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잊혀지는 것들을 붙잡는 그릇
지난 토요일, 약속 장소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내가 앉은 자리는 버스의 한가운데, 앞과 뒤, 좌우의 사람들을 모두 바라볼 수 있는 자리였다. 처음에는 창밖 풍경에 시선을 두고 있었지만,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이상한 장면과 마주했다. 마치 어떤 신호라도 받은 듯,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고개를 45도쯤 숙이고, 손바닥 위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그 작은 화면 속에는 유튜브, 인스타그램, 드라마, 애니메이션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었다. 화면이 바뀔 때마다 얼굴빛도 함께 변했고, 짧게 웃거나 표정을 찡그리는 모습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 모든 감정은 화면이 넘어가는 속도만큼 빠르게 사라졌다. 버스 안 공기는 정적이었지만, 각자의 귀 속에서는 전혀 다른 소리가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서로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 채 각자 다른 세계 속을 달리고 있었다.
책과 글은 이렇게 조용히 자취를 감추고 있다. 스크린 속 영상과 이미지는 빠르고 강렬하지만, 손끝으로 한 번 휙 스크롤하면 순식간에 사라진다. 기억 속에 오래 머물 틈도 없이, 화면 바깥으로 밀려나 버린다.
이런 시대에 글을 쓴다는 건, 마치 번잡한 도심 한가운데서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는 일과 같다. 빛과 소리가 끊임없이 몰아치는 세상 속에서, 고요와 마주하는 시간을 스스로 마련하는 것이다. 글은 즉각적인 박수와 ‘좋아요’를 보장하지 않는다. 때로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은 채,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한 문장, 한 단어가 언젠가 누군가의 마음속에 스며들어 잔잔하지만 오래 가는 울림을 만들 수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내 어린 시절의 기억 속으로 돌아간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여름 방학이면 시골 할머니 댁으로 향하던 버스에 몸을 싣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논두렁 옆으로 끝없이 이어진 초록빛 물결, 한낮의 햇볕에 반짝이는 개울, 나무 그늘 속에서 귀뚜라미와 풀벌레가 내는 음악. 뒷마당의 대나무숲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도시에서는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를 품고 있었다. 습기 섞인 흙냄새, 장독대 위에 내려앉은 햇볕 냄새, 그리고 방금 베어낸 풀의 향기까지. 그 모든 것이 지금도 내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어쩌면 글을 쓴다는 건 그때의 공기와 소리를, 냄새와 촉감을 되살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잊히지 않도록, 사라지지 않도록. 복잡한 도시 한가운데서도 나는 문장 속에 그 바람과 햇빛을 불러온다. 그러면 잠시나마 세상의 속도가 느려지고, 마음의 숨이 고르게 된다.
시골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내게 주어진 커다란 축복이었다. 그리고 그 축복을 혼자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글이라는 그릇에 담아 나누고 싶다. 누군가가 내 문장을 읽으며, 그들 역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자기 안의 고요를 만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글을 쓸 이유는 충분하다.
글쓰기는 결국 ‘남김’의 행위다. 흘러가 버릴 순간을 붙잡아 종이 위에, 혹은 화면 위에 새겨두는 일. 지금 이 감정, 지금 이 생각은 오늘을 지나면 다시는 같은 얼굴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쓴다. 사라지는 감정과 내면의 이야기를 손끝에 걸어두기 위해.
기록하는 동안만큼은 세상이 조금 덜 빠르게 흘러간다. 하루가, 시간이, 숨이 잠시 길어지는 기분. 그 순간, 우리는 시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나는 그 느려진 틈 속에서, 세상의 속도가 아닌 나만의 속도로 살아 있음을 깊이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