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해진 나를 다시 붉고 선명하게 만드는 사소한 발견
아침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식탁 위에는 묘한 적막이 흐릅니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남편을 출근시키고, 나 역시 허둥지둥 집을 나서기 직전, 문득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찻잔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반쯤 남은 식은 차, 그리고 찻잔 가장자리에 선명하게 찍힌 붉은 립스틱 자국.
보통 때라면 그것은 곧바로 싱크대로 가져가 수세미로 문질러 없애야 할 설거지감에 불과했을 겁니다. 립스틱 자국은 게으름의 증거이거나, 깔끔하게 마무리하지 못한 칠칠맞음의 흔적으로 여겨지기 쉬우니까요. 그런데 오늘따라 그 붉은 반달 모양의 자국이 발걸음을 붙잡습니다. 마치 나에게 무언가 말을 걸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늘 지우는 삶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먼지를 털고, 얼룩을 닦고, 삐져나온 것들을 정리합니다. 깨끗함이 곧 미덕이고, 흔적 없음이 곧 완벽함이라고 믿으면서요. 하지만 그렇게 모든 것을 깨끗이 지워낸 공간에서, 가끔은 나 자신조차 지워진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가 있지 않은가요?
이 글은 바로 그 지워지지 않는 자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무심코 남긴 찻잔의 립스틱 자국이, 구겨진 메모지가, 닳아버린 구두 굽이 사실은 오염이 아니라, 내가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서명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잠시 그 찻잔을 닦지 말고 그대로 두어 보세요. 그리고 그 붉은 자국을 가만히 응시해 보시길 바랍니다. 거기에는 투명 인간이 되어가는 당신을 다시 선명하게 만들어줄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와 아이를 재우고 나면, 하루 중 유일하게 고요한 시간이 찾아옵니다. 거실에 널브러져 있던 장난감을 바구니에 담고, 식탁 위를 행주로 훔치고,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까지 줍고 나면 집은 마치 모델하우스처럼 완벽해집니다.
먼지 하나 없는 깨끗한 거실, 줄 맞춰 정리된 책장, 물기 하나 없는 싱크대. 그 완벽한 정돈 속에서 뿌듯함을 느끼는 대신,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이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이 깨끗한 공간에, 오늘 나를 위한 시간은 단 1분이라도 있었던가?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 혹은 회사의 팀장이라는 역할은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정작 나라는 고유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아침에 바른 립스틱은 점심을 먹고 지워진 채 방치되었고, 거울 속의 나는 화장이 번진 채 푸석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깔끔하고 빈틈없는 상태를 생산적이고 훌륭한 삶이라 여깁니다.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은 빈 책상을 보며 정리 잘 된 상태라고 칭찬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깨끗한 빈 책상은 나의 부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내가 그곳에서 아무것도 읽지 않았고, 아무것도 쓰지 않았으며, 어떤 치열한 고민도 하지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으니까요.
집이 깨끗해질수록 나는 투명해지는 기분. 내가 쓸고 닦아낸 것이 단순히 먼지가 아니라, 나의 시간과 나의 취향, 그리고 나의 존재감은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어쩌면 타인을 위해, 가족을 위해, 회사를 위해 공간을 내어주느라 스스로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머물렀던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말입니다.
이제 시선을 조금 달리해볼까요? 내가 남긴 그 자국들을 오염이 아닌 흔적으로, 실수가 아닌 서명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감히 흔적학(Trace-ology)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사물은 항상 누군가의 살아 있는 경험 위에 놓인다고 했습니다. 덩그러니 놓인 사물은 그저 물질에 불과하지만, 누군가가 그것을 사용하고 만지고 곁에 두었을 때 비로소 그 사물은 세계와 관계를 맺습니다. 즉, 모든 흔적은 내가 이 세계와 접촉했다는 생생한 현장의 기록인 셈입니다.
다시 찻잔 속 립스틱 자국으로 돌아가 봅니다. 그 붉은 자국은 무엇을 말하고 있나요? 그것은 당신이 오늘 아침, 붉은색을 선택할 만큼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뜨거운 차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려 했던 당신의 의지가 닿은 자리입니다. 당신이 입술을 대고 무언가를 섭취하며 생을 이어가고 있다는, 살아있음의 가장 원초적인 표식입니다.
