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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 밑 1cm의 심리학

멀리 보느라 지친 당신이 놓치고 있던 가장 가까운 위로의 거리

by 하레온

1. 서론: 소파 밑을 뒤지는 사람들


토요일 오후, 소파에 누워 TV 채널을 돌리려는데 리모컨이 보이지 않습니다. 분명 1분 전까지 손에 쥐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벌떡 일어나 소파 쿠션을 들추고, 테이블 아래를 훑고, 심지어 부엌이나 침실까지 뛰어갔다 옵니다. 한참을 씩씩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을 때, 우리는 허탈한 웃음을 짓게 됩니다. 리모컨은 바로 내 무릎 위에, 혹은 내가 깔고 앉은 방석 바로 옆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허무한 술래잡기는 비단 리모컨 찾기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코앞에 있는 안경을 찾아 온 집안을 헤매고, 손에 쥔 스마트폰으로 전화를 걸며 스마트폰이 없어졌다고 소리칩니다. 속담은 이를 두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심리학자의 관점에서 이 현상을 들여다보면, 이것은 단순한 건망증이나 부주의함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인간이라는 종이 생존하기 위해 수만 년간 다듬어 온 슬픈 진화의 역사가 숨겨져 있습니다.


인간의 뇌는 태생적으로 가까운 곳보다 먼 곳을 먼저 살피도록 진화했습니다. 원시 사바나 초원에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포식자는 늘 멀리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수풀 너머의 사자를 먼저 발견하는 것이 발밑의 열매를 줍는 것보다 생존에 훨씬 중요했습니다. 우리의 시각 시스템과 주의력은 위협을 감지하기 위해 원경을 스캔하도록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이 오래된 생존 본능이 현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행복의 맹점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위험을 감지하듯 행복도 습관적으로 멀리서 찾으려 합니다. 승진이라는 먼 미래, 은퇴 후라는 막연한 시점, 혹은 어딘가에 있을 이상적인 파랑새를 찾아 시선을 끊임없이 지평선 너머로 던집니다. 그 사이, 정작 우리의 생존과 정서를 지탱해 주는 가장 가까운 기쁨들은 생존에 시급하지 않다는 이유로 시야에서 지워집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행복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뇌가 멀리 있는 것을 찾느라, 발밑에 있는 것을 배경 화면으로 처리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그 오래된 본능의 설계를 역이용하여, 시선을 아주 조금, 딱 1cm만 돌려 잃어버린 행복을 재발견하는 심리학적 여정입니다.




2. 왜 우리는 가까운 것을 못 보는가: 뇌의 스포트라이트

Image_fx (84).png 망원경으로 먼 지평선만 바라보느라 발밑에서 빛나는 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묘사한 초현실적 삽화.


투명 고릴라 실험이라는 유명한 심리학 실험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농구공을 패스하는 횟수를 세라고 지시한 뒤, 고릴라 분장을 한 사람이 화면 중앙을 가로질러 지나가게 합니다. 놀랍게도 실험 참가자의 절반 이상은 고릴라를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눈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뇌가 공을 세는 과제에 집중하느라, 그 외의 시각 정보를 불필요한 데이터로 분류하고 삭제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를 전문 용어로 부주의맹(Inattentional Blindness)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뇌는 24시간 켜져 있는 고성능 카메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하려는 짠돌이 편집자에 가깝습니다. 뇌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설정한 목표 외의 것들은 과감히 암전 처리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매일 다니는 출근길의 가로수가 언제 꽃을 피웠는지, 매일 마주하는 가족의 표정이 오늘 어땠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익숙함은 뇌에게 있어 삭제 대상 1순위입니다. 뇌는 새로운 자극에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반복되는 자극은 배경으로 밀어버립니다. 이를 감각 순응이라고 합니다. 새 옷을 입었을 때의 까끌까끌한 느낌은 1분도 안 되어 사라지고, 방 안에 밴 향기는 금세 맡을 수 없게 됩니다.


이 메커니즘이 행복에 적용될 때 비극이 시작됩니다. 곁에 있는 사람의 친절, 매일 아침 마실 수 있는 따뜻한 커피, 큰 병 없이 움직이는 내 몸과 같은 것들은 너무나 익숙해서 자극이 되지 않습니다. 뇌는 이를 당연한 것, 즉 보지 않아도 되는 정보로 처리합니다. 대신 나를 화나게 하는 직장 상사의 한마디나, 뉴스에 나오는 불안한 경제 전망 같은 자극적인 정보에는 스포트라이트를 비춥니다.


결국 우리는 행복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행복을 감지하는 센서가 익숙함이라는 먼지에 덮여 작동하지 않고 있는 상태입니다. 뇌의 조명 감독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불안이라는 주인공만 비추느라, 무대 바로 옆에 서 있는 행복이라는 조연을 어둠 속에 방치하고 있습니다.




3. 복잡함에 중독된 뇌: 어려운 길을 택하는 심리

Image_fx (85).png 공중에 뜬 복잡하게 얽힌 매듭이 벽에는 단순한 하트 모양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복잡함 속 단순한 진리를 암시하는 이미지.


