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정되지 못하고 사라진 수많은 법안들에게 애도를 표합니다 :(
국회에서 보좌진으로 일할 때의 일이다. 입법 아이디어를 찾으며 열정에 차 있던 어느 날 저녁, 모 기관의 대관 담당자가 의원실 앞에 쩔쩔매며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얘기를 들어보니, 한 법안이 이미 발의됐음에도 불구하고 두 달이 넘도록 상임위에 상정조차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곧 위헌 판결로 효력이 정지될 법이었기에, 입법 공백을 막으려면 시급히 개정이 필요했다.
사정을 의원에게 보고하자 “왜 이런 걸 상정하지 않았느냐”며 곧바로 상임위 안건으로 올렸고, 법안은 일사천리로 통과됐다.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그동안 왜 상정조차 되지 않았느냐였다. 답은 단순했다. 의원들이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은 단독 또는 공동으로 법안을 발의할 수 있다. 21대 국회에서만 4년간 2만5천 건이 넘는 법안이 발의됐다. 그러나 발의는 말 그대로 ‘출발점’일 뿐이다. 법안은 상임위 회부, 법안심사소위, 전체회의, 법사위, 본회의라는 절차를 모두 통과해야 한다. 어느 한 단계라도 막히면 법안은 ‘계류’ 상태로 남았다가, 임기 만료와 함께 폐기된다.
특히 상임위 법안심사소위에서 안건으로 상정되지 않으면 법안은 논의조차 되지 못한다. 그리고 4년이 지나면 내용과 무관하게 자동으로 폐기된다. ‘발의했다’는 사실만 남고, 국민 삶에 영향을 줄 입법은 사라지는 것이다.
법안이 사라지는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계산이다. 상임위 간사가 상정 여부를 합의해야 하는데, 여야 어느 한쪽이 반대하면 법안은 자동으로 멈춘다. 회의장에서 치열하게 토론할 필요도 없다. 그냥 상정하지 않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임기가 끝나면 법안은 폐기된다.
더 큰 문제는 법안의 ‘내용’보다 정당 간 대립 구도가 작동한다는 점이다. 한 정당이 조금만 힘주어 강조하면 다른 정당은 제대로 검토하지도 않고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민생법안조차 여야의 유불리에 따라 처리 여부가 갈린다. 상임위를 통과하더라도 법사위에서 막히면 다시 멈춘다. 그래서 여야가 법사위원장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는 것이다. 결국 국민이 필요한 법은 정쟁 속에 뭉개지고 만다.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은 25,858건. 이 중 통과된 것은 2,959건에 불과하다. 가결률은 11.4%. 모든 법안이 통과돼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법은 제정되는 순간 국민의 삶을 제약하는데, 만약 매년 수천 건씩 법이 새로 생긴다면 국민이 지켜야 할 규칙이 하루에도 수십 개씩 바뀌는 셈이다. 신중함은 반드시 필요하다.
문제는 꼭 필요한 법안마저 정치적 이유로 좌초된다는 데 있다. 상대 당론이라는 이유로, 혹은 특정 이익집단의 목소리에 기대어 무조건 반대하는 동안 수십 년째 입법이 되지 못하는 법안이 적지 않다. 입법이 토론과 숙의가 아니라 ‘절차적 꼼수’로 좌초되는 모습은 국민에게도, 입법부 본연의 취지에도 부끄러운 일이다.
특히 여야 대립이 심화되면서 민생법안조차 정당의 유불리에 따라 처리 여부가 갈린다. 원래라면 국민의 삶과 직결되는 법안은 긴급성과 필요성에 따라 다뤄져야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첫째, 법안 발의 단계에서부터 재정 추계와 이행 가능성 평가를 강화해야 한다. 실효성 없는 법안들이 무분별하게 발의되는 것을 막는 일이다.
둘째, 상임위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된 법안은 법사위의 체계·자구 심사를 간소화하거나 생략해 바로 본회의로 가도록 해야 한다. 불필요한 발목잡기를 하나라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국회의원 평가 기준도 ‘발의 건수’가 아니라 ‘통과 여부’와 ‘법안의 실효성’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입법의 질이 높아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 구조 자체의 개혁이다. 현재는 20석 이상의 국회의원 의석을 가진 거대 양당만이 상임위 간사직과 위원장을 독점해 법안 상정권을 쥐고 있다. 제3당 이상에게도 상임위 역할을 배분해야, 한쪽 반대만으로 공익적인 법안이 좌초되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입법은 국가 시스템을 바꾸는 막강한 권한이다. 그런데 국민에게 필요한 법들이 몇 사람의 말 한 마디에 무산되는 모습을 몇 번 보고나니, 참 안타까움이 컸다.
왜 자꾸 필요한 것들이 '계류'되고 '폐기'되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