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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영 글쓰기 Nov 06. 2024

가르치려 들지 말고

모두가 교육자가 되자

가르치려 드는 게 싫다면, 가르치는 사람이 되면 된다.

응?

자... 다시,


왜 가르치려 드냐? 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참된 '교육자'가 되면 된다는 말이다.


나는 글 쓰는 작가이고, 글쓰기 강사이지만 '우리 모두 작가가 됩시다'하고 잘 말하지 않는다. 내가 굳이 주창하지 않아도 사람이라면 언젠가 글쓰기를 찾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글쓰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찾아간다. 운명처럼.


글을 안 쓰고도 정상으로 살아간다면 글쓰기만큼의 해소와 표현의 도구를 글쓰기 외에 무엇으로 대체해서 충분히 쓰고 있는 거다.


글은 자발성이 있어야 역량 강화와 이어진다. 내 안에서 끓어올라야 비로소 넘치고, 그 넘치는 걸 기반으로 잘 정제하여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일이 글쓰기라고 나는 본다.


그러나 이 글에서 내가 '작가'가 아닌 '교육자'가 되자고 주창하는 이유가 있다. 우리에겐 무엇과 대체할 수 없는

'가르치고픈 욕망'이 있다.


누군가에게 알려주면서 우리는 자신의 설명을 강화한다. 설명하면서 더 명확히 인지한다. 내가 뭘 모르고 뭘 아는지, 뭘 더 알아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지를 가르치면서 깨닫는다. 그래서 교육은 상대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내가 배우는 최고의 방법이기도 하다.


대부분 우리는 이 가르치는 니즈를 해소하지 못하고 산다. 그러다 보니 자꾸 가르치려는 꼰대의 태도를 보이며 본의 아닌 폭력성을 띠게 된다. 명예로운 인지도가 있거나 외적으로 훌륭하거나 부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대개는 아무에게나 기울듣지 않는다는 데 발생하는 문제다. 어느 순간 인정투쟁으로 이어지는 꼰대짓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어른으로서 관계 맺는 일상에 또 있을까.


이해한다. 경청이 중요하다고 하고 나보다 경험이 많은 스승을 멘토로 두는 일이 자기 계발에 필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누군가의 조언과 충고, 평가와 판단은 거부감부터 든다. 모르는 게 생겼을 땐 차라리 [챗GPT 서치]로 하는 검색이 더 빠르고, 유튜브 검색결과가 더 직관적이며 재밌으니까. 네이버 검색으로 엄지만 까딱하면 각종 전문가들이나 경험자들이 아는 체를 정성껏 포스팅해놓았는데 굳이 옆 사람에게 먼저 묻는 게 실례가 된 세상이니까. 혹여나 잘 알지 못할 수도 있고. 뭐니 뭐니 해도 더 명확한 건 내 눈으로 보고 이해하는 거니까.


경험과 통찰은 객관적 팩트인지 아닌지도 긴가민가하기에, 참고사항은 부대끼는 사람보다 온라인에서 찾는다. 상대적으로 알려지고 인정받는 명사의 일방적 공언에는 귀 기울이려 한다. 정확히 몰라도 철학자의 이론을 쉽게 풀어놓은 것 같다면 베스트셀러가 되는 현상도 이와 맞닿아 있다. 아들러 심리학과 쇼펜하우어, 니체가 그랬다.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막상 나 역시도 잘 귀 기울이지 않지만, 우리는 누군가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싶고 지식을 넘어선 지혜와 통찰을 나누고 싶어 한다. 그게 글쓰기라는 도구를 만나면 집필, 연재를 하는 글쓴이가 되는 거고. 스피치(말)에 제스처, 자료 등을 곁들이면 직업적 강의 혹은 연사가 되는 거다.


챗GPT가 할 수 없는 건 사람이 사람을 만나서 경험 서사를 주고받는 감성 기반의 상호 소통이다. 꼭 무겁게 '교육'이라는 타이틀을 달지 않더라도.


1주일 전, 짧은 영상을 하나 보았다. 시골에서 만난 인심 좋은 할아버지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이를 이익을 따지거나 하는 조건 따윈 하나 없는 따뜻한 미소로 대하며 당신의 집으로 초대해서 대접해 주는 영상이었다. 내가 댓글로 'AI는 죽어도 모르는 따뜻함이 있다'라고 남겼는데, 댓글의 좋아요 수가 지금 시간에도 올라가고 있다.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것,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면 감동을 받는지를 알려주는 '교육'이다. 그것은 가르치려 드는 게 아니라 가르침이 저절로 파고든다. 중심이 아니라 상대 중심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이런 교육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거다.


AI 시대에 가장 필요한 역량이라면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람에게 전달하는 감성기반의 가르침, 억지가 아니라 '파고드는 가르침'이라 생각한다. 다른 예를 들면 '유재석의 미담'과 같은 거랄까. 무명의 코미디언 후배를 무대 뒤에서 보고 OO야, 잘하고 있지? 하고 콕 집어 이름을 불러준다거나 무대에 오르기 전 긴장 풀라고 선배로서 파이팅을 불어준다는 그런 거 말이다. 힘들어하는 후배에게 자신의 지갑에 있는 지폐를 다 꺼내주며 택시비 하고 남은 돈은 어머니 용돈을 드리라고 했던 그런 따스함. 죽었다 깨나도 AI가 구현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같을 순 있겠지. 화면상의 돈의 숫자가 왔다 갔다 할 순 있을 테니까.(AI를 통제하지 못하는 훗날엔 낭만이 사라지고 효율만 따지다 결과만 남지 않을까.)


유재석 씨의 사례는 '야야야, 후배한테는 이렇게 하는 거야!'라며 가르치려 드는 게 아니었다. 파고드는 가르침이었다. 이 가르침을 겪은 후배는 자신의 후배를 맞이할 때 (인성 파탄자가 아니고서야) 막 대할 수 없는 거다. 몸소 보여준 선배로부터 느끼면서 배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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