우리가 등잔 밑을 보지 못하는 또 하나의 강력한 이유는 바로 복잡성 편향(Complexity Bias) 때문입니다. 행동경제학에서 말하는 이 개념은, 인간이 단순한 해결책보다 복잡하고 난해한 해결책을 본능적으로 더 신뢰하고 선호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만성 피로를 호소하는 사람에게 의사가 물을 많이 마시고 7시간 이상 주무세요라고 처방하면, 환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냅니다. 너무 뻔하고 단순해서 효과가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반면, 이름도 어려운 희귀 성분이 들어간 고가의 영양제를 처방하거나 복잡한 의학 용어를 써가며 설명하면, 환자는 그 처방을 훨씬 더 신뢰하고 기꺼이 지갑을 엽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중요한 것은 어렵게 얻어야 한다 또는 가치 있는 것은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노력 정당화(Effort Justification) 심리라고도 합니다. 고통스럽게 노력해서 얻은 결과물일수록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 심리가 행복론에 적용되면 우리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덫에 걸리게 됩니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거창한 조건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연봉이 얼마 이상 되어야 하고, 번듯한 아파트가 있어야 하며,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위에 올라야 비로소 행복할 자격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퇴근길에 마주친 붉은 노을이 주는 위로나, 샤워 후 느끼는 개운함 같은 단순한 행복들을 하찮게 여깁니다. 이런 건 너무 쉬우니까, 이런 걸로 행복해하면 왠지 현실 안주 같고 발전이 없는 것 같다는 불안감을 느낍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얻을 수 있는 유보된 행복을 위해, 지금 당장 누릴 수 있는 확실한 행복들을 헐값에 넘겨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고수들은 압니다. 가장 위대한 진리는 언제나 가장 단순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복잡함은 종종 본질을 흐리는 안개일 뿐입니다. 우리가 걷어내야 할 것은 삶의 난이도가 아니라, 행복은 어려워야 한다는 우리 마음속의 편견입니다.




4. 찾기(Seeking)에서 보기(Seeing)로: 시선의 1cm 이동

Image_fx (86).png 창가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 아래 담요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는 손을 클로즈업하여 일상의 감각을 표현한 사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뇌의 스포트라이트를 다시 등잔 밑으로 가져올 수 있을까요? 뇌의 설정을 바꾸는 것은 대단한 결심이나 노력이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힘을 빼는 기술에 가깝습니다.


해결책은 찾는 것(Seeking)을 멈추고 보는 것(Seeing)으로 모드를 전환하는 것입니다. 찾는다는 행위는 무언가가 없다는 결핍을 전제로 합니다. 반면 본다는 행위는 이미 거기에 존재하는 것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이 전환을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추상적인 다짐이 아니라, 우리의 몸을 이용한 감각적 앵커(Anchor)를 다시 꽂는 것입니다. 불안하거나 무언가를 찾아 헤맬 때 우리의 시선은 허공을 떠돌고 호흡은 얕아집니다. 이때 의식적으로 시선의 초점을 내 눈앞 1m, 혹은 내 손끝으로 가져오는 물리적인 행위가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 해볼 수 있는 간단한 훈련이 있습니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그리고 내 시야에 들어오는 사물 중 내가 좋아하는 색깔을 가진 물건 세 가지를 찾아보십시오. 혹은 지금 내 엉덩이에 닿아 있는 의자의 감촉, 내 코로 들어오는 공기의 온도에 집중해 보십시오.


이 단순한 감각의 전환은 뇌의 과열된 편도체를 식히고, 외부의 위협을 감지하던 레이더를 내부의 감각으로 돌려놓습니다. 거창한 명상이 아닙니다. 그저 나를 둘러싼 환경을 고해상도로 다시 인식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감각의 앵커를 현재에 꽂는 순간, 배경으로 밀려나 있던 일상의 요소들이 다시 전경으로 떠오릅니다.


책상 위에 놓인 물 한 잔이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고마운 존재로 보이고, 창밖의 햇살이 나를 비추는 조명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이 바로 시선 조정(Switch of Attention)입니다. 새로운 행복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와 있었지만 내가 접속하지 않았던 행복의 주파수를 맞추는 일입니다.


행복은 쟁취하는 대상(Get)이 아니라, 발견하는 현상(Detect)입니다. 리모컨을 찾기 위해 온 집안을 뒤집어엎을 필요가 없었듯, 행복을 위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고개를 1cm 돌려, 이미 내 곁에 와 있는 것들을 바라봐 주는 시선의 자비함이 필요할 뿐입니다.




5. 결론: 가장 따뜻한 빛은 발목에 닿아 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은, 멀리 비추기 위해 가까운 곳을 희생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등잔이 아닙니다. 우리는 빛을 비추는 존재인 동시에, 그 빛을 받아 따뜻함을 느껴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제 시선을 거두어 당신의 발밑을 보십시오. 등잔 밑 1cm는 어둠의 공간이 아니라, 빛의 근원과 가장 가까운 공간입니다. 빛이 시작되는 곳, 그렇기에 가장 밀도가 높고 따뜻한 온기가 머무는 곳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파랑새는 숲속 깊은 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매일 아침 당신을 깨우는 알람 소리에, 출근길 버스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에, 그리고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돌아와 눕는 침대 맡의 서늘한 베개 감촉 속에 숨어 있었을지 모릅니다.


먼 곳을 보느라 지친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떠보십시오. 그리고 내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 딱 1cm의 반경을 다시 정의해 보십시오. 그곳은 초라한 현실의 바닥이 아닙니다. 당신이 외면해 왔지만, 단 한 번도 당신을 떠나지 않았던 소박한 기적들이 옹기종기 모여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삶의 해답은 늘 문제를 낸 그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가 너무 멀리 가서 찾았을 뿐입니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와도 좋습니다. 당신이 찾는 것은 이미 당신의 발밑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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