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짧은 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렌지푸딩 Aug 29. 2015

그 날의 봄 #3


 혜영의 입에서 나온 말이 혜영과 그의 귀를 스쳐지나 갔고, 혜영은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을 인식하고 아차 싶었다.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을 봐오며 단언컨대, 그가 분명 좋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 그저 친구일 뿐인 자신과 뭘 하고 싶은 거냐며 낯선 표정을 지어 혜영을 민망하게 하거나, 그녀를 봄날에 술 먹고 정신을 살짝 놓은 여자 사람으로 볼 지도 몰랐다. 아니면 살아 있는 꽃을 따달라는 혜영을 지구를 파괴하려는 사람처럼 몰아가며 비난의 화살을 돌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을 수습하기 위해 혜영은 ‘힉’하고 추임새가 나오려는 입을 간신히 틀어막고 몸을 살짝 움츠렸다. 달도 아니고 별도 아닌, 꽃을 따달라는 자신의 황당한 말이 그의 귀에는 과연 어떻게 들렸을까?


 슬며시 눈치를 보려고 눈동자를 그에게 돌렸는데, 그는 비난의 화살이 아닌 자신의 듬직한 몸을 벚나무 쪽으로 날렸다. 그의 큰 몸집과 기다란 손이 벚나무 가지로 뻗었다. 혜영은 예상을 벗어난 그의 행동에 살짝 놀라운 마음이 들면서도, 그의 모습이 꽤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코 작지 않은 덩치를 가진 그의 뒷모습을 보며 꽤 귀엽다고도 생각했다. 웃음이 배실배실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그가 꽃가지를 주기를 기다렸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혜영에게 벚꽃이 듬성듬성 매달린 그것을 내밀었다. 고맙다고 해야  할지, ‘남자친구도 아니면서 이걸 왜 줘?’ 하고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야 할지 잠깐 고민한 혜영은 고맙다고 하지도, 뾰족한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어쩐지 멋쩍은 마음이 들어 그를 보지 않은 채 꽃을 바라보며 기쁨의 감탄사를 표현했다.


 눈으로 감상만 하는 꽃도 아름다웠지만, 곁에 두고 소유할 수 있는 꽃은 얼마나 더 아름다운가. 혜영은 그것이 욕심임을 알았지만, 손에 쥐어진 꽃을 놓지는 않았다. 손가락으로 가지를 빙글빙글 돌리며 그와 함께 걸었다. 그는 꽃을 따게 한 혜영에게 어떠한 비난의 말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자화자찬도 하지 않았다. 꽃을 따주고, 그것을 받아 든 행위에 대한 원인을 잠시 생각한 것인지, 혜영과 그는 잠시 침묵했다.


 혜영의 집에 도착해 갈 때까지 둘은 싱거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혜영은 아까부터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그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다른 이야기로 뱅뱅 돌리기만 했다. 그들의 발걸음이 집에 다다르고, 혜영은 집에 들어가야만 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혜영은 그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시계를 봤다. 아직 12시가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한 바퀴만 더 돌자. 꽃이 너무 예쁘네. 나 좀 더 구경하고 싶어. 좀 더 있다 가도 되지?”


 그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이미 혜영의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혜영은 답을 알고 싶었다. 아까 그를 만나기 전보다 더, 그 의문은 커졌기 때문이다. 성미가 급하고, 애매한 것을 싫어하는 혜영은 오늘 밤 안으로 결론을 내고 싶었다. 밤 벚꽃이 흐드러진 길을 걸으면서 혜영은 한 가지의 기억을 떠올렸다. 세미나가 있다던가, 태국으로 떠났던 그가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너무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고, 그것을 혼자 보고 있으려니 아쉽기 그지없었다고. 혜영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장난스럽게 이야기를 받아 쳤다.


‘연애를 해. 여자 친구랑 가면 되잖아. 소개팅 시켜줄까?’

‘나중에. 지금 직면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거든.’


 외국까지 가서 한가한 소리를 하면서 연애보다, 소개팅보다 중요한 문제란 뭐였을까? 혜영의 직감은 이유를 모른 채 자꾸 지금 자신의 손에 들린 꽃가지와 연결을 시키려 했다.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상했다. 그래서 혜영은 알아야 했다. 자신의 착각을 바로 잡고 싶었다. 자신이 아까부터 이상한 상상을 하고, 돌발행동을 하는 것은 달밤에 흠뻑 젖어 든 벚꽃 때문일 것이다. 그 또한 그럴 것이다.


 그들은 한 시간여를 더 걸었다. 혜영은 목구멍을 비집고 나오려는 그 물음을 애써 삼키며 느릿느릿 걸었다. 그는 왜 집에 가려고 하지 않는지 궁금해질 법했으나 혜영은 그런 생각을 할 정신이 없었다. 혜영은 휴대폰을 다시 봤다. 12시가 넘은 시각, 혜영의 엄마에게선 걱정의 문자가 와 있었다. 더 미룰 수 없었다.


“너 근데, 요즘 왜 그래?”

“뭐가?”


 담백하고 쿨한 혜영의 물음에 그 또한 군더더기 없이 되물었다.


“아니, 요즘 뭐…… 고민거리라도 있냐고.”

“없어.”

“진짜? 정말 없어? 아닌 것 같은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부정하는 그에게 시원한 해답을 받지 못하자, 혜영은 약이 올랐다. 그러나 더 추궁할 수는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서 그녀를 이리도 헷갈리게 하는 것이냐고 충분히 물고 늘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혜영은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다고 직감했다. 차가 끊긴 시각, 혜영은 그가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 어렵지 않도록 큰 길 쪽으로 그를 이끌었다.


“고민 있다고 하면 들어주려고 했는데, 없다고 하니 집에나 가.”

“...... 앞으로 나랑 두 시간만 더 있으면 얘기해줄게.”

매거진의 이전글 그 날의 봄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