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음주가무를 즐기는 것이 인생의 낙이라 느끼며 살아가던 중에, 한일 월드컵의 해였던 2002년부터는 일하는 재미도 알게 됐다. 돈을 좇아 좋아하지 않는 분야의 조직에서 받았던 교육을 실행해 가면서 한 가지 업무기술을 터득했는데 그 기술은 좋아하는 분야에서도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시간 떼우기용 추리소설 몇 권 읽은 게 전부였던 내게, 일하는 데 동기 부여가 될 것이라고 직장 동료가 추천했던 책이 있었다. 그것은 카네기연구소에서 발행했던 프랭크 베트거(1888~1981)의《실패에서 성공으로》라는 책이다.
《실패에서 성공으로》와 《카네기 인간관계론》
그런 책으로 일에 열정을 더할 동기를 부여받고, 회사의 교육과 소통에 실전 경험이 쌓이면서 일하는 기술이 날로 발전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때 이후로 업무기술을 세밀하게 가다듬고 발전시키기 위해 책을 사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책으로 공부하고 그것을 일에 적용할 때 효과를 발휘하면 희열을 느꼈다. 일은 사람들과 협업하는 것이기에 업무기술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도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같은 곳에서 출판된 데일 카네기(1888~1955)의 《카네기 인간관계론》도 구매해 읽어 보았다. 업무기술과 인간관계라는 두 가지 무기를 개발하고 세밀하게 갈고닦는다면 성공은 보장돼 있을 거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책에 중독되어 갔다. 아니, 책 소유에 중독돼 갔다. 일이 끝나면 서점에 매일 가다시피 했다. 업무기술과 인간관계에 도움이 될 만하다 싶으면 일단 사고 보았다. 그렇게 한 권, 두 권 사다 보니 3명도 앉을 수 있는 책상에 책을 세워 두지 못할 만큼 되었다. 거실 한 벽면의 8할 크기의 책장도 사야 했다. 방 한 켠에도 책장이 필요해졌다. 여유 공간이 줄어 갔다. 마침내 칸칸마다 책을 한 줄로 세워두는 것도 모자라 그 안쪽에도 책을 넣어 둬야 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니 안쪽에는 어떤 책이 있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소유한 책들
사서 집으로 가져와 정독한 책도 있었지만, 한 번 훑어본 후 방치한 책들도 쌓여 간다는 게 문제였다. 책장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의 제목들을 보면서도 내용은 알 수 없는 책들이 부지기수였다. '아, 언젠가는 읽겠지, 읽고 말 테야' 하면서도 새로운 책을 사서 대충 훑어보고 꽂아두는 버릇이 그치질 않았다. 업무기술과 인간관계를 향상시켜 성공하기 위한 과정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길 회피했다. 효과를 못 보는 책이 있더라도 책을 사고 읽고 보관하는 것은 성공할 때까지 계속해야 하는 신성한 의식이었다.
그렇게 성공을 위해 땀 흘려 달려가던 도중에, 알 수 없는 허무감과 갈증을 느꼈다. 2008.12.20. 자연스레, 나도 모르게 수필 코너로 발길이 흘렀다. 법정(1932~2010)의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수필이 눈에 들어왔고, 읽으면서 마음에 위안을 얻었다.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는(무소유, 범우사, 22p.) 《무소유》도 읽었다. 그 책을 소유해 읽으면서 소유와 무소유의 아이러니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마무리》와 《무소유》
Ⅰ. 신과 나눈 이야기
정신세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는 수필의 힘을 느끼면서 서점에 갈 때 경제경영, 자기개발 코너만이 아니라 수필 코너에 머무는 시간도 많아졌다. 그러다 1995년 미국에서 발간된 닐 도날드 월쉬(1943~현재)의《신과 나눈 이야기》라는 영성책을 2009.1.5.에 접하게 되었다. 수많은 내용들 중에 <'존재–행동–소유'의 패러다임>에 관한 다음과 같은 메시지도 있었다.
1. 존재–행동–소유의 패러다임
1권에서 우리는 '존재–행동–소유' Be–Do–Have의 패러다임과 사람들이 이걸 어떤 식으로 뒤집었는지 이야기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더 많은 시간, 돈, 사랑 혹은 다른 뭔가)를 "가진다면", 비로소 자신들이 뭔가(책을 쓰고, 취미를 키우고, 휴가를 가고, 집을 사고, 관계를 감당하는 일 따위의)를 "할" 수 있고, 그것은 자신을 뭔가가 "되게"(행복하게, 평온하게, 만족스럽게, 애정 깊게) 해줄 거라고 믿는다.
그들은 사실상 '존재–행위–소유'의 패러다임을 뒤집고 있다. 본모습대로의 우주에서는 (너희 생각과는 반대로) "가짐"은 "됨"을 낳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먼저 소위 "행복한"(혹은 "알"거나 "현명하"거나 "자비로운" 따위의) 상태가 "되고" 나서, 이 되어 있음의 자리에서 뭔가를 "하기" 시작하라. 그러면 얼마 안 가 너희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너희가 항상 "갖고" 싶어하던 그것을 가져다주면서 끝맺는다는 걸 발견할 것이다.
이 창조하는 과정(바로 이런 게...... 창조과정이란 것이다)을 작동시키는 방식은, 먼저 너희가 "갖고" 싶은 게 뭔지 살펴보고, 그것을 "가진다면" 자신이 어떻게 "될" 것 같은지 자문해본 다음, 곧 바로 그런 되어 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너희는 지금껏 써오던 '존재–행위–소유'의 패러다임을 뒤집어ㅡ실제로는 그것을 바로 세워ㅡ, 우주의 창조력에 맞서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더불어 움직일 수 있다.
