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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푸딩 Sep 29. 2015

스무살, 사탕 #2


 “아, 내일이 화이트데이잖아. 여자친구한테 직접 포장해서 주려고 사탕을 좀 샀어.”


 그렇다. 그에게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것도 500일이 다 되어가는. 스무 살인 나에게 500일을 사귀었다는 그 관계는 도저히 깰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견고한 것이었다. 그에게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것은 그를 처음 만난 날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생활에 치여서 그랬던 것인지 대부분의 새내기가 솔로였으나, 그는 재수생활을 핑크빛으로 보내고 나와 같은 학교에 입학했다. 첫 눈에 그에게 호감을 느꼈던 나는 하루도 채 되지 않아서 좌절했다.


 그만큼 사귀었으면 서로 모르는 게 없겠지? 그들은 곧 나이를 먹고 자리를 잡은 후 축복 속에 결혼을 하지 않을까?  멋모르는 내가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높은 벽을 다시 한 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절망한 얼굴에 어릴 감정을 숨기려고 입을 내밀고 툴툴댔다.


 “아~ 좋겠다. 저는요, 사탕 줄 사람이 없어서 내일 도서관에 가서 밖으로 나오지 않을 생각이었어요.”


 푸념 섞인 투정에 그는 여느 때와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여동생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그는 종종 나를 그렇게 바라봤다. 어떤 모습이든 그의 모습은 멋있고 자상했지만 이 표정만큼은 나를 슬프게 했다. 나는 그의 새카만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고 앞을 바라봤다. 버스 안에는 듬성듬성 승객들이 앉아 있었다. 모두 혼자 온 것 같았다. 그와 나만, 둘이었다.


 “너도 남자친구 만들면 되잖아.”


 철든 목소리로 그가 나를 타일렀다. 그의 목소리가 낮고 부드러웠다. 어쩐지 버스가 조용해서 버스 안에서 사람들이 다 듣는 것을 아닐지 순간 두려움이 들었다.


 “그게 말이 쉽죠! 남자친구가 무슨 찰흙인형인가요? 조물조물하면 짠하고 만들어지게.”


 나의 익살스러운 반박에 그는 나직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잠시 가만히 있더니, 비닐봉투에 손을 넣어 부스럭대면서 뭔가를 꺼냈다. 그의 손에 사탕 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는 사탕 봉지를 뜯어 사탕을 몇 개 꺼내 나에게 건넸다.


 “자, 다는 못 주고, 받아둬. 그리고 내일은 이것보다 더 많이 받아.”


 바스락거리는 비닐로 싸인 색색깔의 사탕 몇 개가 내 손바닥 위에 올려졌다. 나는 그걸 가만히 바라보다가 씩 웃으며 호주머니에 넣었다. 순간 내 마음속에 어떠한 감정이 느껴졌는데, 그게 무슨 감정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당혹스러움에 나는 그냥 웃었다.


 “와, 잘 먹을게요! 나도 사탕 받았다, 헤헤.”


 발랄한 목소리로 고마움을 표시하자, 그가 다시 싱긋 웃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는 내가 어떤 마음인지 모르는  듯했다. 그의 미소가 이렇게 따끔한 것이었나 생각하며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버스가 덜컹 거리며 집으로 가는 노선을 밟아 가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감정은 사라지고 나는 어떤 강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버스 안에 더 있고 싶었다. 그와 함께 더 오랜 시간을 앉아 있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다 할 구실이 없었다.


 버스가 조금만 늦게 가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런저런 이야기-대부분 그의 여자친구에 대한-를 나누었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으나, 여자친구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가 흥미롭고 즐거워서 마음이 더 아팠다.


 어느새 내려야 할 정류장에 도착했다. 인사를 하고, 옅은 아쉬움을 느끼면서 버스에서 내렸다. 나는 내려서 그를 흘깃 쳐다보았지만 그는 앞만 바라봤다. 횡단보도 끝자락에 서 있는 신호등이 초록색을 띠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먹다 남은 음식을 받은 것 같았다. 그 사탕은 날 위한 게 아니라 그의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동시에 여자친구에게 줄 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나눠 가진 기분이 함께 들었다. 좋아해야 하는 건가? 다만 사탕에 그의 작은 호감이 묻어있다고 믿고 싶었다. 사탕을 주머니에서 다시 꺼내어 손바닥에 놓고 눈으로 세었다. 하나, 둘, 세엣... 열 개. 아홉 개도 아니고 열 개라니. 완전한 개수의 사탕을 받았으니 기뻐해야 할 일 아닌가? 사탕에 담긴 호감의 종류는 애써 구분 짓지 않기로 했다.


 머릿속에 퍼지는 것이 무슨 감정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 횡단보도를 건넜다. 버스는 특유의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정류장을 떠나고 있었다. 그때부터 시작되었나 보다, 나의 일방통행은.


... 사탕을 주었다는 사실도, 사람도 잊고 있었다. 그 작은 기억은 오랜 시간을 방의 주인도 모르게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여자친구와 헤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내가 그와 특별한 관계가 되어 캠퍼스를 누비는 나의 상상은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들이 보면 버려야 할 쓰레기일 뿐인 사탕껍질을 보니 픽하고 웃음이 났다. 그 오빠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문득 궁금해졌지만, 시간은 너무도 오래 지나 사탕껍질만 남은 채 알맹이는 없었다. 대청소 중임을 다시금 인지한 나는 그 사탕껍질을 조심스럽게 휴지통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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