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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올린 이수민 Mar 20. 2020

생일 축하합니다, 바흐!

20대 다혈질 청년 모습부터 마지막 직장 월급까지, 소소한 일화들

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1750)


생일 축하합니다, 바흐!

3월 21일은 85년생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335번째 생일입니다. (1685년...) 

바로크 시대와 흐름을 같이하는 바흐는 여러 가지 음악 장르의 기본 틀을 마련해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하죠. 그만큼 클래식 음악사에서 큰 존재감을 드러내는 바흐의 삶과 음악에 대해 살펴볼까요?






그는 작은 시냇물(Bach의 동음이의어)이 아니라 크고 넓은 바다이다.
- 루트비히 판 베토벤


종교가 신에게 은혜를 입었듯, 음악은 바흐에게 은혜를 입었다. 
- 로베르트 슈만


바흐는 종착역이다. 그로부터 시작하여 그에게서 모든 것이 끝난다. 
- 알베르트 슈바이처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

바흐 음악의 주를 이루는 신앙심의 근원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마르틴 루터와 종교 개혁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본래 엄격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생활하던 독일에서 1517년,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가 이뤄지자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거센 반발이 일어납니다. 교황청 내 고위 성직자들은 면죄부로 얻은 수익을 바탕으로 부정부패와 사치를 부렸기 때문이죠. 여기다 십일조를 요구하는 교황청에 대한 불만, 교황청이 있는 이탈리아로부터의 정치, 경제적인 독립을 원하는 독일인들의 열망이 종교개혁의 불을 지피게 됩니다. 이는 독일이 지리적으로 교황청이 위치한 로마와 거리가 멀고, 독자적인 상업적 기반이 닦여있었기 때문이죠. 



마르틴 루터(1483~1546)와 교황청에 보낸 공개질문 서한 95조의 번역문





제일 먼저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작센 구역 내 면죄부 판매를 금지합니다. 일반 국민들은 교황의 말을 따를 것이냐, 군주 프리드리히의 말을 따를 것이냐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인 마르틴 루터를 찾아가 어떤 쪽을 택해야 하는지 조언을 구했죠. 루터는 면죄부는 죄를 사하는 효력이 없다고 답하며 교황청에 보낸 공개질문 서한 95조의 번역문을 국민에게 돌렸습니다이 시기 발달했던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덕분에 이 질문서는 2년만에 독일 내에서 30만부가 발행되었습니다. 


신성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프리드리히 선제후도 루터를 지지하며 공개적으로 가톨릭에 반발했습니다. 이렇게 종교 개혁이 시작된 것이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교황 아래 하나의 공동체의식을 갖고 생활하던 유럽은 종교 개혁으로 인해 개별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대량 인쇄술을 가능하게한 구텐베르크( ? ~1468)와 그가 사용한 기계










목사님들이 검정색 옷을 입는 이유

프로테스탄트(루터교)는 가톨릭(구교)의 화려한 성화와 대규모 성당 건축을 금기시했습니다성상 장식도 우상 숭배로 여겨 금지했고요성직자의 복장도 검정색으로 통일되는 등 교회의 모습과 의식은 점점 간소해집니다마르틴 루터는 가톨릭이 회화, 조각과 지나친 관계를 맺은 것이 교회 타락의 원인으로 보았죠. 그리하여 종교와 미술간의 긴밀한 관계가 점점 멀어졌습니다.


중세 이래 가장 중요한 테마였던 ‘종교’가 금기시되니 화가들은 새로운 주제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종교 개혁 이후 100년이 채 지나지 않아 독일과 네덜란드(당시 플랑드르) 지역을 중심으로 풍경화소소한 일상을 그린 세속화실내 장식용으로 쓰였던 정물화 등의 장르가 발달했습니다. 시계, 현미경, 나침반 등 작고 정교한 기계와 직물업이 발달한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그림 속 인물들이 입고있는 옷의 질감이나 무늬를 표현하는데 특히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네덜란드 세속화 장르의 대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1632~1675)











독일어로 부르는 찬송

루터교 예배 의식에서는 설교와 음악이 예배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 외 가톨릭 의식과 비교해 많은 것들이 바뀌었는데 우선 예배는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이뤄졌습니다그리하여 신자들은 예배를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었죠. 또 라틴어 가사로 쓰여진 그레고리오 성가가 아닌 독일어로 된 코랄(개신교의 찬송)을 회중이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루터는 특히 다 같이 부르는 코랄을 중요시 여겼죠. 그리하여 새로운 코랄의 수요가 많아졌고 루터는 직접 40여 곡의 코랄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그레고리오 성가 멜로디에 독일어 가사를 붙이는 경우도 많았죠. 