이 원리를 진술하는 지름길은 이렇다.
너희가 삶에서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문제는 자신이 무엇이 되고 있는가뿐이다.
우리 대화가 끝날 즈음에 가서 내가 다시 언급하려는 세 가지 메시지 중 하나가 이것이다. 나는 그 메시지들을 가지고 이 책을 끝맺을 작정이다.(신과나눈이야기 3권, 29-31p.)
신과 나눈 이야기 3권
2. 체험의 결과가 아닌 원인이 되는 것
너희의 새로운 이해를 의식하면서 적용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너희 체험의 결과가 아니라 그것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굳이 자신의 개인 영역이나 개인 체험 속에 대립물을 창조해서, '참된 자신과 되고자 선택하는 자신'을 알고 체험할 필요는 없다는 것도 알아둬라.
이 앎으로 무장할 때, 너희는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다. 이 앎으로 무장할 때, 너희는 너희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여기 와서 너희 모두와 함께 나누려 했던 진리다. (중략)
나는 아무것도 가질 필요가 없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으며, 아무것도 될 필요가 없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되고 있는 것을 빼고는.
이것은 "가짐"과 "행함"이 너희 삶에서 배제되리란 뜻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가짐과 행함으로 체험하는 것이 너희의 되어 있음에서 나오리란 뜻이다. (중략)
너희가 "되기"를 추구하지 않고, "되어 있음"에서 나올 때 모든 게 변하고, 모든 게 뒤집힌다. 너희는 "되어 있음"에 이르게 "할" 수 없다. 너희가 행복해"지려고" 애쓰든, 현명해지려고 애쓰든, 사랑이 되려고 애쓰든, 혹은 신이 되려고 애쓰든, 행함으로는 "거기에 이를" 수 없다. 하지만 일단 "거기에 이르고" 나면, 너희가 멋진 일들을 할 수 있으리란 건 사실이다.
여기에 '신성한 이분법'이 있다. "거기에 이르는" 길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냥 자신이 이르고자 하느 곳에 있어라! 그건 이토록 간단하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행복해지길 바라느냐? 행복하라. 현명해지길 바라느냐? 현명하라. 사랑이길 바라느냐? 사랑이어라.(신과나눈이야기 3권, 568-570p.)
책 말고도 또 다른 의식을 정기적으로 치렀다. 그것은 자기개발 교육이었다.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 인터넷 강의를 수료한 교육생들을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무료로 진행되는 명사(名士) 특강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빠짐없이 참가했다. 유명 인사들의 강의를 매달 들을 수 있다는 건 매번 기대되는 일이었다.
Ⅱ. 랜드마크 포럼
한 번은 회사에서 컨설팅을 수행 중이었던 한 컨설턴트가 2013년 가을에 추천해 준 「랜드마크 포럼」(이하 "포럼")이라는 3일 코스의 교육도 거금을 들여 참가했다. 그에 이어지는 고급 과정에도 참석했고 실천 세미나에도 참여했다.
청강하거나 참석했던 어떤 교육보다도 포럼은 진행 방식과 내용이 탁월했다. 덕분에 내 자신에 대해 몰랐던 것을 많이 알게 되었다. 그만큼 교육 효과도 월등했다. 포럼이 주었던 큰 교훈은 "언어를 활용해 가치관·인생관·세계관이라 부르는 세상에 대한 관점(觀點, 보는 원점)의 변화를 불러일으키면 인간의 삶도 변화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모든 인간이 갖가지 색깔의 필터를 끼울 수 있는 안경을 써야 한다고 가정한다면, 그 필터에 따라 세상이 완전히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받아 왔던 수많은 교육을 통해 크고 작은 필터들을 낀 채 살아왔고 그것이 한 사람의 가치관을 좌우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은 채 살아왔지만, 포럼을 통해 확실히 그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1. 자기 분석
포럼은 먼저 내 자신을 분석하도록 도와 주었다. 나와 사람들과 삶에 대해 내가 생각해 왔던 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어떤 생각이나 감정에 특별한 명칭를 달았다. 그것으로써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은 이것이구나, 내가 느끼는 감정은 저것이구나' 하며 분별(分別, 분석해서 구별함)할 수 있게 하였다.
예를 들어, '선입견'이나 '편견'을 갖고 누군가의 말을 듣고 있을 때 '나는 지금 <이미 늘 듣기>를 하고 있구나'라고 재빨리 분별하도록 하였다. 그런 선입견과 편견으로 상대방을 속으로 비판하고 비평하고 판단하고 있을 때는 '나는 지금 <내적 대화>를 하고 있구나' 하고 분별하게 하였다. 또 어떤 상황에서 '불평'을 하고 있을 때나 어떤 사람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을 때는 '나는 지금 <라켓>을 돌리고 있구나'라고 분별하게 하였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거나 잘 못 보이고 싶어서 '가식'적으로 말하거나 행동할 때는 '내가 지금 <잘 보이기/잘 못 보이기>를 하고 있구나' 하고 분별하게 하였다.
이렇게 어떤 생각과 감정에 명칭을 다는 방법으로 그것을 실시간 분별하게 함으로써 나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내 삶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난 것'이었을 뿐인데 그런 선입견과 편견, 불평과 불만과 화를 가지고 그 일어난 일들에 대해 갖가지 부정적 의미들을 부여해 왔던 자신을 발견하게 하였다.
