에 위치한 바는 그 위치에 걸맞게 어느 날은 활기차며 또 어느 날은 차분함을 지닌 곳이다. 한주의 시작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탓일까. 손님이 얼마없어 오늘은 차분한 날이었으며 그렇기에 나는 더욱 편안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바텐더와 나의 사이엔 메뉴판이 필요가 없었고 나는 잠시 고민 끝에 늘 마시던 위스키를 주문하였다.
나두라는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여러 위스키를 방황하다 마침내 정착한, 가장 손이 잘 가는 옷처럼 편안한 위스키이다. 60도라는 도수에 맞게 짜릿하면서도 또 적당히 부드러운, 우울할 땐 우울한 대로 느긋할 때엔 느긋한 대로 즐길 수 있는 위스키라고 생각한다. 대화가 없어도 편안한 연인처럼 언제 만나도 걱정이 없는 그러한 맛이다. 입술에 닿기 전 먼저 다가오는 향기의 설렘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전의 설렘과도 닮아있다. 결국은 생각하기 피곤할 때에 언제든지 주문할만한 위스키인 것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것은 적절한 간격이 중요하고 또한 그 간격의 조절에서 오는 긴장감이 있다. 그것이 꾸준히 봐야만 하는 회사에서의 간격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운이 좋은 덕에 나는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고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인복이 좋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편하고 친근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성큼 선을 넘어버리는 일이 생긴다. 오늘이 그러한 날이었다.
항상 친근하게 대해주며 장난을 주고받던 상사에게 너무 편하게 말을 하였던 것이 문제였다. 함께 있던 또 다른 상사에게 '너무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거 아니냐'라는 말을 들은 순간 '아 혹시 내가 이 상사에게 편하게 대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만만하게 보여서 그러는 것처럼 생각되면 어쩌지'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잘해주고 고마운 사람에게 미안한 일을 만드는 것은 대놓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욕을 듣는 것보다 힘든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상사에게는 사과를 하였고 전혀 문제없이 지나간 하나의 해프닝이었지만 미안함에서 점점 커져간 나의 감정은 어느새 '평소에도 나의 직설적인 언행에 다른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있진 않을까? 나는 천성이 못 된 사람인 건가?' 하는 생각까지 뻗어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바텐더가 이전에 위스키를 마시러 왔던 날의 얘기를 건네어왔다. 이곳에서 가장 많은 술을 마신 날이었는데 나에게는 전혀 기억이 남아있지 않은 날이었다. 분명 취한 것 같은데 행동을 보아하니 취한 것 같지 않아 이제껏 나의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던 바텐더에게 저 손님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혹시나 싶어 바텐더에게 그날 혹시 무례하거나 거친 언행이 없었느냐 물어보았다. 만약 그렇다 하면 깊은 사과와 함께 이 바를 다시 올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바텐더는 '전혀 그런 것은 없었고 평소처럼 젠틀했다. 여전히 착한 손님이셨다.'라고 얘기해 주었다.
그 말은 오늘의 나에게 매우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고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신 상태에서의 무의식마저 괜찮았다는 거니까. 가끔씩 실수를 할 때가 있지만 본질 자체는 나쁘지 않구나라고 다시 한번 나를 믿을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증명이었다.
'다행이네요. 좋네요. 그래도 매번 그렇게 취해서는 안되니까 오늘은 한잔만 마시고 가야겠어요.'
좋은 술, 좋은 말, 그리고 마음의 평화. 충분히 한 잔으로도 깔끔하였기에 나는 평소보다 일찍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