일본의 미학 개념인 와비사비는 불완전하고 미완성인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습니다. 립스틱이 살짝 번진 자국, 손때 묻은 다이어리, 굽이 닳은 구두는 공장에서 갓 나온 매끈한 새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흠집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사람이 보낸 시간의 두께입니다.
닦아내야 할 얼룩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귀찮은 집안일이었지만, 나의 서명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나를 증명하는 오브제가 됩니다. 완벽함은 차갑지만, 흔적은 따뜻합니다. 당신의 립스틱 자국은 당신의 온도가 그곳에 머물렀음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혹은 부끄럽게 여겼던 흔적들을 다시 발견해 봅시다.
식탁 위에 반쯤 남겨진 채 식어버린 찻잔을 볼 때, 우리는 낭비했다거나 게으르다고 자책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 식어버린 차는 사실 당신의 치열한 몰입을 증명합니다. 따뜻할 때 마시는 여유조차 미뤄두고 아이를 돌보았거나, 급한 업무 전화를 받았거나, 누군가의 부름에 달려갔던 당신의 헌신이 그 차를 식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 식은 차는 실패한 휴식이 아니라, 당신이 타인을 위해 기꺼이 내어준 시간의 온도입니다.
가방 속 구석에 처박힌 구겨진 메모지는 어떤가요? 급하게 휘갈겨 쓴 글씨, 찢어진 귀퉁이. 그것은 쓰레기가 아닙니다. 찰나의 순간에도 떠오르는 영감을 붙잡으려 했거나, 잊지 않기 위해 애썼던 당신의 지적 노력의 화석입니다. 그 꼬깃꼬깃한 종이 조각에는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 하는 당신의 욕망이 화석처럼 새겨져 있습니다.
현관에 놓인 굽 닳은 구두를 보십시오. 그것은 낡은 소모품이 아니라, 당신이 오늘 하루 중력과 싸우며 버텨낸 무게의 총량입니다. 당신이 걸어온 그 길들이 그 굽을 깎아낸 것입니다.
이렇게 나의 주변을 둘러보면, 나를 둘러싼 모든 사소한 것들이 사실은 나를 열렬히 응원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가 닿았던 모든 곳에 내가 숨 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지워지지 않는 존재감을 더 선명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거창한 성공이나 성과로 나를 증명하려 하지 마세요. 대신 아주 사소한 감각의 흔적들을 긍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보세요.
오늘 당신이 선택한 립스틱의 색깔을 기억해 주세요. 단순히 예뻐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의 기분과 날씨에 맞춰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색임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찻잔에 남은 그 자국을 보며, 아, 내가 오늘 이토록 붉고 선명하게 존재했구나, 하고 스스로에게 말해 주세요.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이 나오면 페이지 귀퉁이를 과감하게 접어보세요. 깨끗하게 책을 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요동쳤던 지점을 물리적으로 표시해 두는 것입니다. 그 접힌 자국은 훗날 다시 그 책을 펼쳤을 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이어주는 비밀 통로가 됩니다.
당신만의 향기를 가지는 것도 좋습니다. 내가 머물렀던 자리에 은은하게 남는 향수 냄새는 보이지 않지만 가장 강력한 존재의 증명입니다. 내가 자리를 비운 뒤에도 타인이 나를 감각할 수 있게 하는 힘. 그것은 내가 단순히 기능적인 역할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분위기를 지닌 사람임을 알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늙고, 현직에서 물러나고, 아이들은 자라 우리 품을 떠날 것입니다. 역할은 사라지고 직함은 지워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 곳곳에 새겨넣은 이 사소한 흔적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당신이 가족을 위해 차려낸 식탁의 온기는 아이들의 정서 깊은 곳에 따뜻한 기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당신이 책상 머리맡에 붙여두었던 메모들은 동료들에게 영감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커피 향, 당신이 자주 흥얼거리던 노래, 당신이 웃을 때 생기는 눈가의 주름.
이 모든 흔적이 모여 당신이라는 사람을 설명합니다. 당신이 남긴 자국들은 타인의 삶에 가닿아 부드러운 울림이 됩니다. 그것은 메아리처럼 퍼져나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더 멀리까지 당신의 존재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당신의 흔적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찻잔에 묻은 립스틱을 황급히 닦아내지 마세요. 당신은 얼룩이 아닙니다. 당신은 지워져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당신은 찻잔 속 립스틱처럼, 이미 붉고 선명하게,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