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짧은 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렌지푸딩 Aug 30. 2015

그 날의 봄 #4

 대답도 시원스레 안 했으면서 깔끔하게 집으로 가면 될 것을. 그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시간을 끌었다. 혜영은 그가 남긴 ‘여지’에 당황했다. 


“응? 아니, 그냥 집에 가. 앞으로 두 시간이면 새벽 3시라고. 엄마가 나 찾는단 말이야. 통금시간도 훌쩍 넘......” 


 혜영은 본능적으로 살짝 위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자신이 급하게 집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아무렇게나 쏟아내고 있는데, 그런 혜영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사귈래?”


 뜬금없는 그의 폭탄 같은 말에 혜영은 입을 다물었다. 여태 혜영을 궁금하게 했던 그의 심리가 발설되자, 혜영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호기심에 콕콕 찔러보았는데, 정말 터져버린 것이다. 주로 저런 제안에 대한 답변은 긍정 또는 부정으로 해줘야 하지만 혜영은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었다. 사고는 마비되었고, 그는 어려운 결정권을 혜영에게 부여했다. 뭐라 할 말이 없어, 혜영은 털털하게 웃었다.


“푸하하하. 지금 뭐라는 거야.”


 하지만 그는 진지했고, 그가 만든 분위기에 혜영은 웃음을 거두었다. 그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혜영을 바라보았다. 혜영도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떡하지. 머릿속에는 ‘어떡하지’ 네 글자가 수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뇌 속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어떡하지’의 수가 너무 많아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혜영은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재인식하려고 애썼다. 한 때는 원수 같이 싸우고, 평소에도 그다지 다정하게 서로를 대하지 않던 사이. 한 명의 남자 사람 친구가 서 있었다. 그런데 그는 왜 혜영에게 내민 손을 미세하게 떨고 있을까. 그 작은 떨림은 혜영에게 전해져 그녀의 마음을 떨게 했다.


“너, 뒤에 있을 일은 생각하고 말하는 거야?”


 웃음기를 거두고 묻는 혜영에게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생각 안 해 본 건 아닌데, 그래도 어쩔 도리가 없더라고.”


 그의 대답에 혜영은 더 혼란스러웠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잠깐 흔들리고 마는 감정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했는데, 그는 진심이었다. 


“내가 싫다고 하면?”

“이 꽃, 바닥에 내팽개치고 집으로 가는 거지 뭐.”


 혜영에게 따주면서 자신도 하나 들고 있던 꽃가지를 가리키며 그가 대답했다. 간절함이 느껴지는 그의 협박에 혜영은 웃음이 나왔지만 선뜻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잘 모르겠어.”

“싫어?”

“싫은 건 아닌데......”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는데 상대방의 확답이 나오지 않자 답답한 마음이 든 것인지, 그는 혜영의 손을 낚아챘다.


“깊게 생각하지 말자. 마음 가는 대로 따라.”


 그는 혜영의 손을 잡아채 걸어오던 길의 반대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혜영은 그의 행동에 놀란 마음이 들면서도 애써 그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그의 손이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손의 힘이 느껴졌다.


 그들은 서로에게 일어난 이 낯선 상황을 정리하고 마음을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벚꽃이 흐드러진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서로의 손을 잡고서 혜영의 집을 지나치고, 버스 정류장에 마련된 벤치에 앉았다. 시간이 늦은 만큼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리에 앉자 혜영은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되는  듯했다. 그의 제안에 무언의 긍정을 했는데, 자신의 대답에 자신은 없었다. 


“야, 어떡해?”

“뭘?”


 그는 혜영의 뜬금없는 물음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표정을 보는 혜영의 얼굴은 거의 울상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받아본 고백이거니와, 고백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다시금 떠올리니 기함할 노릇이었다. 그녀와 그를 잘 아는 사람들 또한 놀랄 것이었다. 자신의 대답에도 혜영은 적잖이 놀랐다. 칼같이 거절할 줄 알았건만.


“사람들이 알면 두고두고 술자리의 안주거리가 되겠지?”

“굳이 사람들에게 얘기 안 하면 되지. 네가 원할 때 얘기해.”


 그는 들고 있던 벚꽃가지를 잠시 내려두고 혜영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혜영의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어 자연히 나온 행동인 것 같았다. 그의 손길에 혜영이 조금 움츠러들자, 그는 얼굴에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었다. 


“무슨 여자애 머릿결이 이리도 뻣뻣해?”

“뭐?”


 혜영은 발끈해서 고개를 들어 그에게 도끼눈을 떴고, 평소 혜영의 모습이 보이자, 그는 안심했는지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혜영의 머리카락에 손을 다시 올려둔 뒤 다독이듯이 쓰다듬었다.


“잘해줄게.”


 혜영은 그의 한 마디에 부드럽게 노려보았지만 왜인지 웃음이 나서 어색하게 웃었다. 그에게서 이런 어조의 말이 나오다니, 낯선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다.


“갈까?”


 혜영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혜영의 손을 다시 잡았다. 고개를 돌리더니 혀를 차며 혜영의 손을 내려다보는 그.


“넌... 어떻게 손도 거칠어.”


 끝나지 않은 장난스러운 말에 혜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면서도 긴장감이나 어색함 같은 감정들이 봄바람에 날아감을 느꼈다. 보통 사랑의 시작에 황홀함을 느끼는 젊은 청춘들은 서로에게 일어난 일들에 열뜬 마음을 달래려는 달콤한 시간을 함께 보내려 하지만 혜영과 그는 현실적이었다. 엄마의 걱정스러운 문자에 신경을 쓰는 혜영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고, 그는 차가 끊겨 집까지 걸어갔다. 


“조심히 가.”

“알겠어. 집에 들어가서 연락하고.”


 담담한 인사 속에 그녀는 간지러움을 느꼈다. 뒤돌아 집으로 향하는 걸음에서 문득 혜영은 자신을 얻은 그가 기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하늘을 향해 점프를 하지 않을까 상상했다. 그 순간을 존중해주기 위해 혜영은 애써 그의 뒷모습을 돌아보지는 않기로 한다.


 아침이 되어, 혜영은 늦은 봄밤에 일어난 일을 없던 것으로 하면 어떻게 될지 잠시 생각했다. 사람들의 시선과, 7년 동안 그를 이성으로 보지 않았던 시간이 부담스럽고 민망한 마음으로 개운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그가 혜영에게 있어 연인이라기보다는 친구라는 생각이 더  강하기도했다. 하지만 정확한 근거가 없이 그와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생각보다 잘 지내고, 혹시, 어쩌면 잘 살 수도 있지 않을까? 부정한다 해서 그것이 계속 아닌 것은 아니며, 확실하다해서 그것이 계속 확실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래서 혜영은 일단 그와의 봄을 지켜보기로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 날의 봄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