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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류장 Oct 08. 2018

글 쓰는 마음

37번째 데일리 라이팅, 계속해서 쓴다

글쓰기의 목적은 살아남고 이겨내고 일어서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
- Stephen King


예그리나 시즌 2 프로젝트로, 사랑하는 친구 S와 함께 매일 뭔가를 쓰고 있다.

아직 수정을 거치느라 작가의 서랍에 남아있는 글도 있고, 

발행했다가 취소한 글도 있으며, 

미처 전체공개는 못하고 친구에게만 나눈 글도 있다.   

어쨌거나 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간에 멈추지 않고 쓰고 있다.




아주 아주 어릴 때부터, 생각을 써서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이 내게 어떤 재미를 주는 지를 알았다. 

읽는 일이 너무나 즐거웠기 때문에, 쓰기보다는 읽기에 지나치게 몰입해 있었지만.

글자를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종이가 보이면 일단 채웠다. 내 방 벽지가 온통 낙서로 가득 덮여도 엄마는 혼내지 않았다. 다섯 살 무렵부터의 일기장은 차곡차곡 쌓여 본가의 책장에 모셔져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매일 쓰는 일기장은 물론이고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기도수첩도 적기 시작했다. 

누가 쓰라고 한 것도 아니다. 아무도 내 글을 읽지 못하게 서랍 구석에 꽁꽁 숨겨가며 혼자 있을 때만 꺼내 적었다. 내 일기장을 모조리 펼쳐가며 "참잘했어요"를 휘갈겨쓰고 동글뱅이를 남겨 놓는 동생을 특히 피해야 했다!

수첩엔 매해 크리스마스에 내가 어떤 생각을 하며 한 해를 정리했으며 무엇을 기도했는 지가 기록되어 있다.  



삶이란 어느 한 사람이 살아온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그 과정 속에서 무엇을 기억하고,
기억을 어떻게 이야기하는가다.
- Gabriel Garcia Márquez



중학교에 올라와서부터는 블로그를 운영했다. 

친구들도 모두 블로그 하나쯤은 운영하고 있었고 우리는 매일 그곳에 온갖 잡담, 꽂혀있는 미드라던지, 좋아하는 가수라던지, 사랑하는 소설, 만화, 그림에 대하여 끊임없이 포스팅했다. 글이 올라오면 곧바로 댓글을 달았다. 거기에 또 답댓글을 달았다. 학교에서 매일 보면서도 서로의 블로그에 기나긴, 별 의미없는 안부메세지도 남겼다. 블로그에 쓰는 글은 내 친구들이 전부 볼 수 있었고, 그래서 기왕이면 재밌게 쓰고 싶었다. 한 줄을 쓰더라도 센스 넘치는 친구들처럼 되고 싶었다. 유행에 민감한 문체를 지니려고 조금씩 인터넷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학교에는 매일 도서관에서 만나는 친구들이 또 따로 있었다. 그들은 블로그를 하지 않았다. 대신 어른들이 쓸 것처럼 보이는 줄이 빼곡하고 플라스틱 표지가 달린 스프링노트를 들고 다녔다. 글씨도 무지하게 잘썼다. 마치 어른같이. 나는 노트를 들고 그 대열에도 합류했다. 친구의 노트를 동경하며 나도 노트에 오늘의 숙제에 대해, 읽었거나 읽을 책들에 대해 최대한 예쁜 글씨를 쓰고자 노력하며 적었다. 그렇게 도서관 문학칸 맨 꼭대기에 있는 책들까지 거의 다 읽었다. 우리는 도서관 사서 선생님과 가장 친한 학생들이었다. 십 수년이 지나 카톡이 일상이 된 지금도, 어쩌다 오는 연락이 들국화처럼 수수하고 향기로운 친구. 중학시절과 다름없이 틀린 맞춤법 하나 없고 유행어 하나 없는 반듯한 문장들이 깊은 마음을 정갈히 담아 전송되어 온다. 




블로그는 고등학교 때에도 이어졌다. 새 학교와 동아리 소식을 남기며 중학교 친구들과 교류했다. 

더이상 평일에, 학교에서 볼 수 없는 친구들을 주말에 카페에서 만나기 시작했다. 줄창 카라멜 마끼야또만 마시며 온갖 수다를 떨고도 모자라 통화도 또 한참을 했다. 학년이 올라가고 공부량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여유는 점점 더 사라져갔다. 블로그도 이사를 한차례했고, 공부하느라 책읽기에도 모자란 시간. 점점 급해졌다. 블로그는 한 달에 한 건의 글도 올라오지 않을 때가 많아졌다. 


매일 자습실에 박혀살며 공부가 무척이나 안될 때에는 노트에 아무 말이나 썼다. 

한 번은 친하게 지내던 S가 쉬는 시간에 내 자리로 놀러왔다. 글을 쓰던 나는 노트를 감췄고 그녀는 내가 쓴 <단상>을 낚아채 읽었다. 나는 그 장을 뜯어내 버리려 했으나 S는 종이를 가져갔다. 그때부터, 나의 새로운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S를 향한 편지글의 형식을 취하면서 수험과 당시 집안 상황 등 온갖 스트레스로 뒤덮인 내면을 털어낸 것이다. 친구들과 시시덕거리며 주고 받던 가벼운 편지들과는 사뭇 다른 글이었다. 우리는 매주 모의고사를 보느라 쌓여있던 노란빛 OMR카드의 뒷면을 자주 사용했다. 그 모든 편지와 쪽지는 우리 관계의 나이테가 되어 층층히 두껍고 단단한 나무로 자라났다. 법 없이도 반듯하게 살 것 같던 선도부 S, 따뜻한 마음을 보석처럼 지닌 S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도, 전부 글쓰기 덕분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언어 속에 새로운 언어를 발견하는 것이고,
우주의 한쪽 끝에서 또 다른 한쪽 끝으로
단어를 운반해 가는 과정을 창조하는 것이다.
쓴다는 것은 하나의 항해이자 여행이다.
_Gilles Deleuze



최근, 어릴 적 썼던 글들을 찾아보고 놀란 적이 있다. 중학시절 종교와 역사에 대해 써내려 간 영화감상문과 노조에 대한 신문사설을 오려붙이고 그에 대해 써내려간 생각들이었다. 한 달에 읽는 책이 몇 권 되지도 않는 지금하곤 비교도 안 될만큼 훨씬 더 많이, 자주 좋은 글들을 읽고, 내가 느낀 것을 딱 들어맞는 단어로 표현하고자 애쓰던 그때의 글들은 현재의 글에 비해 훨씬 더 잘 읽혔으며 깊이 있고 풍부한 생각들을 담고 있었다. 글을 읽으며 나는 내가 한발짝도 성장하지 못한 것만 같은 어떤 정체를 느꼈다. 어린 내가 부러워졌다.






이제 나는 씨앗을 심는 마음으로 현재를 기록하려고 한다.

오늘 다 적었더라도 내일은 싹을 틔워 또 한 뼘 자라있을 것이다. 

불과 며칠 전 써놓은 글을 보아도 전부 뜯어 고쳐 새로 적고 싶은 마음이 든다. 

생각이 고새 확장된 것이다.

글의 진정한 완성은 그 싹이 무럭무럭 자라나 아름드리 나무가 되고, 멋진 잎사귀를 드리워

그늘에 쉬러온 새들이 많을 때, 훌륭한 열매가 주렁주렁 달릴 때일 것이다.


그 날을 꿈꾸며

오늘은 일단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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