라틴어로 된 그레고리오 성가 이 링크를 클릭하면 유튜브로 이동합니다(클릭)

루터가 작곡한 독일어 찬송가 이 링크를 클릭하면 유튜브로 이동합니다(클릭)




그레고리안 찬트를 부르는 성직자들










루터파 교회에서 새롭게 탄생한 교회음악 양식으로는 코랄(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찬송가), 칸타타(교회 여러 절기마다 연주되는 성악 중심의 교회음악 양식), 수난곡(성경 중 유명한 부분인 예수 수난이나 탄생, 부활 등의 이야기에 음악을 붙여 노래하는 양식)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새로운 장르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요한 세바스찬 바흐입니다바흐 집안은 대대로 루터교 신자였고 바흐 본인도 23년간 라이프치히에 있는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음악 감독)으로 재직하면서 루터교 음악을 새롭게 작곡하는데 거의 평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 토마스 교회에 취직한 후 첫 7년간 160여 곡의 칸타타를 작곡했으니 말이죠. 



독일 라이프치히에 위치한 성 토마스 교회. 바흐의 마지막 직장이기도 하다.





교회 앞 바흐의 동상, 성 토마스 교회 내부, 교회 내 바흐 무덤





    



다혈질 청년 바흐

바흐가 살던 시대에는 오늘날처럼 음악가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저 악사 집안의 여덟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넉넉하지는 않았던 악사 집안에서 일찍이 음악을 접하며 재능을 키워나갔죠. 10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1살 때 아버지마저 사망하여, 바흐는 결혼한 첫째 형의 집에 얹혀살게 됩니다. 형의 자녀들이 태어나자 독립을 결심한 바흐는 15세에 국비 장학생으로 뤼네부르크 기숙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졸업 이후 바이마르 궁정악단의 임시 바이올린 주자로 취직했다가 3개월 이후 아른슈타트 신교회의 정식 오르간 주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두툼한 하관을 가진 바흐의 평범한 초상화와 ‘음악의 아버지’라는 왠지 딱딱한 별명 때문에 바흐의 성격이 무난하고 재미없었을 것이라고 유추합니다. 하지만 여러 일화를 통해 당시 혈기왕성했던 10대 바흐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늘 근엄하고 진지한 것만은 아니었다구!




교회에 취직하여 일을 시작한 바흐는 오르간 연주뿐만 아니라 성가대, 오케스트라 연습도 시켜야 했었는데 그보다 나이 많은 성가대원을 다루기가 여간 쉽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바순 주자가 제대로 연습을 해오지 않아 연주가 엉망이 되자 그에게 결투를 신청했습니다. 이 결투는 다른 단원들이 합세하여 패싸움으로 번졌고 이 기록은 1705년 8월 5일자 아른슈타트 지방법원 판결문에 남아있습니다


이 외에도 18세의 바흐는 성가대 훈련을 게을리하고 휴가 기간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등 규율에 어긋난 행동을 자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지역 성직자회의에서 징계를 받고, 교회 장로들과 충돌하였죠. 바흐는 완고한 교회와 그 안에서의 질서가 답답했던 것이죠. 훗날 마음을 다스리며 평범하고 모범적인 삶을 살게 되지만 본인의 타고난 열정은 작품 곳곳에 숨어있습니다. 한마디로 질서 속의 자유를 추구한 것이죠.



바흐의 첫 번째 부인,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




결국 바흐는 22세에 뮐하우젠이라는 작은 도시의 교회 오르간 주자로 쫓겨나게 되는데 여기서 뜻밖의 만남을 갖게 됩니다. 육촌 동생인 바르바라를 만나 결혼하게 됩니다. 젊은 나이에 가장이 된 바흐는 이제 세상에 저항하기보다는 적응, 순응하게 되죠. 23세에는 바이마르 궁정악단의 정식 오르간 주자로 다시 임명되어 명예를 되찾게 됩니다. 이후 9년간 바이마르 지방에 머무는데 이 시기를 ‘바이마르 시대’라고 부릅니다. 









