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애착의 그늘
내 기억의 시작은 4세인지 5세인지부터이다. 시골 논두렁 맞은편에 서 있던 마당이 있는 집, 그 마당의 한중간에서 내 기억은 시작된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그때부터 나를 15년 가까이 키워주신 분은 외할머니셨다. 할머니를 엄마라 부르지 않고 함무니라고 부르긴 했으나, 심적으로는 차이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할머니에 대한 나의 애착은 열 살이 가깝도록 커도 가실 줄 모르던 분리불안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굳이 집 안에서 할머니와 놀지 않더라도 내 목소리가 닿는 범위 안에는 항상 할머니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나에게 필요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로 그 정도가 조금 나아지긴 했으나, 그래 봐야 외출한 할머니를 집에서 기다리는 시간을 약간 더 길게 버틸 수 있는 정도였다.
여기까지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단지 조금 늦게 크는 아이였구나 생각하면 그뿐이다. 문제는 집과 학교를 통학하는 과정에 있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맹학교는 타 지역에 있었다. 특수학교라는 곳 자체가 보통의 초등학교들처럼 아파트 몇 개 지나치면 하나씩 있거나 하듯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중에서도 맹학교만 골라 추리면 그 수는 전국에서도 열 손가락을 아슬아슬하게 넘었다.
그런 이유로 내 모교는 타 지역 학생들이 안정적으로 통학할 수 있도록 기숙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기숙사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여덟 살의 나에게 정해진 확실한 답이었다. 하지만, 이런 답안에 가위표를 치고 파쇄기에 넣어 갈아버린 분이 있었다. 외할아버지였다.
"임자가 데리고 다녀."
초1부터 고3까지 장장 12년, 그 안에서도 언제 끝날지 모를 장거리 통학의 길을 나와 할머니는 나섰다. 처음 기차로 통학하던 우리는 곧 할머니의 다리가 기차역 계단을 견디기 버거워지면서 시외버스로 탈것을 바꾸었다. 그 뒤로 해를 거듭할수록 할머니의 몸에 잔고생이 쌓여갔다.
내가 초3이었을 때 오십견이 할머니의 어깨를 옥죄었다. 조금 나아질 즈음이 되어서는 지병이던 허리 통증이 심해졌다. 장거리를 오가는 일 자체가 녹록지 않은 것인 만큼 할머니의 다리는 편할 날이 없었다. 지병과 고초 외에도 나이를 먹으면 으레 찾아오는 노화의 무게는 덜어질 줄을 몰랐다. 그런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나는 내 나름대로 학교에 가기가 싫었고, 기숙사에 들어가 살기는 더 싫었다.
그러고 무려 6년을 다녔다. 나는 곧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내 심경의 변화는 6학년 졸업식을 막 마치고 찾아왔다. 졸업식 날이라 일찍 집에 가게 되었으므로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 서 있던 내 기분이 삼삼했다.
우리가 타야 할 301번 버스가 정류장으로 다가오던 때에 내 시선이 고정돼 있던 작은 실루엣이 휘청했다. 동시에 할머니의 앓는 소리가 짧게 들렸다. 그것은 어제도 있었던 일이었고, 지난달에도, 작년에도 있었던 일이었다. 그보다 훨씬 전에도 있었는지 몰랐다. 그런데 그날만 달리 보였다.
더 이상 나를 데리고 학교로 올 수 없을 만큼 할머니의 건강이 나빠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내 느낌은 일단 그랬다. 하지만, 더 극명하게 찾아온 예감이 있었다. 이대로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그 안에 언젠가 우리 할머니가 무너질 수 있다고. 집에서 편히 쉬어도 회복이 될까 말까 하는 할머니의 묵은 고초, 이제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가도 그것은 생목숨을 연초같이 태우는 혹사가 될 것이라고.
시내버스에서 내려 터미널을 향해 걸으며 나는 짧게 말했다. 중학교부터는 기숙사에서 다니겠노라고.
"그리 할라나?"
되묻는 것 같지만 이미 이해했노라 답하는 말씀이었다. 그때서야 내가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다만, 너무 늦지는 않았을지, 오직 그것만을 걱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