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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ringnote May 31. 2020

엄마의 편지

그저께였나 엄마와 같이 소파에 누워 티비를 보는데 

엄마가 갑자기 내 발을 보더니 "발이 왜 이렇게 컸지?"하는거다. 

애기 때 내 발가락 마디가 시작되는 모양이 들쭉날쭉했었는데

지금도 그런 게 신기하다며 엄마는 닦지도 않은 내 발은 쪼물딱 거렸다.  


가끔 엄마는 나를 3살 아이 대하듯이 대한다. 

그런 엄마 앞에서 같이 눈주름 세는 나이가 되어버린 딸은

거의 매일 저녁 신나서 춤추고 노래하고 재롱을 부린다. 

특히 미스터트롯이 하는 목요일 밤은 거의 콘서트라고 보면 되겠다. 

나는 목요일마다 유일하게 챙겨보는 슬기로운 의사생활 본방사수도 포기하고 엄마랑 미스터트롯을 본다.

엄마의 아이돌 임영웅이, 영탁이, 이찬원이 노래도 다 안다.  


그런데 가끔 거실에서 엄마 혼자 미스터트롯을 볼 때는 조용하다가

내가 거실로 나가면 갑자기 빵빵 터지고, 신나하는 엄마의 모습을 볼 때면

'나중에 내가 없으면 엄마는 누구랑 티비보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원래의 나라면 거들떠도 보지도 않았을 부부의 세계도 보고, 아내의 맛도 보고, 미운 오리 새끼도 본다.

같이 티비를 보면서 똑같은 웃음소리로 목이 터져라 웃고 떠들고, 

나도 같이 보고 있어서 다 아는데도 나한테 조잘조잘 방송을 설명해주는 엄마를 보는 게 행복하다.

안 보던 프로그램도 계속 보다보니 재미도 생기더라.


"그냥 결혼하지 말고 엄마랑 평생살까?"

요즘 티비를 보면서 엄마한테 자주 말한다. 

초등학생때부터 엄마나 아빠가 "나중에 커도 엄마랑 아빠랑 살꺼야?"라고 물을 때마다 

"아니 난 결혼할껀데?"라고 꾸준히 말하던 나였기에 가끔 엄마는 농담반 진심반으로 

"너는 어린 애가 한번도 엄마랑 산다고 안했어~"라고 했었는데 

지금은 내가 오히려 엄마랑 오래오래 살고 싶다고 말한다. 


엄마가 날 아이처럼 대하는 건 어릴 적 오랜 시간 엄마와 잠깐 떨어져 지낸 시간이 길어서 그런 탓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12살 때 엄마랑 헤어져 중간중간 만났었지만, 다시 같이 살기 시작한 건 고등학생 때부터였으니 

엄마의 기억 속에 애기 때의 모습이 더 많지 않을까.

요즘 부쩍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내 생일을 계기로 엄마에게 편지를 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엄마한테 써달라고 해서 엎드려 절받기로 받은 편지였지만, 

올 해 생일에 받은 가장 인상 깊은 선물이 되었다.

다음은 편지의 전문이다. 



버스 맨 앞자리에서 읽다가 눈물이 터져버려서 혼났다. 

엄마한테 장난으로 "손가락이 아파서 그만쓴다는 말 너무 웃겨 ㅋㅋ"그랬더니

엄마는 "그거 엄마가 일부러 너 웃으라고 쓴거야! 웃겼지?"하는데 참나!

이렇게 귀여운 생명체가 쉰 다섯이라니!


원래도 그러려고 했지만 앞으로도 서로를 귀여워하면서 우리 모녀답게 오래오래 같이 늙어가야지.

올해는 엄마랑 꼭 제주도를 가야지. 

마흔에도 쉰에도 엄마 앞에서 춤추고 노래해야지.

속으로 다시 한 번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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