생동감 있는 비범한 삶을 살지 못해 왔던 이유는 ① 그렇게 삶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갖가지 부정적 의미들을 스스로 부여해 왔던 것 ② 삶의 원인으로 존재하며 말한 것을 행동으로 옮겨 결과를 내지 못해 왔던 것 즉, 언행일치된 <온전함>이 없었던 것에 그 원인이 있었음을, "비범한 삶을 살기"라는 표어를 내세운 포럼은 깨우쳐 주었다.
2. 자기 재창조
포럼은 그 원인들을 제거함으로써 돌파구를 만들어 변화할 수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①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텅 비어 있지만(Life is empty and meaningless.) 스스로 부정적 의미들을 부여했음을 인식함으로써 다시 삶을 백지화할 수 있다고 깨닫는 것 ② 그런 깨달음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인간관계에서의 부정적 요소들은, 그들과의 오해와 앙금을 풀고 용서하거나 용서받는 통화와 대화를 통해 털어버릴 수 있다는 것 ③ 그렇게 하여 다시 모든 것이 가능한 텅 비어 있는 백지 상태에서, 삶의 원인이 되어 선언한 것을 행동에 옮겨 결과를 내는 온전함으로 살아갈 때 생동감 있고 비범한 삶이 실현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포럼은 그것을 "돌파구(breakthrough)를 만들어 삶을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 완전한 변화)한다"고 말했다.
3. 존재–행동–소유(결과)
포럼은 백지 상태가 된 삶에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하는 가능성의 '존재'가 되어 재무·직업·취미·관계·교육 등 인생 전반에서 생동감 있는 비범한 삶을 위한 목표들을 이루겠다고 선언하고 실행 방안들을 '행동'에 옮김으로써 선언한 것들을 '소유'할 수 있게 됨을 알게 해 주었다(교육 당시에는 '소유'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언제부터 '결과'라는 용어로 바뀐 것 같은데, 이것은 존재적 결과와 소유적 결과를 다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이므로 적절한 용어 변경이라 생각한다).
가능성의 '존재'로서 목표를 선언하고 '행동'하면 선언한 것에 대한 '결과'를 얻는다('소유'하게 된다)ㅡ삶에 돌파구를 만들어 트랜스포메이션한다ㅡ는 것은 포럼의 결론이며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훌륭한 필터다. 그 필터로 세상을 바라보는 원점이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다. 인생의 모든 분야에 대해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책임감과 온전함을 바탕으로 무엇이든지 가능한 확장된 세계를 보게 한다.
더 포럼의 창시자 워너 어하드 _ Werner Erhard
《신과 나눈 이야기》가 영성적 관점에서 세계관을 확장시켜 준다면, 워너 어하드(Werner Erhard, 베르너 에르하르트, 1935~현재)의 자기개발 세미나가 좀더 현대적으로 다듬어진「랜드마크 포럼」은 심리학적·철학적 관점에서 세계관을 확장시켜 주는 데다가 직접 행동으로 옮기게끔 해 준다. 타 교육이 지식을 전달하고 그 지식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각자의 몫으로 맡기는 반면, 포럼은 전달한 지식을 실생활 속에서 바로 행동으로 옮기게끔 강렬한 체험의 장을 열어 준다. 그 맛은 포럼을 몸소 참가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가장 차별화된 방식이다. 이렇게 훌륭한 교육을 듣게 된 계기는 포럼을 소개하는 세미나를 들었기 때문인데 그 핵심 내용을 <선생님_3. 선생과 학생> 편(2021.11.28.)에 다음과 같이 소개한 적이 있다.
두 번째 기억에 남는 교육은 2013년에 알게 된 한 토론교육을 소개하는 세미나에서 들은 내용이다. 이것을 듣고 그 교육에 참여를 결정했는데 강사는 다음과 같이 강의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안다는 것을 아는 영역'과 '모른다는 것을 아는 영역'이 있습니다. 국어를 할 줄 아는 것은 '안다는 것을 아는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러시아어를 할 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은 '모른다는 것을 아는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나 '모르는 것조차 모르는 영역'이 있습니다. 삶의 돌파구는 바로 이 '모르는 것조차 모르는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을 알게 될 때 생깁니다."
안다는 것을 아는 영역(파란색 원) ; 모른다는 것을 아는 영역(파란색 원과 검정색 원 사이의 영역) ; 모르는 것조차 모르는 영역(검정색 원 밖의 영역)
영혼의 지성과 감정은 곧바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지성으로써 무언가를 알게 될 때는 특별한 감정이 생기게 된다. 경험으로 봤을 때 지성으로써 안다는 것을 아는 영역에 대한 감정은 뿌듯함, 보람, 기쁨 같은 느낌이다. 모른다는 것을 아는 영역에 대한 감정은 무덤덤함, 실망, 슬픔 같은 느낌이다. 모르는 것조차 모르는 영역에 대해 알게 됐을 때의 감정은 놀라움, 충격, 감동이다. 이러한 감정이 생기기 때문에 이 영역에서 삶의 돌파구가 생긴다는 것은 사실이다.
