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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푸딩 Aug 28. 2015

그 날의 봄 #2


 그들이 도착한 곳은 후문 가의 어느 술집이었다. 작년 연말에 이곳에서 동기모임을 한 적이 있어 혜영도 기억하고 있는 곳이었다. 셀프 바가 있어서  부여받은 프라이팬으로 간단한 음식을 해먹을 수 있는데,  그때 혜영이 호기롭게 김치부침개를 하겠다고 나섰다가 ‘반죽이 덜 익은 김치 빵’을 만들어 남자 동기들의 비웃음을 샀다. 당시의 기억에 혜영은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는 것 같았지만 그의 앞에서 티 내지 않으려 했다. 슬쩍 그를 보자 그는 메뉴 선정에 고심하고 있었다.


 “여기서 연말에 기모임 했던가?”


 정확하게 기억하면서도 혜영은 괜히 그에게 말을 걸어 확인을 받았다. 그는 혜영을 바라보지 않고 메뉴판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랬지, 너 요리한다고 나섰다가 완전 폭삭 망했잖아.”

 “...... 그런 건 좀 잊어버려도 돼.”


 어렵지 않게 안주를 선택하고 소주와 맥주를 한 병씩 시킨 둘은 덤덤하게 대화를 시작했다. 평소의 분위기와 다르지 않은  듯했지만 사뭇 달랐다. 비난과 조롱이 없는 평화로운 대화였다. 어색함도, 머뭇거림도 없었다. 공통분모가 되는 주변인들의 이야기와,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이 흘렀다. 안주는 그럭저럭 괜찮았고, 술도 거부감 없이 잘 넘어갔다. 혜영은 자연스럽게 대화의 흐름을 타는 자신을 보며 이성과 이렇게 단둘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한 자리에 있어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금방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보니 가까운 과거에는 없었나 보다. 설렘은 없었으나, 편해서 나쁘지 않은 자리인 것 같다고 혜영은 생각했다.


 그는 술을 즐겼다. 그래서인지 가게 주인은 그를 알아봤고, 우리가 시킨 메뉴 외에 다른 메뉴를 서비스로 조금 제공해줬다. 가게 주인과 그가 잠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혜영은 여태껏 그의 사회성이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편견을 버리게 되었다. 혜영은 가만히 앉아 그와 가게 주인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 주인이 그와 자신을 어떤 사이라고 생각할까? 혜영은 괜히 머쓱해져서 안주를 젓가락으로 뒤적였다. 


 알쏭달쏭한 평화의 시간이 흐르고 기분 좋게 취한 그와 혜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기에, 혜영은 집으로 가야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집에 데려다 줄게.”

 “...... 그래.”


  그 전까지 어느 남자가 집으로 데려다 준다 해도 일단은 거절부터 한 혜영이었다.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자신이 약하다 생각지 않았고,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매너를 베풀고 티를 내기를 원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이 공치사하는 꼴은 죽어도 못 본다는 심보였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는지 혜영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할 이야기가 더 남은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날씨가 좋아서 혜영은 그에게 집까지 걸어가자고 했다. 그도 수긍했다.


 집으로 향하는 그들을 둘러싼 공기는 선선하고 향기로웠다. 올해는 유독 벚꽃이 일찍 피었다. 길가에 서 있는 벚나무마다 벚꽃이 알록달록 묻어, 봄이 어려 있었다. 혜영과 그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며 도로를 걸어갔다. 혜영은 봄의 시작을 알리는 공기와 풍경에 잠시 마음이 설렜으나, 옆에 있는 사람이 7년 동안 많이도 다퉈온 친구라는 것을 알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혹여 자신이 분위기에 휩쓸려 다른 마음을 먹는다고 해도, 그것으로 그들의 관계가 변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혜영이 그런 이상하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그저 그녀의 옆에 서서 걸음을 맞춰 걸었다.


 혜영이 살고 있는 곳은 아파트 단지가 밀집된 구역이었다. 아파트 단지들이 모여 있는 곳의 경계에 들어서자, 혜영과 그의 눈을 벚꽃으로 가득 채웠다.


 “우와.”


 혜영은 짧지만 들뜬 감탄사를 내뱉었다. 혜영이 살고 있는 아파트로 가려면 약간의 경사가 있는 오르막길에 들어서야 했다. 그 길에는 넓지 않은 2차선 도로가 있었고 양쪽으로 도보가 있었다. 도보를 따라 벚나무가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었는데, 벚나무에는 벚꽃이 포도송이가 달린 듯 주렁주렁 맺혀 있었다. 맑은 오후의 하늘을 배경으로 한 벚꽃은 산뜻하고 보이는 그대로 예뻐 보이지만 짙은 남색을 띈 밤하늘을 배경으로, 가로등 빛에 비치는 벚꽃은 아련하고 비밀스러운 아름다움을 가졌다. 눈을 감으면 벚꽃의 달큼한 향이 심장을 찌를  듯했다. 시간이 늦어 도로에는 차가 없었고, 과하진 않았으나 혜영이 마신 약간의 술은 그녀에게 객기 어린 행동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 도보로 걷지 말고, 중앙선 따라 주욱 걸어볼래?”


 그 또한 만개한 벚꽃이 마음에 들었는지 혜영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했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봄바람을 맞으며 걷는 혜영의 얼굴에 살포시 웃음이 어렸다. 기분 좋은 봄밤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자신의 품에 폭 안길 듯한 벚꽃을 찬찬히 감상하며 혜영은 걸었다. 잠깐 엉뚱한 생각이 들어서 혜영은 살짝 뒤에서 그녀를 느리게 따라오는 그를 바라보며 눈동자를 벚꽃으로 들어 올렸다. 


“나, 꽃 따다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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