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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푸딩 Sep 27. 2015

매운 갈비찜, 매운맛 2.5단계

연인, 그들이 서로를 맞춰가는 과정


 잘 익어 갈빗대에서 똑 떨어지는 살코기가 먹고 싶기도 했다. 양념을 잔뜩 머금은 채 유유히 헤엄치는 당면의 보드라운 살결을 느끼고 싶기도 했다. 김을 부스러뜨려 양념이 눌어붙은 양은냄비에 밥을 볶아먹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이곳을 찾은 근본적인 목적은 따로 있다. 혀를 얼얼하게 해줄 매운 맛, 바로 그것을 위해 온 것이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보통 단 음식이나 매운 음식이 당기곤 하는데, 오늘은 먼저 매운 맛을 보아야 하는 날이다. 먹고 나서 위가 따땃해지는 느낌을 받은 후 달콤하고 부담 없는 디저트로 혀를 달래는 절차를 밟고 싶다. 그래야 기분이 나아질 것 같다. 매운 것을 먹고 난 다음 날 아침에 화장실에서 화끈한 맛을 보게 되더라도. 오늘은 그럴 자격이 있는 날이다.


자고로 매운 갈비찜은 울퉁불퉁, 낡은 양푼에 보글보글 끓이는 맛으로 먹는다.


 그러나 나의 앞에 앉아 있는 너는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다. 내가 “매운 것을 먹고 싶어!”라고 하면 군말 없이 같이 매운 음식을 하는 식당에 가주는 너. 하지만 그렇게 선뜻 매운 맛을 보러 온다 해서 네가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 매운  맛보러 가자.”하고 웃는 네 표정에서 긴장감이 언뜻 보이는 듯하다.


 고백하건대, 나도 그렇게 매운 것을 잘 먹는 편은 아니다. 매운 음식을 입에 넣으면 화장으로 감춘 홍조 띤 피부가 드러나고, 콧물이 인중을 따라 흐를락 말락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맛을 즐긴다. 벌건 얼굴이야 매운 기가 가시면 다시 하얘질 것이고, 질질 흐르는 콧물이야 냅킨으로 훔치면 되는 것이다. 진통제에 내성이 생기는 것처럼 먹다 보니 좀 더 매운 맛을 찾게 되고, 매운 맛을 느끼고 하루 이틀 고생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 맛이 종종 생각나곤 한다.


 메뉴판에는 매운 맛을 단계별로 조절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나는 앞에 앉은 너의 눈치를 슬며시 본다. 너는 나를 보며 ‘모든 것을 맡긴다, 그러나 좀 봐 달라’는 표정으로 미소를 머금고 앉아 있다. 오늘은 상사에게 별 것도 아닌 일로 된통 깨지고 와 5단계의 매운 갈비찜을 먹고 싶은데... 먹어보지 못한 단계의 맛이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다. 하지만 5단계의 매운 갈비찜을 시키면 너는 입에도 대지 못하겠지.


 매운 갈비찜을 처음 먹으러 왔을 때, 너는 온몸으로 울며, 모공이 흘린 눈물의 100배 만큼 물을 들이켰다. 나는 그 모습이 안쓰러워 미안한 웃음을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앞으로 매운 음식을 먹지 못하겠구나 하고 걱정했다. 사귀는 사람이, 나와 취향이 같았으면 하는 억지스러운 기대와 바람을 가진 것이다. 그 후 나는 식사메뉴를 선택할 때마다 그러한 걱정을 드러냈다, “넌 매운 거 못 먹잖아.”


 그러나 나의 투정에도 너는 나를 잘 따라주었다. 비록 매운 음식을 먹으면서 땀범벅이 될지라도, 다음 날 배앓이를 해서 화장실을  들락날락할지라도 말이다. 매운 갈비찜을 입에 넣고 땀 흘리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면 그 모습이 못 생겼다고 생각하면서도 미워할 수는 없는 것을 보니, 못 먹는 매운 음식을 날 위해 먹어주는 네 마음이, 내 마음과 같은 마음일까 싶다. 예전에 소개팅을 했을 때 매운 음식을 못 먹는 남자가 날 위해 매운 음식을 시켜놓고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 혀를 찬 적이 있는데, 확실히  그때와 느낌이 다르다.