모르는 것조차 몰랐던 지식을 포럼을 통해 알게 됨으로써 그 지식의 힘으로 삶의 돌파구를 발견한 것이었다. 따라서 전혀 접해 보지 못했던, 모르는 것조차 몰랐던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체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포럼을 통해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러한 앎은 독서와 청강을 멈출 수 없게 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였다. 모르는 것조차 모르는 영역에 있는 새로운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왼손으로는 '일과 관계에서 생동감 있는 비범한 삶(그 결과로 물질도 따라오는 삶)을 살겠다'라는 세상적 성공을, 오른손으로는 '나에게로의 진리를 찾겠다'는 영적 성공을 거두려는 두 마리 토끼 잡기 전략, 투 트랙(two track) 전략을 세우고 실행하게 되었다.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
Ⅲ. 사이언톨로지, 사고의 기초
당시 이처럼 훌륭한 포럼의 교훈을 배운 대로 실천했다. 포럼이 가르치는 [존재–행동–소유]라는 프로세스에 큰 관심을 갖게 되어 여기저기 정보도 찾아 보았다. 그러던 중에 '창조'의 반대 개념인 '파괴'조차도 창조에 대한 '반창조' 개념으로 보는, 다시 말해, 모든 것을 창조의 개념으로 보는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scio + logos, 로고스 곧 분별과 이성에 대한 앎)의 창시자, L. 론 허버드(1911~1986)의 책 《사이언톨로지, 사고의 기초》를 보게 되었다. 그는 책에서 [존재–행동–소유]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존재의 3가지 상태, 존재–행동–소유
① 존재의 세 가지 상태는 존재(BE), 행동(DO), 소유(HAVE)다.
② 존재의 첫 번째 상태는 존재함(BEING)이다. 존재함은 어떤 종류의 정체성을 갖는 것이다. 게임에서의 역할과 같다.
③ 존재의 두 번째 상태는 행동하는 것(DOING)이다. 행동한다는 것은 활동, 기능, 성취, 목표달성, 목적수행, 공간에서의 지위 변경이다.
④ 존재의 세 번째 상태는 소유성(HAVINGNESS)이다. 소유성은 소지, 점유, 조정할 수 있고 위치를 정할 수도 있으며 사물, 에너지, 공간을 책임질 수도 있는 것이다.
⑤ "인생이란 게임에서는 소유성을 목표로 행동성을 완수하기 위해 존재성을 취함이 요구된다."
⑥ 인생에서는 이 세 가지 조건이 중요도 순으로 서열화되어 있다.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 행할 수 있는 능력보다 중요하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소유할 수 있는 능력보다 중요하다. (사이언톨로지 사고의 기초, 31-32p.)
같은 책에서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기록돼 있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①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은 생각의 구조다.
② 생각은 아는 것, 알지 못하는 것, 그리고 그 사이에 애매한 중간 영역들로 완전히 포함되어 있다. (사이언톨로지 사고의 기초, 101p.)
이와 같은 포럼에서 들었던 낯익은 내용을 보면서 사뭇 놀랐다. 당시에는 포럼이 사이언톨로지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추측했었다. 이 글 <소유냐 존재냐>를 쓰면서 정보를 찾아 보았다.
랜드마크 에듀케이션
랜드마크 에듀케이션은 1970년대 the est(Erhard Seminars Training) 시스템을 고안했던 워너 어하드가 소유한 지적재산권 사용 허가를 받으면서 1991년에 시작했다. 랜드마크는 다수의 후속·추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출시했다. (중략)
랜드마크, 전 est 사는 L. 론 허버드의 다이어네틱스(나중에 사이언톨로지가 되었다)로부터 독립하며 시작했는데, 다이어네틱스는 어하드(당시 존 폴 로젠버그로 알려졌던)가 관련돼 있었다. 랜드마크 월드와이드는 조직이 분리되었음에도 몇 가지 핵심적 특징을 사이언톨로지와 계속 공유하고 있다. (Landmark Worldwide, Wikipedia)
《사이언톨로지, 사고의 기초》와 《다이어네틱스》
워너 어하드
(자동차 대리점 직원, 자동차 세일즈맨, 백과사전 프로그램 교육훈련 매니저, 잡지사 지역 매니저 같은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며) 광범위하게 독학하면서, 어하드는 철학자들, 리더십과 비즈니스 교수들, 물리학자들, 선사(禪師)들의 영향을 받거나 그들과 가깝게 일했다. 철학자 마이클 E. 짐머만은 어하드에 대해 말했다. "그는 어떤 것도 특정 정규 교육훈련을 받은 적이 없지만, 내가 학계에서 봤던 수많은 똑똑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을 이해했습니다."
세인트루이스에 있을 때, 그는 두 권의 책을 읽고 뚜렷한 영향을 받았다. 나폴레온 힐의 《생각대로 될 수 있다》(Think and Grow Rich, 1937)와 맥스웰 몰츠의 《성공의 법칙》(Psycho-Cybernetics, 사이코 사이버네틱스, 1960)이다.
패런츠 매거진(Parents Magazine) 시절, 직원 중에 한 명이 인간 잠재능력 회복운동의 두 가지 핵심 요소인 아브라함 매슬로와 칼 로저스의 발상을 그에게 소개했을 때, 그는 세일즈 성공(sales success)보다는 자기실현(personal fulfillment)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매슬로의 욕구단계설 _ Verywell Mind
소살리토(샌프란시스코 휴양 마을)로 이사한 후에 그는 선불교 통역사인 앨런 와츠의 세미나에 참석했는데, 그는 어하드에게 마음(mind)과 자아(self)의 차이를 전해 주었다. 어하드는 나중에 와츠와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어하드는 또한 선(禪) 사부(師傅)인 야마다 무몬과 일본에서 공부했다. 바틀리(철학 교수)가 쓴 자서전 《워너 어하드: est 창립자, 한 남자의 트랜스포메이션》(Werner Erhard: The Transformation of a Man, The Founding of est)에서 바틀리는, 어하드는 선(禪)이 est를 위한 공간을 창조하는 데 가장 핵심적으로 기여했음을 인정했다고 인용했다.
