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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푸딩 Sep 26. 2015

스무 살, 사탕 #1

 아주 오랜만이었다. 게으르지만 마음만 먹으면 가구의 배치까지 바꾸며 청소를 하는 성격 탓에, 날 잡아 대청소를 했다. 책장을 정리하고 책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작은 소품들을 담기 위해 올려둔 고동색 항아리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연락이 끊긴 친구가 수능을 잘 보라고 그 조그만 항아리에 엿을 가득 담아 준 것이었다. 책상을 정리하는 김에 그 안의 것들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항아리를 잘 열어보지 않아서 위에 소복이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뚜껑을 열었다. 항아리의 안에는 머리끈이나 핀, 단추 같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나는 바닥에 그것들을 모두 쏟았다.


  “어? 이거...”


 깊지 않은 항아리의 바닥에, 곱게 펴진 채 차곡차곡 쌓여 있던 사탕 껍질 몇 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투명한 비닐에 촘촘히 박힌 땡땡이 무늬. 껍질마다 핑크색 땡땡이도 있고, 노란 색 땡땡이도 있었다. 사탕을 넣고 양 끝을 비틀어 포장하는 식이어서 사탕껍질은 거의 정사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세어보니, 정확히 열 장이었다. 숫자 10을 생각하자, 고동색 항아리에 처음 이 사탕 껍질을 넣었을 때가 뇌리를 스쳤다. 그때도 사탕 껍질이 딱 열 장이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이 기억났다. 자연히 그 뒤에는 이 사탕껍질의 출처가 떠올랐다.


 입학이라는 설렘 때문에 학교에 있는 것이 좋았다. 스무 살이었던 나는 친구들과 대학생 놀이에 심취해 있었다.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부할 것이 그리 많지 않았음에도, 학교에서 가장 멋진 건물인 도서관의 창가에 앉아 죽치고 있다가 저녁 즈음에 집으로 가곤 했다. 하는 것이 없음에도 지식인이 되는 것 같은 느낌에 줄곧 도서관을 찾았다.


 그날도 그랬다. 도서관에서 바라볼 때 가장 멋진 뷰를 만끽할 수 있는 자리를 선점한 후 책 한 권을 펴고 거기에 앉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주로 내가 도서관 책상에  앉아했던 상상은 대학생의 로망에 관한 것이었다. 가령 푸른 잔디 위에 돗자리를 깔고 남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휴식을 취한 다든가, 그러다가 멋진 남자에게 전화번호를 주게 된다든가,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런 사건들이 벌어지기 위해서는 충족되어야 하는 몇 가지가 있는데 당시의 나는 그것이 충족됐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흐뭇한 상상을 펼치고 있다 보니 금세 저녁이 되었다. 사용하지도 않은 필기구와 책을 가방에 넣은 후 도서관을 나섰다. 집에 가기 위해 후문 가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데 아직 3월이라서 날씨도 쌀쌀하고 해가 일찍 져 어둑어둑했다. 정류장에는 많지 않은 사람들이 줄 비슷한 대열을 만들어 듬성듬성 서 있었다. 조금 기다리다 보니 버스가 도착했고, 버스를 타려고 다가서는 내 앞에 앞서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단단한 어깨는 백팩을 매고 있었고, 한손에는 비닐 봉투가 쥐어져 있었다.


 익숙한 비닐봉투였다. 학교 정문 쪽에 있는 대형 마트에  다녀온 모양이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가슴이 뛰었다. 그에게 어울리는 짐은 비닐 봉투가 아니라 두꺼운 전공 서적인데. 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낯설기도 하고 괜히 내가 쑥스러웠다.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며 그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콕 찔렀다.


 “어? 오빠! 집에 가시는 거예요?”


 반가운 목소리로  알은체하는 나를 뒤돌아 본 그의 얼굴이 놀란 표정에서 경계심 없는 웃음으로 바뀌었다. 그의 하얀 얼굴에는 미소가 잘 어울렸다. 그 생각을 하자 내 얼굴 근육이 약간 땅기는 느낌이 들었다.


 “응, 마트에 들렀다가 집에 가는 길이야.”


  버스가 정류장에 멈추고 그와 나는 버스의 앞문으로 나아갔다. 그러다가 곁눈질로 그를 슬쩍 보았다. 그는 키가 컸다. 나도 여자 치고 작은 키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어깨는 내 코쯤에 와 있었다. 적절한 키 차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버스에 탑승 후 자연스레 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나는 부끄러움과 어색함을 어설프게 숨겼지만, 그는 뭘 하든 자연스러웠다. 나는 그의 옆모습을 흘끔 바라보았다. 흰 피부에 어울리는 검은 뿔테 안경이 그의 높은 콧대에 얹어져 있었다. 그는 뭘 착용하든 멋있었다.


 입학 이후 그와 나란히 앉을 기회는 적지 않았다. OT에서 같은 조원이었던 그와 나는 1학년 1학기 시간표를 함께 짰고, 그래서 거의 매일 같은 수업을 들었다. 적응이 될 만도 하건만, 그의 옆자리에 앉을 때마다 횡격막에 설렘이 얹혀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 시선이 문득 아래로 향하고, 나는 아까부터 궁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을 참지 못해 입을 열었다. 어색한 손가락 끝이 그가 손에 쥐고 있는 비닐봉투로 향했다.


 “뭘 사신 거예요?”


  나의 질문이 끝나자, 그의 얼굴에 슬쩍 머쓱해하는 표정이 지나갔다. 그리고는 또 아주 미세하게 은은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민망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의 그런 표정 또한 그의 얼굴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그런 생각이 말로 튀어나올 뻔한 것을 인지하며 정신이 번쩍 뜨였다. 그는 얼굴에 잘생긴 미소를 머금은 채 시선을 아래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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