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pringnote Feb 06. 2021

작설차



아빠가 계시는 선암사의 작설차는 절 뒤편 차밭에서 600년간 자생하는 5월의 야생찻잎으로 만들어진다. 

아침부터 찻잎을 수확해 새벽 4시까지 전통 제다 방법으로 가마솥 덖음을 거친 후, 여러 번의 초벌과 재벌

그리고 20일의 숙성까지 모두 선암사 스님들의 손을 거쳐 만들어지는 귀한 차라고 한다. 


오랜만에 예전에 아빠가 보내주신 작설차를 꺼내 마셨다.

맨날 뜨거운 물을 급히 부어 마시다가 오늘은 주말이라 여유가 있어 물을 팔팔 끓여 충분히 찻잎을

우려냈는데 한 잎 마시자마자 새벽의 맛이 났다.

아주 가끔 깜깜한 새벽에 일어났을 때 바깥에 나가 처음 들이마시는 차갑고 깨끗한 공기의 맛.

떫떠름하고 쓴맛 없이 고소한 숭늉 맛에 은은한 풀잎 향이 배어있는 이 차는

아마 숭늉을 좋아하는 아빠 입맛에 딱 맞을 것이다. 

먹어보니 맛이 좋아 나와 동생이 생각나셨을 것이고, 

밤새 만든 찻잎을 자랑하고 싶으셨을 아이 같은 얼굴이 저절로 그려진다. 


아빠는 가족 중 나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분인데도, 

몸만 같이 있었을 뿐 진실로 가깝다 할 수 없었던 시간들이었는데

스님이 되신 후부터 자꾸 이렇게 당신의 시간이 담긴 물건들을 보내주신다. 


가을에 직접 수확했다는 은행, 나는 감히 읽을 엄두도 안 나는데 아빠는 다 보고 너무 좋아서 보내셨다는

두꺼운 경전, 공부하다 얻은 깨달음이라며 보내는 명언스러운 카톡 메시지까지.

얼른 작년 가을처럼 아빠랑 같이 절 뒤편을 산책하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이미 모두 잘 살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