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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기 Sep 12. 2015

천공 요새에 남긴 작은 발자국

아무도 걷지 않는 그 길을 걸으며


   한적하고 평화로운 시골 마을 보부와(Beauvoir)에서 몽생미셸로 가기 위해선 몇 분마다 운행하는 전용 셔틀버스를 타야 했다. 정류장에서 2km 남짓 떨어진 곳에서부터 걸어가고 있었던 우리는 우연히 큰 길 사이에 난 작은 오솔길을 발견했다. 그 오솔길은 집들의 지붕보다 약간 낮은 언덕을 향해 소박하게도 뻗어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 무엇이 있을지도 모르면서 정류장으로 향하는 큰 길이 아닌 그 작은 오솔길로 발길을 돌렸다. 오솔길은 곧이어 작은 언덕으로 우리를 데려갔고, 발길을 돌린 우리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던 것처럼 멋진 풍경을 선사해 주었다.

멀리 보이는 수도원과 강줄기를 따라 난 작은 산책로

 그곳은 몽생미셸로 향하는 작은 산책로였다. 관광객들은 아무도 없었다.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강줄기 옆으로 길게 난 산책로는 수도원의 위치로 그 끝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였다. 녹색의 풀들과 평원에 듬성듬성 꽂혀 있는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수도원은 마치 바다 위에 떠있는 활화산 같았다. 길을 걷다 보니 사람들이라고는 우리 옆을 빠르게 지나가는 자전거 라이딩족들과 현지의 노인들만이 전부였다. 나는 셔틀버스를 타러 갔으면 절대 보지 못했을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에 새삼 작은 기쁨을 느꼈다. 

반짝이는 태양이 비춘 강물 아래에 어색하게 앉아 있는 벤치에는 '이곳으로부터 1.8km. 몽생미셸'이 적혀 있었다.

  Bonjour. 수십 년 동안 수도원과 집 사이를 오가며 세월을 간직해왔을 노인들. 느릿느릿 걸어가는 노인들을 지나며 나는 그들에게 인사했다. 노인들의 느리고 병약한 발걸음에는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그들의 눈동자만큼은 시간을 잊은 듯 빛나기만 했다. 수도원을 바라보는 노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결같이 우뚝 서 있는 수도원을 보며 지난날을 회상하고, 세월과 시간의 무상함을 느꼈을까. 나도 종종 그런 걸 느끼곤 한다. 변하지 않거나 한결같은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면, 그와는 반대로 변하고 있는 내가 보인다. 



천공 요새에 남긴 작은 발자국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길도 어느새 우리를 종착지로 인도한다

 그 길은 너무도 멀어서, 수도원은 손에 도저히 잡히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주위의 고요한 풍경과 은빛과 회색빛이 뒤섞인 갯벌을 반짝이도록 비추는 태양과 같은 것들을 보며 들뜬 마음에 몸을 맡겼다. 태양은 따사롭게 내리쬐었고, 강바람과 바닷바람이 뒤섞여 흩날리는 바람의 냄새에 몸 담긴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어떠한 방해물도 없는 길에서 때로는 눈을 감기도 하고, 작은 스텝을 밟으며 춤을 추듯 걷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샌가 나는 내 머리 위에 있는 수도원을 올려다보았다.

이 길 옆에는 새벽까지 관광객들을 태운 셔틀버스가 부지런하게도 오가고 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작품 '천공의 성 라퓨타'의 배경이 된 몽생미셸

 대천사 미카엘의 명으로 지어졌다는 수도원 몽생미셸. 백 년 전쟁 당시에는 적의 공격을 막는 방어 요새로 쓰였다고 한다. 바위산 곳곳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이 쓰러지지 않는 천공 요새의 힘을 자랑하는 것만 같았다. 

몽생미셸은 생각보다 관광객이 많지 않았다. 아마도 몽생미셸은 당일치기 코스이기에, 야경만 보고 가는 사람이 많은가보다. 조금 늦게 도착해서인지 몽생미셸 안의 상점과 식당들은 몇몇 곳을 제외하고는 문을 닫은 상태였다. 

 나는 수도원에 발을 딛자 마치 시간 여행을 떠나온 것 같았다. 몽생미셸 수도원의 내부는 수 세기의 시간을 굳건하게 버텨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옛날 사람 체구에 비해 지금의 사람들에겐 좁디좁고 가파른 계단들, 그 오랜 시간 동안 쌓였거나 혹은 빗물에 씻겨 내려갔을 갈매기들의 하얀 흔적들, 그리고 사람들과 물건들과 간판들만 바뀌었을 뿐  오래전부터 있었을 그곳의 많은 식당들과 상점들은 모두 적막한 고요함 속에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성채 위에 올라가서 햇살을 받아 은은한 황톳빛으로 빛나는 갯벌과 그 위에 꽂혀 있는 부서진 배 한 척을 바라보았다. 오직 갈매기 몇 마리만이 창공을 가르며 날카롭게 울어대고 있었다.  