고기를 다 먹고 나면 김을 부스러뜨려 양념이 눌어붙은 양푼에 밥을 볶아먹어야 제 맛.


 “저 주문할게요.” 일하는 직원을 호출하고 나는 메뉴판을 보며 읊는다. “돼지갈비찜 2인분 주시구요, 당면 사리 추가해주세요. 그리고 매운 맛은 2단계랑 3단계 사이로 해주세요. 2단계보다는 살짝 맵게요. 되죠?” 네가 먹을 수 있는 매운 맛 1단계와 내가 오늘 먹고 싶었던 매운 맛 5단계의 중간 값은 매운 맛 3단계인데, 초롱초롱한 강아지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너 때문에 오늘은 내가 조금 양보하기로 한다.


 함께한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다른 환경에서 다른 사람들과 살아왔다. 그래서 너와 내가 같은 맛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많이 맵지는 않은 맛을 선택한 나를 보는 네 얼굴에 안도감이 어린다. 앞으로 너와 내가 얼마나 긴 시간을  함께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 긴 시간 동안 닥치지 않아 셀 수 없는, 이러한 다름의 발견을 하는 순간이 얼마나 많을지 또한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때마다 너는 나를 배려하고, 나는 네게 양보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면 그 위화감의 순간은 그렇게 크게 와 닿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매운 갈비찜을 먹으러 올 때 매운 맛을 먹지 못해 아쉬워하거나, 매운 맛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될 것이다. 혀가 아플 정도로 매운 맛을 먹고 싶은 날이었는데, 양념을 좀 덜 맵게 해서 먹으면 갈비찜의 감칠맛을 보다 생생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맛나게 식사를 즐기는 네 얼굴도 말이다. 


 으어흐. 본문에도 나오듯 다음날 부스터를 쓰게 만드는 매운 음식은 제가 싫어하는 종류에 가깝습니다. 만은, 사이 값 0.5단계 이상의 사랑이 느껴지네요. 글로 쓰니  사랑이라는 말이 참 쉬워 보입니다만, 입 밖으로 꺼내기에는 소설 해리포터 속 ‘그 사람의 이름’을 꺼내는 만큼이나 어려운 것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감정을 새롭게 느낄 수 있는 특정 음식이라는 것이 참으로 고맙고 좋다고 느낍니다. 생각해보면 저 역시 전(前) 여자친구들이 항상 매운 걸 좋아했습니다. 매운 음식 얘기만 들어도 콧등이 발랑거리는 저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죠. 거부하기 미안해 따라갈 적에, 과연 제 (前, 또는 舊) 여자친구들은 이런 눈으로, 이런 생각으로 저를 바라봐주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래요, 오늘은 술이나 거나하게 붓고 문자 해볼까요? ‘자니?’
- 리연 -

 자신과는 다른 데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 그 즐거움이 나에게는 고통으로 다가올 수 있음에도 그 고통보다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이 우선인 상대가 떠올라, 소재인 매운맛의 혀끝 찡찡한 저림보다 따뜻함이 떠오르는 내용입니다. 언제인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어떤 것을 접한 기억이라는 것은 결국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에 더한 가치를 발할 수 있는 것이라는... ’ 아마도 푸딩님과 함께 고통을 참아가며 매움을 이겨냈던 상대분과는 아주 오랜 뒤에도 이 장면을 떠올리며 같이 즐거워하실 수 있겠지요. ‘자극적’이란 것이 미각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도 똑같아, 이 자극스러웠던 기억이란 시간이 지난 후에도 우선순위의 상위에 머물 겁니다. 계속해서 즐거운 자극을 만드셔서 훗날  되새김질해 꺼내먹을 기억의 양식을 많이 쌓아 놓으시면 좋을 겁니다.
- youto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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