어하드는 1967년 데일 카네기 코스에 참석했다. 그는 그것에 많은 감명을 받아 직원들이 그 코스에 참석하게 했고, 자신만의 코스 개발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 수년 이상, 어하드는 대면접촉(Encounter), 교류분석(Transactional Analysis), 인라이트먼트 인텐시브(EnlightenmentIntensive, 5일 간의 수행 프로그램), 수브드(Subud, 인도네시아 신비가의 정신적 운동),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를 포함한 광범위한 (정신)운동들을 연구·조사했다.(Werner Erhard, Wikipedia)
이와 같은 사연을 확인해 보니 예전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이 사례 역시 워너 어하드가 자신이 모르는 것조차 몰랐던 사이언톨로지를 포함한 여러 지식들을 기반으로 그것을 더 발전시켜 가능성의 '존재'로서 돌파구를 만들어 '행동'하고 그것을 '소유'하게 됐음('결과'를 내게 됐음)을 실증하고 있다. 사이언톨로지가 "인생이란 게임에서는 소유성을 목표로 행동성을 완수하기 위해 존재성을 취함이 요구된다."라고 말한 것에 비교해, 랜드마크는 언제부터 '소유'를 '결과'라는 용어로 바꿈으로써 자기개발 프로세스를 [존재–행동–소유]에서 [존재–행동–결과(존재적 결과와 소유적 결과)]로 좀더 확장시켰다는 것도 추론할 수 있다.
포럼의 코스를 이수한 교육생들은 그때부터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가 바뀌게 된다. 생동감, 비범함, 돌파구, 창조, 재창조, 가능성의 존재, 선언, 행동, 결과, 책임, 원인, 온전함, 견지, 완결 같은 언어를 쓴다. 언어가 바뀌면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말과 행동이 바뀐다. 포럼의 세계관이 담긴 언어의 필터를 안경에 끼고 자신의 세계를 본다.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가 되어 원인으로서 선언하고 행동하여 결과를 낸다. 결과를 내거나 내지 못함에 대한 책임을 진다.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면 다시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하여 존재하고 선언하고 행동하고 완결하려 한다. 그렇게 강력한 포럼의 언어의 필터로 세계를 보며 살아간다.
Ⅳ. 소유냐 존재냐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독일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1900~1980)은 그 유명한 책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 를 1976년에 발표했다. 그는 세상을 소유양식(所有樣式, Having Mode)으로 살아갈 것이냐, 존재양식(存在樣式, Being Mode)으로 살아갈 것이냐를 이야기했다. 그는 독자들에게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을 이해시키기 위해 두 개의 시를 비교하도록 책에 실었다.
갈라진 암벽에 핀 한 송이 꽃
나는 너를 갈라진 틈에서 뽑아낸다.
적은 꽃이여, 내가 너를,
뿌리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신과 인간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으련만.
ㅡ 영국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1809~1892)의 시
가만히 살펴보니
냉이꽃이 피어 있네
울타리 밑에!
ㅡ 일본 하이쿠 시인 바쇼(1644~1694)의 시
소유냐 삶이냐
프롬은 각각의 시가 나타내는 각 시인의 세계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테니슨은 그의 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생명을 해체하는 수단에 의해 진리를 찾으려는 서구의 과학자들과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바쇼가 원하는 것은 '보는 것'이다. 그것도 그저 바라볼 뿐만 아니라 그것과 하나가 된다. 그리고 꽃은 그대로 살도록 내버려둔다. (소유냐 삶이냐, 흥신문화사, 31p.)
테니슨의 꽃에 대한 관계는 소유의 양식에 해당한다. 이것은 물질적 소유가 아니고 지적 소유다. 바쇼와 괴테의 꽃에 대한 관계는 각각 존재의 양식에 속한다. 존재라는 말로 나는 어떤 것을 '소유'하지도 않고, 또 '소유하려고 갈망하지도' 않으면서 즐거워하고, 자기의 재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며 세계와 '하나'가 되는 생존양식을 표현하고 있다. (소유냐 삶이냐, 33p.)
프롬은 존재의 특징을 간명하게 표현하기 위해 <재산>이란 제목의 괴테의 시를 실었고, 바로 이어서 소유와 존재의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에 대해 얘기했다.
재산
나는 알고 있다.
내 영혼으로부터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생각과, 자애로운 운명이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나를 기쁘게 하는
모든 행복한 순간 외에는
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음을.
소유와 존재의 차이가 본질적인 면에서 서양과 동양의 차이는 아니다. 그 차이는 오히려 인간에 중심을 둔 사회와 사물에 중심을 둔 사회 사이에 있다. (소유냐 삶이냐, 34p.)
프롬이 얘기하듯이 인간에 중심을 두느냐, 사물에 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존재양식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며 살아가느냐(세상과 '하나'가 되면서 생각과 운명이 주는 기쁨으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느냐), 소유양식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며 살아가느냐가 좌우된다. 여기서 한 번 더 생각해 볼 문제는 존재양식이나 소유양식으로 살아가는 데에도 사람마다 그 깊이가 다를 것이라는 점이다.
《소유냐 존재냐》를 빠르게 이해하기 위해 유튜브를 검색하다가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최일범 교수의 강의를 보았다. 그는 앞서 소개한 테니슨과 바쇼의 시를 언급하여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을 시청자에게 이해시키려 하였고,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들려 주며 어떤 책인지 설명했다.
