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pringnote May 23. 2020

혼술 하는 마음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잠에 들기 싫은 날이 많아졌다. 

오늘 하루가 만족스럽지 않은데 이미 오늘이 거의 끝나버린 날,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오후 3시가 되어버린 주말처럼 허무한 날,

미적지근한 기분을 덜어낼 수 있는 건 오직 혼술뿐이다.

혼술상은 늘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거창하게 차려야 만족스럽다.

2만 원짜리 티 한 장도 한 달 동안 장바구니에 넣고 고민하는 나지만, 

24000원어치 막창 세트 주문에는 1초의 망설임도 용납하지 않는다. 

제일 먹고 싶은 음식을 퇴근길에 미리 배달시켜 놓으면 

집에 오자마자 남의 손으로 만들어진 근사한 혼술상을 맛볼 수 있다.

눈앞에 음식이 식기 전에 서둘러 넷플릭스를 켜 드라마를 틀어 놓고,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맥주캔을 탁! 

첫 입을 한 모금 들이킨 후 그대로 소파에 등을 기대면 

폭! 소리와 함께 터져 나오는 자동 효과음 "크으-"

나만의 패턴으로 온몸과 마음의 잠금이 한 번에 해제되는 순간이다. 

혼자 마시는 술이지만 한 번도 외로웠던 적은 없었다.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을 뿐 속으로 끊임없이 나와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다.

이해되지 않던 일들을 하나 둘 곱씹으며 내가 왜 그랬을까,

걔는 또 왜 그랬을까 찬찬히 되뇌어 본다. 

그렇게 고요한 수다로 꿀꺽 꿀꺽 잔을 비우다 보면

하루 종일 쳇기처럼 가시지 않던 걱정들도 조금 소화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생일 선물로 뭐가 가장 갖고 싶냐며 요즘 제일 큰 관심사가 뭐냐는 친구의

물음에 요즘엔 드라마와 혼술 외엔 재밌는 게 없다고 답했다. 

지후 선배가 흰 천과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면 

난 혼술과 드라마만 있으면 무인도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요즘은 꼭 기분이 꿀꿀할 때가 아니더라도 혼술을 그 자체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조만간 배달 음식이 아닌 직배송 딱새우 회나 대창 전골 밀키트 같은

새로운 안주 메뉴에 도전해볼까 싶기도 하고, 

예쁜 술잔에 평소에 먹어보지 못했던 특이한 술들을 담아 먹어보고 싶기도 하다.

이런 것들을 모두 해보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하기에 

혼술을 할 땐 항상 열심히 돈을 벌어야지, 열심히 돈 벌어서 

먹고 싶은 안주를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결심한다. 

퇴근 후 지친 나를 위로하고, 내일 또 출근할 원동력이 되어주는 혼술.

매일 밤 맥주를 마시다 보니 아저씨처럼 불룩 나온 배가 조금 걱정이지만,

양념 곱창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내일 안주는 뭘로 할지 행복한 고민을 하는 

이 시간이 너무 좋아 당분간은 눈 가리고 아웅해볼 생각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좋아하지만, 사랑하진 않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