밤 11시가 지나자 지지 않을 것 같던 노르망디의 해가 지평선 아래로 숨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수도원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곧이어 영원히 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6월 하순 노르망디의 해가 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바위 같았던 몽생미셸 곳곳에 환한 조명이 빛나기 시작했다.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곡선의 강줄기는 지는 태양 아래에서 노을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사람들의 입가에는 붉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으며, 갯벌을 처음 본 것만 같은 금발 머리의 작은 꼬마 아이들은 약간 단단하게 굳은 갯벌 진흙을 구르고 뛰며 놀고 있었다. 이 곳에서 처음 만난 것만 같은 한 무리의 사람들은 노을 아래에서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는지 그들 각자의 여행담을 털어놓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해지는 풍경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수도원에 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늘은 밝은 푸른색으로 변했고, 어두운 바위들 사이에 감춰져 있던 진짜 수도원의 모습이 조명을 받아 반짝이기 시작했다. 뒤늦게 야경을 보러 셔틀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의 함성 소리와 함께 밤이 흘러가고 있었다. 사진 한 장으로 내가 느꼈던 복잡하고 많은 감정들을 표현할 수 없겠지만, 나는 이 사진을 보면  그때의 느낌들이 생생하다. 글로 다 적어낼 수 없는.













청보리밭길의 끝에서 


  다음 날, 다시 파리로 떠날 시간이다. 전날 아름다운 그 풍경을 뒤로 한 채 떠나야 한다는 게 못내 아쉬웠지만, 앞으로 다가올 여정들에 설레기도 했다. 호스텔 주인 할아버지의 따뜻한 아침 인사에 기분이 좋았다. 곧이어 할아버지께서는 아침 식사를 준비해 주셨다. 갓 구운 크로와상과 유자, 키위, 복숭아 등등 처음 먹어봤던 각종 잼들, 쿠키, 따뜻한 차 한잔까지. 여태껏 내가 먹어본 크로와상 중에 가장 맛있었고, 앞으로도 가장 맛있을 것이다. 기지개를 켜고 마당으로 나오니 고양이 한 마리가 현관 뜰에 앉아있었다. 할아버지께 이름을 여쭤 보니, 프랑스어로 '야옹이'라고 했다. 야옹 야옹 울어서 야옹이랜다. 

 우리는 호스텔 할아버지와 기념 사진을 한 장 찍고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한 뒤, 버스를 타러 집 밖으로 나왔다. 버스를 타기 위해선 큰 길을 쭉 따라 올라가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우연히 발견했던 작은 오솔길을 떠올리고 이제는 일부러 다른 길을 찾기 시작했다. 걷다 보니 어느새 몽생미셸이 훤히 보이는 언덕에 이르렀고,  그때부터는 어느 곳으로 가던지 몽생미셸 쪽으로 가면 정류장이 있겠구나 싶어 사진의 오른쪽 샛길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늑하고 따뜻했던 Chambres Les Salles.
넓게 펼쳐진 청보리밭으로 들어서는 길

 샛길의 끝은 넓은 청보리밭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몇 헥타르일지 감도 잡히지 않는 드넓은 평야에 심어진 청보리들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며 특유의 기분 좋은 마찰음을 내고 있었다. 이 길은 현지인들조차 농사를 지을 때 외에는 다니지 않는 것 같은 길이었다. 중간중간 자동차 몇 대가 지나갈 뿐, 걸어 다니는 사람이라곤 우리가 전부였다.  그저 저 멀리 보이는 수도원만을 이정표 삼아 앞으로 나아갔다.  양 옆에 청보리밭이 펼쳐진 아스팔트 포장 도로 위를 어느 정도 걸었을까. 버스 정류장으로 가기 위해선 인도도 없는 차도의 갓길으로 걸어야만 했다. 갓길을 걸으면서 지나쳐 간 수많은 자동차들과 그 안의 사람들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 몽생미셸과 보부와 마을에서 출발한 그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조그마한 확신이 들었다. 청보리밭길의 끝에서, 우리는 보부와 마을과 작별 아닌 재회의 약속을 했다. 

 Au revoir, Beauvo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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