내가 가진 것을 가지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저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이런 비슷한 경험(소유양식으로 살아야 할 것이냐 존재양식으로 서로에게 관심을 주고 배려하고 존중하는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냐)을 한 적이 있는데요, 제가 동양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니까 우리 학과, 우리 전공에는 고등학생 중에서 한자 급수가 2급 이상인 사람에게는 특혜를 주는 장학 제도가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 동양철학을 전공하려는 고등학생들은, 미리 성대 들어올 학생들은 한자 열심히 공부해서 2급 이상 모두 자격증을 따고 와서 자기 학력에 한자 2급 자격증을 자랑스럽게 내놓는 그런 일들이 있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그 학생들을 상대로 수업을 할 때 제가 한자를 쓰면 그 학생들이 한자를 몰라요. 나와서 써 보라 그러면 쓰질 못해요. '너희들 2급 자격증 다 땄지 않니?' 근데 아이들이 뭐라고 얘기하냐 하면, '선생님, 놀랍게도 기억을 못 하겠어요.' 이래요. '기억을 못 하겠어요.' '아니, 2천4백 자 그 정도를 충분히 고등학교 때는 시험 보고 다 알았는데 어떻게 된 거야?' '시험 보고 대학 합격하는 순간 다 잊어 먹었어요.'
여러분들,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습니까? 한자는 그 학생들에게 하나의 수단이었어요, 소유였다고요. 내가 소유했던 거니까 내가 버린 거예요. 대학 들어오면서 더이상 이런 지긋지긋한 한자는 이제 안 보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좀 이해가 가시죠?
모든 면이 마찬가지예요. 여러분들, 사랑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너를 사랑한다. 뭘 사랑하죠? 너의 아름다운 얼굴? 너의 멋있는 몸매? 아니면 네가 가지고 있는 재산? 너의 영리한 머리? 그것을 내가 소유하는 즐거움을 누리겠다, 그걸 사랑으로 착각을 하는 거죠, 착각하는 거예요.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 누군가 여러분을 사랑한다라고 했을 때, 당신이 가진 돈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멋있는 몸매를 사랑합니다, 여러분들, 받아들일 수 있나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해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줄 것을 요구하지 않을까요? 진정 나를 사랑한다면 있는 그대로.
근데 사실 아이러니한 게 뭐냐 하면, 있는 그대로의 내가 누군지 나도 사실 잘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나의 영혼 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라는 그런 마음이 떠오르는 거예요. 나는 나다, 그냥 나를 사랑해 달라. 만약 내가 돈이 많아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돈을 사랑한 거지 나를 사랑한 게 아니죠. 나에게서 돈이 나가는 순간 아마 그 사람의 사랑도 떠나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철학적으로 반드시 물어야 돼요. 내가 가진 것이 아닌 그것을 가지고 있는 나는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어야 돼요. 그런 질문을 근본적으로 던지고 있는 책이 바로 《소유냐 존재냐》 하는 책이에요."
중천학당 유튜브 영상 갈무리
교수가 들려 준 학생들의 사례를 듣고서, 책장에 꽂혀 있는 성공의 수단으로써 방치돼 있는 책들을 보게 되었다. 내가 가진 것을 가지고 있는 나는 누구인지 생각해 보았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있는 그대로의 사람들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헤아려 보았다. 내가 포럼을 통해 창조한 새로운 가능성의 존재로서 살고자 했던 근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분석해 보았다. 생동감 있는 비범한 삶을 살고자 했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 목적은 나라는 인간을 위함이었을까?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위함이었을까? 가족을 제외한 그들과 창조적 관계를 맺고자 했던 것은,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나의 지위를 높여 주고 돈을 벌게 해 주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수단으로 삼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 자신의 편안함과 풍요로움과 존경받음을 위해 [존재–행동–소유]의 프로세스를 실천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겉으로는 모두와 잘 지내기 위한 이타적 동기로 포장돼 있지만, 깊고 깊은 마음속으로는 내가 잘 되기 위한 이기적 동기가 아니었을까?
소유와 무소유,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이라는 아이러니를 인식했음에도, 둘을 짜임새 있게 연결해 줄 [존재–행동–소유]라는 프로세스ㅡ인간과 사물, 인본주의와 자본주의, 존재양식과 소유양식을 연결하려는 시도ㅡ로써 세상적 성공과 영적 성공을 쟁취하려는 투 트랙 전략은 나를 위한 욕심, 이기적 동기로 세운 전략이란 사실을, 모르는 것조차 몰랐던 지식이 담긴 한 책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Ⅴ. 새로운 성경
[존재–행동–소유] 프로세스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여전히 책을 사서 공부하며 지내던 2015.4.15. 한국의 사업가였던 김용철(1944~현재)의《새로운 성경 전160권 모음집》(요약집)과 그것을 읽자마자 구매했던 《새로운 성경 1부》를 읽고 나서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새로운성경 전160권 모음집(요약집)
1. 반대로 돌려야 할 삶의 팽이
모든 것이 가능한 존재로 방향을 정해 실행하고 있던 나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대로 기록해 만들었다는 새로운성경은 지금까지 오른쪽으로 돌려 왔던 삶의 팽이를 왼쪽으로 돌리며 살아야 한다는 것, 모든 삶을 반대쪽에서 바라보고 사는 지혜를 가져야 된다는, 당시의 나에게는 매우 당황스러운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었다.
팽이가 반대 방향으로 돌아감이 살아갈 길
나에게 오르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 너희들이 알지 않느냐?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반대로 살고 팽이가 돌아가는 반대 방향으로 돌아감이 너희들이 살아갈 길이라 하였거늘, 어찌 너희들은 그리도 깨우침이 늦고 깨우치지 못하는가? 세상사 무엇이 너희들의 마음에 나 여호와에 오르고자 기도하고 경배하는 마음보다 소중한 것이 있으며 귀한 것이 있다 생각하는가?
