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rminated = 오히려 좋아
이번 여행의 이색 경험을 안겨준 단어 하나를 꼽는다면, "Terminated"
버스 운행 종료 혹은 쉬어간다는 메시지이긴 하자만 근데 멈춰 선 곳이 종점이 아닌 일반 정류장이고 일단 무조건 내려야 해서 매우 당혹스러운 알림.
런던 중심부에서 약간 동쪽에 위치한 타워브리지를 본 뒤, 중심부에 위치한 오페라의 유령 전용 극장 His Majesty's Theatre에 가려 2층 버스를 탔다. 비도 오고 해서 마침 오는 버스에 후다닥 올랐고, 2층에 올라 도시 풍경을 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가족과 나누는데 뭔가 느낌이 쎄한 느낌. 설마 하며 다음 정류장을 보니, 반대 방향으로 도시를 벗어나는 버스를 탄 것.
다행히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며 내려서 원래 가려던 방향을 향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길을 찾아 나섰다. 마침맞는 방향의 버스가 우리 뒤쪽에 보여 저거 타야 해 하며 다음 정거장으로 달려갔다. 정거장까지 버스는 큰길로 가다 신호등에 막혀 서게 되고, 우리는 건물 사이로 나 있는 대각선 길로 달리며 버스보다 먼저 정거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타게 된 2층 버스. 그러나 안도의 한숨도 오래가지 못했으는 데, 다시 탄 버스도 몇 정거장 가더니 갑자기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상황 파악이 안 된 우리가 멍하니 있으니 1층으로 내려가던 인도풍의 여성분이 Terminated 됐다고 내려야 한다고 알려줬다. "응? Terminated? 한참 운행 중에 갑자기!?"
그런데 모두들 익숙한 일이라는 듯이 버스에 내려 다음 버스를 기다린다. 그럼 버스료는 다시 내야하나?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다음 버스 오는 시간을 확인하고 얼른 런던 버스의 Teminated에 대해 검색해 봤다. 다행히 환승 후 1시간 이내는 무료 탑승이 가능하단다. 아무렴 그렇겠지. 안 그러면 불편을 끼치는 데 돈까지 더 내라고 하며 난리가 났을 것. 여하튼 오래 기다리지 않아 버스가 와 다시 탑승.
재밌는 경험이네 하며 주변 건물들을 보며 가는데 런던 중심부로 향하는 방향에선 확실히 차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천천히 가다 서다 몇 정거장이 지났을 때, 또다시 "Terminated! 엥? 이건 너무 하잖아!" 런던 사람들도 이런 일을 연속으로 겪는 것은 흔치 않은가 보다. 아까와 달리 혀를 차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시계를 본다. 차를 또 기다려야 하는데 기다려서 탄다고 해도 차는 막혀 천천히 갈 것이고 만약 또다시 Terminared 된다면... 뮤지컬 공연 시작 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듯했다. 저녁도 먹어야 하는데... 낭패다.
그렇게 시작된 런던 중심부 횡단 걷기, 아니 경보. 다행히 비는 거의 그쳐 우산을 쓰진 않아도 됐고 잦은 신호등 앞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긴 했지만 차가 아닌 걸을 때 보이는 경치와 정취는 힘들다는 생각을 잊게 해 주었다. 자동차가 아닌 사람의 속도가 되면 주변에 머무는 시선의 폭은 넓어지고 시간은 천천히 간다. 그만큼 기억에 담기는 세상의 모습도 풍부해지고 도시의 소음과 사람들의 소리와 버무려지며 '무드'로 남는 것 같다. 아직 4시 조금 지난 시간임에도 펍의 야외 스탠딩 데스크에서 맥주 한잔씩 하는 직장인들의 무리가 곳곳에 보이고, 퇴근하는 인파와 섞이어 마치 여행객이 아닌 그냥 바쁘게 어딘가를 가는 런던 시민이 된듯한 기분, 나름 이색적이고 재밌기까지 했다. 길 따라 펼쳐진 오래됐지만 멋지고 웅장한 건물들, 특히 세인트폴 대성당(St. Paul's Cathedral), 영국 고등법원 (Royal Courts of Justice) 앞에 다 달았을 때 그 웅장함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렇게 멋진 건물을 걸어 다닌 덕에 제대로 보고 사진도 남기며 제법 괜찮은 도시 관광을 하게 되었네. 런던에서 여유 있으면 찾아가보고 싶었던 하지만 스케줄에 담기 어려웠던, 도심 내 여러 건물들 사이에 위치한 런던정경대, 킹스칼리지 등을 지나며 "어? 여기가 거기네~" 하며 가족들에게 설명해 주며 지나갔는데. 신기하게도 그때의 상황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때 사람들의 움직임, 비를 머금은 런던 도시의 정취.
그렇게 경보와 같은 걸음으로 극장 근처까지 도착. 아직 한 시간 조금 부족하게 남은 시간. 그리고 길가에 늘어선 식당들. 고를 것 없이 빨리 음식을 내어 줄 수 있는 곳에서 식사하자는 생각이 일치해. 가게 앞에 나와 있는 직원에게 요 근처 극장에서 공연이 한 시간도 안 남았는데 얼마나 빨리 음식이 나 올 수 있냐 물어봤다. 다행히 걱정 말아라 주문하면 바로 나온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멘트인데... 뭐 다른 곳이 더 나으리라는 보장도 없으니, 일 잘하는 점원의 호객을 믿고 바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음식은 정말 빨리 나왔다. 한국에 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보다 빨리 나왔다고 할 정도. 인근에 뮤지컬 극장들이 많으니 이 동네 식당들은 이런 서비스에 최적화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맛은 영국의 맛ㅎㅎ. 그래도 아이가 괜찮았다 하니 오케이. 각자 화장실을 갔다 일 잘하는 직원에게 엄지 척 한 번 날려주고. 극장으로 다시 경보시작. 그렇게 시작 15분 전에 도착하여 언제 그렇게 바쁘게 달려왔냐는 듯이 차분히 입장, 런던 오리지널 오페라의 유령을 맞이했다.
2. 파리 버스 Terminated
파리라고 다르진 않았다. 하지만 우린 이미 런던에서 호되게 겪은 터라 그 상황을 그러려니 하며 받아들였다.
재밌는 것은 영국과 달리 파리의 시민의 반응. 차분한 이미지의 어떤 젊은 여성분이 내리면서 혀를 차며 한마디 하는데 "Putain!", 불어를 잘하는 아내가 듣고 피식 웃길래 슬쩍 물어보니 우리말로 "제기랄!"이란다. 그렇게 우린 다른 버스를 기다리지 않고 걸으며 발길 닿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중고 음반/책 매장을 구경하며 계획에 없던 루트의 도심 투어를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