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은사님을 오랜만에 만나 뵈었을 때 열세 살의 내가 어떤 아이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선생님은 나는 포기가 빠른 아이였다고 답하셨다.
나는 예상치 못한 답변에 살짝 당황했지만,
선생님은 안 될 일은 빠르게 포기하고 얼른 다른 일을 하는 것도 장점이라고 말씀하셨다.
포기가 빠른 게 뭐가 장점인가 싶었는데 요즘은 선생님 말씀이 백번 맞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열세 살의 나는 장점인지도 모르고 잘만 하던 일이 지금은 가장 어려운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없는 능력.
만날 수 없는 사람.
갈 수 없는 곳.
내가 원하는 때에 할 수 없는 많은 것들.
욕심인 줄 알면서도, 인정하기 어려운 미련들이 가끔씩 이미 갖고 있는 행복들을 갉아먹는다.
안된다는 걸 잘 알아서 더욱 씁쓸 한 날엔 지금 당장 내가 취할 수 있는 작은 행복들로 빈 마음을 채워본다.
오늘 내 마음을 채워준 것들은
비 오는 월요일 연차, 아침 늦잠, 어제보다 많이 가라앉은 뾰루지,
피자스쿨 고구마피자, 프리지아 꽃, 다이소 쇼핑, 초저녁 늦잠.
그래, 오늘은 오랜만에 다이소에서 대형 비닐봉투를
살 만큼 쇼핑을 해서 더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평소엔 온라인 장바구니에만 담아두던 물건들도 망설임 없이 빨간 바구니에 던질 수 있는 유일한 곳.
쓸모없는데 기분 좋아지는 물건들을 고민 없이 담다 보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
별로 산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긴 영수증을 보니 '카드를 긁지 않고도 마음의 부자가 되면 좋으련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도를 닦을 것도 아닌데 다이소에서 3만 원 체크카드를 긁고나서 할 생각은 아닌 것 같아
집으로 오는 길에 화병에 꽂을 프리지아 꽃까지 사들고 양손 무겁게 집으로 왔다.
고구마피자로 배도 두둑히 채웠겠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프리지아 향이 느껴져 내일 출근을 앞두고도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걸 보면
오늘의 소비는 대성공! 내일도 열심히 돈 벌러 가야지, 자본주의 만만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