ㅡ 새로운성경 685번째 하나님 말씀 (2000.10.12.) (이하 몇 번째 말씀인지만 표기)
팽이를 왼쪽으로 돌리는 것과 같은 삶을 살라
너의 제자와 만백성에게 가르치기를 오른쪽으로 도는 팽이를 왼쪽으로 돌리는 것과 같은 삶을 살라 하였으니, 그리 내가 가르치지 않더냐? 네가 먼저 그와 같은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며, 그와 같은 삶을 네가 보여야 할 것이니라.
ㅡ 960번째 (2000.12.26.)
반대쪽에서 바라보고 사는 지혜를 얻으라
내가 간곡히 너희들에게 다시 한 번 이르노니, 나의 뜻을 새겨들어 너희 것으로 만들어 지금의 살아가는 생활의 발길을 잠깐 멈추고, 오른쪽으로 도는 그 팽이를 왼쪽으로 돌리며 너희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삶을 반대쪽에서 생각하고 바라보고 사는 그와 같은 지혜를 얻으라, 나의 사랑하는 피조물 만백성들아!
ㅡ 1,141번째 (2001.2.2.)
새로운성경 1부 16권
그 전까지 모르는 것조차 모르는 영역 속에 있던 160권의 새로운성경은 왜 갑자기 나타나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팽이를 반대로 돌리라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 즉, 노골적인 소유양식의 삶의 방식이든 존재양식을 가장한 소유양식의 삶의 방식이든 간에, 그런 방식으로는 너무나 많은 맹점·모순·오류에 빠지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다.
2. 전체 지식에 속한 부분 지식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는 [지구 ⊂ 태양계 ⊂ 우리은하 ⊂ 모든 은하계 ⊂ 전체 우주]와 같이 우주의 작은 부분에 속해 있다. 지식 또한 마찬가지다. 부분 지식은 전체 지식에 속한다. [(아는 것 + 모르는 것 + 모르는 것조차 모르는 것) ⊆ 전체 앎]이라는 구조를 갖는다. 큰 지식은 작은 지식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큰 지식의 관점에서 작은 지식이 갖고 있는 맹점·모순·오류를 지적하며 바로잡아 준다.
예를 들어, 심리학적·철학적으로는 선입견·편견·시기·질투로 나와 남과 세상을 비난·비평·판단함으로써 아무 의미도 없고 텅 비어 있는 백지 같은 삶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스스로 부정적 의미들을 부여하여 먹지처럼 만들었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다시 백지의 삶으로 원상복구하여 재창조할 수 있다.반면에, 영성적으로는 자신의 불평·불만의 대상이었던 사람들 간에 오해와 앙금을 풀고 용서하고 용서받음으로써 좋은 관계로 재창조하는 것에 이어, 삶을 먹지처럼 만들면서 알게 모르게 지었던 수많은 죄들에 대해 스스로 아무 의미 없음이라며 무죄 판결하더라도, 그 죄들로 인한 직접 피해자와 그 나비효과(연쇄반응)로 인한 간접 피해자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모든 직간접적 피해 당사자가 용서를 해 주거나, 하나님이 정상 참작(情狀參酌)하여 죄를 사해 주지 않는 한, 여전히 죄는 죄로 남아 있다.
이러한 분별에 대해, 포럼의 세계관을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새로운 부정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하지 않고 있다"라고 분별할 것이다. 그러나 포럼의 세계관을 벗어나 포럼이 모르는 것조차 모르는 영역에 있는 새로운성경의 세계관으로 본다면 "새로운 긍정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하고 있다"라고 분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큰 지식은 작은 지식의 한계를 바로잡아 준다. 따라서 작년에 작은 지식을 공부했고, 금년에 그보다 큰 지식을 공부한 사람은 당연히 큰 지식을 계속 공부하며 그에 따를 수밖에 없다.
새로운성경 10부 160권
지식의 크기와 깊이를 분별하며《새로운 성경 1부》를 읽고 난 후 2부, 3부, 4부... 계속 그렇게 읽어 나갔다. 읽어 갈수록 마음속 욕심으로부터 피어난, 인생 전반에서 생동감 있는 비범한 삶을 위해 가능성의 존재가 되어 행동하고 소유하며 산다는 것은 지구라는 세계에서 한계가 있는 삶을 반복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포럼의 언어들로 중무장해 삶의 원인으로서 언행일치하는 온전함의 삶을 살지라도,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한 생동감 있는 삶, 비범한 삶은 욕심의 뿌리로부터 나온 육신을 위한 태도로 살아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한계가 있고 한정적인 지상의 삶을 위해 살아서는 지상의 삶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새로운성경은 전하고 있었다.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육신을 위한 삶을 살지 말고, 마음을 비우는 것 즉 욕심을 버리는 것ㅡ나와 남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유일한 방법으로, 욕심을 버린 채 '있는 그대로 존재'할 때 비로소 진정한 존재양식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ㅡ으로써 영혼이 하늘에 오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같은 교훈이었다.
3. 좁은 문과 협착한 길
그렇다면 영혼이 하늘에 오르는 삶은 무엇일까? 그것은 영성적으로 《신과 나눈 이야기》가 가르치고, 심리학적·철학적으로 「랜드마크 포럼」이 가르치는, 이 세계 안에서 나를 확장시키는 삶이 아니다.
