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패가 창이 된 시대: 학폭 심의제의 역설

사과라는 문장, 그 너머의 진실

by 자신을사랑하기

방패가 창이 된 시대: 학폭 심의제의 역설

학교폭력 예방법은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강력한 방패입니다. 하지만 행정의 최전선에서 마주한 이 방패는 때로 누군가를 공격하는 날카로운 창이 되기도 하고, 거대한 사회적 자원을 낭비하게 만드는 늪이 되기도 합니다. '피해'를 주장하는 한 마디에 담긴 무거운 권리 뒤에서, 도리어 아무 잘못 없이 고통받는 '가해추정 학생'들의 서글픈 민낯을 기록합니다.


01. "무조건 열어주세요" : 시스템이 강제하는 비효율의 늪

현행 시스템의 가장 큰 맹점은 사안의 경중이나 증거의 유무와 상관없이, 피해를 주장하는 학생(피해추정 학생)이 '심의'를 원하면 학교나 교육청은 이를 거부할 권한이 없다는 점입니다.

"누가 나를 째려봤어요", "기분 나쁜 뒷말을 한 것 같아요"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호소만으로도 거대한 행정의 톱니바퀴는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선생님이 중간에서 오해를 풀고 중재하려 해도, 신고 측에서 심의를 고집하면 모든 교육적 노력은 즉시 중단됩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갈등을 해결하고 성장할 기회는 '절차'라는 명분 앞에 무력하게 압수당합니다.


02. 거대 기계의 가동 : 단 한 줄의 신고에 투입되는 세금과 인력

단순히 기분이 상했다는 신고 한 줄을 처리하기 위해 우리 사회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전문 조사관이 학교로 파견되어 여러 페이지의 보고서를 꾸며야 하고, 교육청 담당 장학사와 주무관들은 심의를 준비를 위해 여러 시간을 소비해야 합니다. 수명의 심의위원이 모여 회의를 열고, 속기사를 섭외 해서 심의를 진행해야 되며 그로 인해 행정 비용과 예산, 시간이 소비 됩니다.

문제는 이토록 막대한 인력과 예산이 투입된 결과가 '학교폭력 아님'으로 결론 날 때입니다. 심의 건수가 매년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면서, 역설적으로 '조치 없음'이라는 결과표를 받아 드는 아이들도 비례해서 늘어났습니다. 명확한 근거 없는 신고가 늘어날수록, 정작 정말로 보호받아야 할 심각한 폭력 피해자들이 긴 대기 시간에 지쳐가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03. 책임 없는 권리 : 아무도 손해 보지 않는 '피해자'라는 이름표

이러한 신고 남발이 멈추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신고인(피해추정 학생)'에게는 그 어떤 리스크도 없기 때문입니다. 심의 결과가 '학폭 아님'으로 나와도, 피해를 주장했던 학생이나 학부모는 아무런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정당한 권리 행사라는 이름 아래, 타인의 일상을 뒤흔들고 막대한 행정력을 낭비하게 했음에도 그들에게 돌아가는 책임의 화살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반면, 억울하게 **'가해추정 학생'**으로 지목된 아이는 결과가 나오기까지 수개월 동안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냅니다. 조사관 앞에 불려가 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취조를 당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낙인찍힌 채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억울함이 밝혀진 뒤에도 이 아이가 입은 마음의 상처를 보상받을 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04. "무고죄로 고소할 수 없나요?" : 법적 갈증과 행정적 한계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에서 '학폭 아님' 결과를 우편물 통보받은 뒤, 그제야 억울함을 토로하는 가해추정 학생의 부모님들이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은 이겁니다. "상대방이 우리 애를 근거 없이 신고해서 인생을 망쳐놨는데, 무고죄로 신고할 수 없나요? 저쪽은 왜 아무런 벌을 안 받나요?"

하지만 업무담당자로서 제가 드릴 수 있는 대답은 늘 차갑기만 합니다. 형법상 '무고죄'가 성립하려면 상대방이 고의로 허위 사실을 꾸며냈음을 명백히 입증해야 하는데, 학폭 신고는 '피해자의 주관적 인식'을 바탕으로 하기에 이를 법적으로 단죄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정당한 방패가 누군가에게는 합법적인 괴롭힘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이 역설. 그리고 결과가 '무죄'여도 그 과정에서 가해추정 학생이 흘린 눈물은 누구도 닦아주지 않는다는 현실. 이 비대칭적인 책임의 구조를 해결하지 않는 한, 학교는 배움의 전당이 아닌 서로의 약점을 잡기 위해 법전을 뒤지는 차가운 법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질문]

나의 '기분'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의 '인생'과 사회적 '자원'을 낭비한 적은 없나요?

'피해자'라는 이름표가 타인을 공격해도 괜찮다는 면죄부가 되고 있지는 않나요?

우리는 아이들에게 권리만큼이나 무거운 '책임'의 가치를 가르치고 있나요?

본 도서는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성찰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전문적인 법률적 조언이나 심리 치료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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