바이마르 시대의 바흐는 오르간 연주와 작곡에 몰두합니다또 취직한 지 6년 만에 바이마르 궁정악단 오르간 주자에서 콘체르트마이스터(연주단장)으로 승진하게 되죠. 평생 연주자로 살다가 원숙한 경지에 이르러서야 이 지위를 얻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하지만 바흐는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지위를 얻음으로써 주변 사람들에게 ‘대가라고 인정받은 것입니다.   


이후 쾨텐 시대의 바흐는 쾨텐 궁정의 카펠마이스터(궁정악단장)이라는 지위와 함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클라비어 소곡집> 등 기악 장르에서 수많은 명곡들을 쏟아냅니다. 


라이프치히 시대, 37세부터 사망할 때까지 성 토마스 교회 칸토르(음악감독)로 재직하면서 교회음악 작곡과 연주를 책임졌습니다. 140곡 이상의 칸타타를 비롯 <마태수난곡>, <요한수난곡> 등의 대규모 교회음악들을 작곡했습니다. 




성 토마스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 중인 바흐









최저 생계비도 안 되었던 바흐의 월급

바흐가 살았던 당시 음악가의 지위와 대우는 열악했습니다. 바흐가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로 일하면서 받은 첫 월급은 87탈러였습니다. 계약서에 따르면 땔감, 양초, 옥수수, 포도주는 따로 지급되었지만 당시 최저 생계비였던 100탈러에 비하면 한참 적은 액수였죠. 하지만 바흐는 한 달에 700탈러 정도 벌어들였는데 개인 렛슨, 결혼식과 장례식 연주비용 등의 부수입 덕분이었습니다. 또 바로크 시대 오르간 연주자는 교회에 소속된 하급 직원과 다르지 않아서 교회 음악 연주, 작곡, 학교 학생 교육, 마을 업무까지 처리해야 했습니다.



이런거 말고 차라리 돈을 더 줘!!








곡 이름 옆에 'BWV'는 뭐지?

<마태수난곡> BWV 244, <토카타와 푸가> BWV 565,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1권> BWV 846 등 곡의 장르와 번호 옆에 BWV라고 쓰여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Bach Werk Verzeichnis는 말 그대로 바흐 작품번호라는 뜻으로 1950년, 음악학자 볼프강 슈미더(1901~1990)가 이를 정리했습니다. 바흐의 작품은 사후 거의 잊혀지다시피 했다가 200년 후에 재발견되었기 때문에 작곡년도를 확인하기가 힘듭니다. 그리하여 다른 작곡가들처럼 작곡 연도별로 정리되지 않고장르별로 묶어서 정리했습니다


볼프강 슈미더는 1번 <칸타타장르부터 1080번 <푸가의 기법>까지 작품번호를 붙였는데 이후 계속 바흐의 곡이 발견되어 현재는 1126번 <우리의 주님을 찬양하라>라는 합창곡까지 번호가 붙었습니다. 기타 미완의 곡들, 바흐의 작품인지 의심스러운 경우, 바흐 자필 악보지만 다른 이의 작품인 경우는 공식 작품번호를 붙이지 않고 BWV-Anh이라는 분류기호를 붙이는데 현재 189번까지 존재합니다. 


대부분의 작곡가들의 작품번호는 보통 곡 이름 옆에 ‘Op.’라고 표기합니다. 베토벤 같은 경우 스스로 작품을 관리하여 공식출판된 작품들은 모두 Opus 번호로 표기했고, 공식출판하지 않았거나 미완으로 남긴 곡들은 ‘WoO(Without Opus)’로 표기합니다. 


특별한 케이스로 해당 작곡가의 작품을 정리한 사람의 이름을 딴 경우가 있습니다. 모차르트는 Opus 번호 대신 KV(쾨헬), 슈베르트는 D(도이치), 리스트는 S(등으로 작품번호를 표기합니다




바흐 작품 번호인 BWV 번호를 정리한 볼프강 슈미더(1901~1990)









왁스 박물관의 바흐

한 때 전세계적으로 위인, 유명인사들의 모습을 똑같이 본 딴 왁스 박물관이 유행이었죠. 독일 베를린의 왁스 박물관은 바흐의 두개골을 바탕으로 생전 모습을 복원해 밀랍인형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닮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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