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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푸딩 Aug 27. 2015

그 날의 봄 #1

 "오- 데이트라도 하러 가?"


 유순은 재미있는 일을 구경하는 눈빛으로 혜영을 바라봤다. 그 남자애를 만나러 간다고 했던가? 어디 보자, 오늘 화장이라도 했나? 숙제 검사를 하는 선생님의 마음으로 혜영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폈지만 그런 기색은 없었다. 데이트를 하러 간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수수한 옷차림이다. 역시나 유순의 물음이 혜영의 귀에 닿자, 혜영은 팔짝 뛰었다.


 "아유, 아니에요, 데이트는 무슨. 그저 회계사랑 같이 밥 먹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혜영의 부정에 유순은 입을 삐죽이며 가늘게 실눈을 떴다. 혜영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찌르며 너스레를 떨었다. 혜영은 의 행동에 과장스럽게 옆구리를 손으로 비볐다.


 “언니, 아파요.”

 "한 번 만나봐. 연애는 많이 해볼수록 좋아. 시집 가기 전에! 여러 명 만나 보라고.


 유순의 통통한 볼이 광대 쪽으로 밀려 올라갔다. 나도 예전엔 저랬지. 좋을 때다. 너는 아니라고 펄쩍 뛰지만 내 보기에는 맞고만 뭘. 의뭉스러운 미소를 짓는 유순을 뒤로 하고 혜영은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연애? 자신과는 멀다 생각한 단어였다. 지난 4년간 줄곧 ‘심’과 ‘썸’을 오가며 아무 수확 없지 않았는가. 연인이라고 생각했던 존재는 4년 전에 죽었고, 되살아나려 했으나 지난 가을에 혜영이 다시 죽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혼자 있는 것이 편했고, 마음을 닫은 혜영에게 다가오는 이는 많지 않았다.


 이대로 살다가는 연애도 제대로 못한 채 노처녀로 평생 혼자 살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1,2년쯤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혼자 살아도 청승맞지 않게 살 것인가, 혹은 남 보기에 없어 보이지 않을 것인가를 고민해왔다. 혜영에게 연애와 결혼이란 그런 것이었다.


 더구나, 상대를 생각하면 더욱 이상할 터였다. 괴팍한 성격 때문에 좋았다 싫었다를 반복하는 몇 안 되는 남자사람인 친구 중에 한 명일 뿐이었다. 그를 연애 상대로 생각하고자 한다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함께 있을 혜영과 그를 상상하면 그저께 먹었던 떡볶이가 식도를 타고 다시 올라올  듯했다. 어색하지는 않았으나 그와는 그러면 안 될 것이었다.


‘야, 나 학교 백만 년 만에 가는데?’

‘어쩌라고, 정 그러면 구십구만 구천구백구십구일 만에 오든가.’

‘뭐? 그렇게 오랫동안 학교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아니, 오늘 오라고.’


 그러나 어쩌면, 상사인 회계사와 밥을 같이 먹고 싶지 않다는 것은 핑계일지 모른다. 혜영은 궁금했다. 바쁠 때는 그렇게 메신저로 말을 걸며 귀찮게 하더니, 왜 요즘은 메신저 대화가 뜸한 것인지. 그리고 혜영은 알아야 했다. 지금 이렇게 그에게 끌려가는 것 같은 이 마음은 그저, 끝없는 야근과 특근으로 심신이 지쳐 있기 때문임을. 그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의지하고 투정 부리고 싶은 것임을. 그래야만 했다. 혜영은 자신의 마음속에 아주 낯선 생각이 자신의 행동을 지배한다는 것을 부정했다. 갑작스런 그와의 만남을, 혜영은 연락이 뜸해질 정도로 바쁜 랩돌이-대학원 연구실에서 상주하는 대학원생을 이르는 말-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술 한 잔 하려는 것이라고 치부했다.


 그를 만나려면 혜영이 버스에서 내린 곳에서 캠퍼스를 가로질러 후문 방향으로 가야 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그녀는 오늘 자신이 뭘 입고 왔는지 되짚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인데, 아무리 그래도 거적때기를 입고 만날 수는 없지. 스스로 여성미가 많지 않다고 생각하는 혜영이었지만 적어도 예의는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길이가 짧은 청재킷에, 남색 블라우스를 입었고, 하의는 블랙 진을 입었다. 블라우스에 카디건이나, 치마를 입었다면 훨씬 더 봄날의 여성 같은 느낌이 들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블라우스로 슬며시 자신의 여성성을 드러냈지만 아마 그는 모를 것이다. 알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 혜영은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분홍색이나 아이보리 계열의 밝은 색의 블라우스를 입을 걸 그랬다고 슬며시 아쉬운 마음이 드는 혜영이었다.


 동성의 친구를 만났다면 혜영은 손을 들어 흔들거나 활짝 웃으며 반가움을 표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혜영은 되레 약간 뾰로통함을 나타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 또한 반색을 하지는 않았다. 예전에는 그것이 서운할 때도 있고 친구로부터 미움을 받는 잘못을 하지는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그것이 그들의 일상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혜영과 다른 성을 가진 생물들은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저 손을 살짝 들어 보이거나 무뚝뚝한 표정으로 인사말만 건네는 듯하다. 동성친구에게 하듯이 하면 그는 실눈을 뜨며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무안을 주거나 표정으로는 드러내지 않더라도 그것을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부끄러운 것인지, 귀찮은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으나, 어찌됐든 혜영은 짧지 않은 시간을 관찰한 끝에 이제는 그들의 언어에 적응하여 응용하게 되었다.


 “뭐할까?”

 “뭘 하긴, 술이나 마시고 수다나 떠는 거지.”


 혜영은 그가 뭘 할지 고민하고 그것으로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서둘러 목적지를 결정해주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고, 혜영과 그가 어색하지 않을 수 있는 곳으로. 목적지가 쉽게 결정된 둘은 머뭇거리지 않고 발걸음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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