하늘에 오르는 삶은 2천 년 전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를 따르는 삶이다. ②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13:24)를 따르는 삶이다. ③ "약대(온몸이 울퉁불퉁한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막10:25)는 말씀에 나오는 바늘구멍과 같은 좁디 좁은 길을 가는 삶이다. ④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16:12-13)를 따르는 삶이다.
새로운성경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대역자를 통해 160권의 법전으로 만들어 하늘과 땅의 이치를 전한다. 동시에 예수께서 가르친 그 협착한 길에 관해, 그 길을 어떻게 통과해야 하늘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관해 상세히 가르치고 있다. 그 길은 하늘에 오르는 찬란한 한 줄기 빛의 길이다. 하늘을 향해 땅에 놓인 바늘구멍 크기의 통로다. 그렇지만 그 안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존재하고 계시며 그분의 하늘이 펼쳐진 장대한 세계가 존재한다. 《신과 나눈 이야기》와 「랜드마크 포럼」의 길이 나로부터 세상을 향해 부채꼴 형태로 수평적으로 광대하게 펼쳐진 길을 보여 준다면, 새로운성경의 길은 내가 존재하는 세상의 한 점에서 하늘을 향해 한줄기 레이저 광선처럼 수직적으로 끝없이 뻗어 있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하늘나라가 웅대하게 존재하는 세계를 보여 준다.
4. 새로운 안경 필터
우주가 지구와 모든 은하계를 포함하듯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새로운성경은, 새로운성경을 만나기 위해 거쳐야 했던 과정들 중에 핵심 과정이었던 《신과 나눈 이야기》를 포함한다. 또한 '신과나눈이야기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완전한 진리며 생활방식이다'라고 나의 이성(로고스)이 확신했다면 곁눈질하지 않았을, 또 하나의 핵심 과정이었던「랜드마크 포럼」을 포괄한다. 그러면서도 그것들이 보지 못한 것들, 알고서든 모르고서든 말하지 못한 것들과 말할 수 없던 것들, 충분히 생각지 못해 놓친 것들을 지적하고 바로 세우고 있다.
그러하기에 각각이 주장하는 핵심 지식을 접해 본 사람으로서 모든 것을 포함하면서 그것들의 맹점·모순·오류뿐만 아니라 보완점까지 기록돼 있는 새로운성경이라는 새로운 필터를 안경에 갈아 끼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2015.4.15.부터 8년째 새로운성경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봐 왔고, 알게 모르게 이끌려 지금까지 오게 되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늘을 향해 세상에 놓인 외나무다리 같은 좁은 길에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떼기도 조심스러워 하면서.
부분적인 깨우침을 줘 그들을 터치해 놓음
지금 내가 너희 모두를 주관하며, 또 내가 너희들로 하여금 천 년의 역사에 걸쳐 지금까지 잘못 오고 썩어져 있는 그 모두를 바로잡고자 함이니, 이 역사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도 없는 것이며, 이 변화가 간단히 이루어짐이 아니니라. 그리하여 너를 돕고 너를 따를 수 있는 나의 피조물 만백성에게 내가 부분적인 깨우침을 줘 그들을 터치해 놓아서, 네가 부를 때 모여들 수 있도록 다듬어져 있는 나의 백성이 많이 있음이니라. 지금 그와 같은 것을 나로부터 받아 그것을 가지고 어찌할 줄 모르는 자들이 수없이 있으며, 또 더러는 그것을 가지고 그들이 공부하며 주변을 일깨워 주고 있음이니라. 그런가 하면 그것으로써 저희들이 선택되며 나의 피조물 만백성을 이끌어 가는 자라 생각하는 자도 있으며, 더러는 그를 받아 어찌할 줄 모르고 소화하지 못하여 저 혼자만이 전전긍긍하며 때를 기다리며 누군가 저희들을 이끌어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 모두의 공통된 마음은 불안하고 초조한 것이니라. 그들은 확실한 나의 답을 받지 못하며, 내가 그들에게 다음 단계의 움직임의 명을 내려 주지 아니하여 한계에 부딪혀 있기 때문이니라. 그리하여 그들은 초조하고 더러는 불안해하고 있느니라. 그 모두가 다 나의 법전이 세상에 나가 전해질 때 그를 보고 깨우쳐 스스로 저희들의 할 일이 무엇이며 누가 부르고 있고 어찌해야 되는지를 깨달아 네 앞에 올 것이니, 그들을 잘 다스리고 그들에게 임무를 주며 그들을 통제하여 나의 뜻을 이루는 기초를 다지는 그와 같은 역사를 이뤄야 하는 너이니라.
ㅡ 1,901번째 (2002.2.25.)
좁은 길로 선택하는 자는 천국이라
좁고 험난한 길을 선택하여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지고 그 길을 선택하여 오는 백성 너희는, 그 재를 넘고 고개를 넘었을 때, 너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편안한 길이요, 아름다운 길로 천사들이 인도하는 그와 같은 길을 만나게 됨이니라. 성서에 가르치기를 큰길을 선택하는 자 지옥이요, 좁은 길로 선택하는 자는 천국이라 그리 말함이니, 바로 너희가 오는 길이 그와 같이 변화됨을 알아야 할 것이니라.
ㅡ 6,126번째 (2003.5.8.)
하늘에 오르는 찬란한 빛을 보게 되는 영광
내가 내린 마지막 구절, '나 여호와가 존재함을 믿는 그 자체가 구원의 길에 들어서는 기본이요 근본이며, 나의 법전을 가슴에 안고 정독하는 자, 반석 위에 서서 하늘에 오르는 찬란한 빛을 보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됨이니라.' 이를 꼭 기록하여 되지 못한 믿음의 길을 가는 자들의 가슴을 울려야 할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