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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뮈앤끌로이 Jul 09. 2018

말괄량이 쌍둥이

3년전 쯤이었던 것 같다. 평일 비오는 날 저녁, 나는 영등포역에서 낯선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명동이 직장이었고 집은 강남쪽이었기에 퇴근 후 영등포를 들린다는 것은 꽤나 번거로운 동선이었는데, 그것도 오늘처럼 비가 많이 오는 밤, 귀찮음을 무릅쓰고 나를 움직이게 한 것은 바로, <말괄량이 쌍둥이>시리즈였다.

열살 무렵, 우연히 읽게된 <말괄량이 쌍둥이> 시리즈에 나는 그야말로 매료됐었다. 총 6권, 전 시리즈를 다 사서 자기전에 그날의 기분에 따라 바꿔가며 반복적으로 읽었다. 꿈에서라도 소설 속에 나오는 영국의 기숙사 생활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말괄량이 쌍둥이>는 영국 아동 문학가인 애니드 블라이튼 (Enid Blyton)이 쓴 작품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소위 ‘명랑소설’이라는 장르로 구분되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쌍둥이 자매, 패트리샤와 이자벨이 ‘세인트 클레어’ 라는 다소 엄격한 기숙사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어찌보면 여학생들의 성장소설 같은 느낌인데, 그렇다고 첫사랑 같은 풋풋한 에피소드는 전혀 없고, 친구들과의 우정, 그들과 나누는 특별한 추억에 집중하고 있다. 


이 책은 놀랍게도 무려 1941년도에 영국에서 출간되었는데, 작가가 소녀들의 마음을 잘 대변해서 스토리를 풀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시대에는 이런 이야기 자체가 흔하지 않아 독보적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전 세계에 40여개 언어로 번역되어 60 여개 나라에서 출판될 정도로 수많은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나저나, 틴에이저들이나 열광하며 읽는 소설을 다시 구하기 위해 굳이 비오는 밤, 영등포역까지 나서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어린 시절 내가 읽었던 버전의 <말괄량이 쌍둥이>시리즈를 출판했던 출판사가 당시 정식으로 판권을 계약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발매된 책을 그대로 번역한 후, 삽화도 일본판과 유사하게 그린, 소위 해적판을 판매했기 때문에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재출간을 하지 못하고 절판되버린 것이다. 번역 또한, 영어>일본어>한국어 순서로 번역되는 바람에 일부 세부적인 소개나 묘사가 생략되었다고 하는데, 오히려 그런 이유로 이 책은 지금에서는 더 구하기 어려운 귀하신 몸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같은 향수를 지닌 여자들이 많았는지 인터넷에서 그 책을 구하는 글들이 종종 올라왔고, 점점 그 가치가 올라 나는 몇 번의 실패 끝에, 그 책을 모두 소장하고 있다는 누군가로부터 20만원이라는 금액을 제시받았고, 아쉬운 마음에 잴 것도 없이 그 거래를 승낙했던 것이다. 


그렇게 어렵게 구한 책을 받아온 밤, 마치 오래 전에 연락이 끊겼던 친한 친구를 조우하는 것처럼 마음이 매우 들떴다. 집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찾아본 내용은, 기숙사 소녀들끼리 몰래 여는 ‘한밤중의 파티’편이었는데, 책에서 묘사된 진저에일의 맛이 너무 궁금해서 소설에 묘사된 표현을 근거로 그 맛을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던 열살 소녀의 나를 만날 수 있어 매우 반가운 기분이었다. 책을 구입한 20만원은, 그때의 그 소녀에게 지금의 내가 ‘한밤중의 파티’를 열어주는 비용이라 생각하니 전혀 아깝지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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