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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기 Sep 19. 2015

경이로운 설산, 샤모니몽블랑에서-2

  더 이상 그 곳에 있을 수 없었다. 몰아치는 바람은 내 뺨을 사정없이 갈기고 있었고, 거친 호흡은 겨우겨우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있었다. '조금만 더 늙어서 여기 왔으면 정말 힘들었겠다.' 곧이어 이런 생각이 들었고, 새삼 뿌듯해졌다. 우리는 따뜻한 실내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에서는 에귀디미디 전망대를 건설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전망대가 어떻게 건설되었는지 그 구조를 설명하는 비디오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알프스를 등반했던 위대한 모험가들을 기리는 곳도 있었다. 곤돌라에 묶인 밧줄 한 개에 의지해 그 높은 곳에서 전망대를 건설하기 위해 피땀을 흘리며 죽어갔던 사람들이 새삼 경이로웠고, 그곳에 올라 눈 서린 전망대를 밟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어느새 케이블카 운행 종료 시간이 임박해왔고,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몽블랑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다시 한 번 이곳을 찾을 수 있을까? 에귀디미디 전망대에 다시 오를 수 있을까? 

친구 曰  \\"움직이는지 안 움직이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앞이 하나도 안보여서.\\"


  해발 3842m 위에서의 다사다난했던 반나절을 뒤로 하고, 우리는 작고 아담하지만 활기 넘쳤던 샤모니 시내로 들어섰다. 아직 먹구름이 채 걷히지 않아 시내 전체적으로 어둠이 낮게 깔려 있었지만, 사람들의 환한 미소와 그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니는 강아지들과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그 낮은 어둠을 잊은 채 밝기만 했다. 샤모니 시내에는 여느 프랑스 도시들이 그렇듯 관광객들이 넘쳐 났고, 젤라토 아이스크림과 샤모니 특산품을 파는 상점들로 북새통이었다. 하지만 파리 같은 대도시들과는 분명히 다른 따뜻하고도 소박한 무언가가 있었다. 우리는 슈퍼마켓에서 산 식료품으로 저녁을 해결하기로 하고 프랑스를 여행하며 아마 가장 많이 들렀을 카지노(Casino)에 들어갔다. 카지노는 프랑스 마트의 이름인데, 우리나라에도 한때 입점했던 까르푸와 비슷한 슈퍼마켓이라고 할 수 있다. 

신선한 채소와 꽃들, 식료품들이 즐비했던 카지노. 이름이 왜 카지노일까?


샤모니에서 만난 친구, 디오니시오


 우리는 20분을 한참 걸어 시내와 동떨어져 있는 호스텔에 도착했다. 샤워를 하고 옷가지를 정리하는데 어느새 룸메이트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Bonjour!" 반갑게 인사한 우리는 서로의 신상을 묻기 시작했다. "반가워. 우리는 한국에서 왔어. 프랑스 여행을 하고 있고 파리, 렌, 안시를 거쳐 샤모니에 도착했어. 아까 몽블랑에 올라갔는데 안개 때문에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더라. 하지만 재미있었어." 내가 말했다. "내 이름은 강기고 내 친구 이름은 희원이야. 네 이름은 뭐야?" 그가 말했다. "나도 반갑다. 내 이름은 디오니시오(Dionissio)야. 그냥 디오니라고 불러." 디오니시오? 내가 들어본 이름 중에 가장 특이한 이름이었지만,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나 해서 내가 물었다. "디오니시오? 혹시 디오니소스 말하는 거야?" 그가 놀라며 대답했다. "오, 어떻게 알았지? 그리스 신화의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를 본떠 만든 이름이야. 특이하지." 

 디오니는 우리보다 대여섯 살 많았고, 스페인 사람이지만 프랑스 파리에서 애플리케이션 개발자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내 친구가 잠깐 밖에 나간 사이에 디오니와 나는 엄청나게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짧은 휴가 동안 고산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샤모니에 왔다는 디오니는, 시종일관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이었고 그의 모험담은 듣는 사람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이번에 처음 해외여행을 온 거야. 배낭 하나만 메고.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그래도 너처럼 좋은 외국인들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게 제일 값진 경험인 것 같아." 내가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나는 한국 사람들하고는 처음 대화해 봐. 한국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는데 만나서 반가워. 이것저것 물어봐도 돼?" 그가 물었다. 나는 흔쾌히 알았다고 대답한 후, 한국의 역사나 문화 같은 것들에 대해 길게 얘기했다. 디오니도 스페인과 프랑스의 역사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파리에서 미처 겪지 못했던 인종 갈등과 같은 어두운 면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다. 전혀 알지 못했던 누군가와 이렇게 길게 대화한 것은 여행을 와서 처음 겪어본 일이었다. 디오니는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나에게 프랑스어 발음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프랑스어는 정말 배우기 어려운 언어인 것 같아. 예외도 많고. 자 봐봐. (스마트폰 화면을 가리키며) 이거 읽어봐. 여기에서 on 발음은  옹-이라고 발음하지만, 여기에선 아니야." 디오니는 이렇게도 정말 열정 넘치는 친구였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자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디오니는 다음 날 새벽 일찍 일어나 마라톤 대회를 위해 미리 코스를 달려보아야 한다고 했기에, 우리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디오니가 잠을 청할 수 있도록 불을 껐다. "나는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해서 너희들과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없을지도 몰라. 남은 여행 잘 하고, 나한테 이메일 좀 가르쳐줄래?" 그가 말했다. "물론이지. 내일 마라톤 꼭 일등하길 바라고, 한국에 돌아가서 꼭 메일 보낼게! Bonne nuit!" 내가 답한 후, 우리는 풀벌레 우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디오니와 나는 아직도 메일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다. 디오니는 우리에게 나중에 파리를 찾거나 스페인 여행을 하면 좋은 곳을 알려주겠다고 꼭 연락하라고 했다. 고마워! 


  이튿날, 우리는 너무나 재미있고 유익했던 샤모니에서의 시간을 뒤로 한 채 떠날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디오니는 이미 떠난 뒤였다. 지금쯤 고산지대에서 힘든 마라톤을 이겨내고 있으리라. "우리 기차 시간이 언제지?" 내가 물었다. "음... 1시인데, 왜?" 친구가 답했다. "우리 전망대 다시 올라갈래? 이대로 그냥 가기엔 너무 아쉽지 않아?"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는 몰라도, 어느새 우리의 발걸음은 에귀디미디 전망대로 향하고 있었다. 120유로. 거의 15만 원 돈이었기에 우리는 일주일 동안 슈퍼마켓에서 산 빵만 먹을 각오를 하며 다시 티켓을 끊었다. 제발...! 떨리는 마음으로 날씨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이미 호스텔에서 나올 때부터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에 안도했지만, 혹시나 산 정상에는 안개가 끼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맑음', '바람 0m/s' 우리는 환호했다. 맑은 날씨 때문인지 어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파가 케이블카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으로 케이블카에 탔다. 하늘은 너무도 맑았다. 구름은 단 한 점도 찾을 수 없었다. 저 멀리 몽블랑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치 몽블랑을 처음 올라가는 것처럼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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