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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기 Sep 12. 2015

내 삶의 인기척, 여덟 번째 손가락은 여전히 아픈가요

할머니, 일흔 번째 생신을 축하해요 사랑에 그리움을 보탠 연심을 담아서


  1995년 5월 17일. 3.5kg의 여아로 경상북도 포항에서 태어났다. 평범하다 못해 진부한 내 유년 기록의 시작이다. 하지만 걸음도 채 떼지 못한 갓난쟁이를 지나 엄마의 품을 벗어난 무렵부터 꽤 그럴싸한 전개가 펼쳐진다. 외할머니, 당신의 등장으로 우리는 서로의 삶에 작은 별표를 그리고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세 살쯤 나는 상옥리라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두 시간 가량 오르면 나타나는 시골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아빠가 그 당시 군인이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여운 엄마가 복무 중인 아빠를 대신해 구멍난 생계를 메우셔야만 했고 어쩔 수 없이 7남매를 길러온 외할머니의 투박한 손을 더욱 거칠게 만들고야 마는 불효를 저지르셨다. 짐짝 같은 나를 맡김으로써.


 아직도 종종 떠오른다. 엄마가 화장실을 핑계 대며 밖으로 나간 뒤 한참 소식이 없었던 그 날의 오후를. 엄마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나는 엄마가 곧장 돌아오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 내가 좀 더 눈치가 느렸더라면 좋았을 텐데. 할머니는 태연히 나를 어르고 달랬지만 당신 또한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셨다. 저녁이 되자 전화벨이 울렸고, 나는 할머니에게 수화기를 건네 받고 한동안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할머니랑 잘 지내고 있어.

몇 밤만 자고 엄마가 데리러 갈게.」


낯설었다. 갑작스럽게 달라진 환경과, 앞으로 내 옆에 있어줄 사람이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이 당황스럽게만 느껴졌다. 왜?라는 의문을 가질 수조차 없을 만큼 어렸던 나는 그냥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잠들기 전, 잘 자라는 인사보다 할머니에게 항상 질문을 했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 엄마는 언제 와?”


선뜻 답할 수 없는 그 물음에 할머니는 어떤 심정이 되셨을지. 혹시 나처럼 매일같이 별이 아닌 밤을 세셨을지. 그러다 뜬 눈으로 새벽까지 지새우시며 잠든 나의 모습을 보고 베갯잇을 적셨을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 각자 독립해서 떠나버린 일곱 명의 자식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견디기도 충분히 삶이 벅찼을 텐데.. 너무 일찍 그리움을 알게 된 손녀의 마음까지 돌보셔야 했던 그 시절의 할머니는 되려 더 꿋꿋했다. 단 한 순간도 무너진 적 없으셨다.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된 삶을 살고 있을지라도 동이 트면 밭에 나가 희망의 씨앗을 심고 기적을 일궈내셨다. 그런 할머니를 따라 나도 천천히 시간에 순응하면서 엄마를 찾아 울고 불고 떼쓰는 날들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할머니 손에 나고 자란 아이처럼, 한적한 시골 풍경 속 일부로 숨어들었다.


  할머니가 농사를 짓고 계신 동안 나는 어르신들 앞에서 재롱을 떨며 과자, 아이스크림 따위를 얻어 먹었다. 동네에 아이가 잘 없던 터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찾아갔을 때도 나를 기억해주실 만큼 과분한 귀여움을 받다가도 집 안 벽지에다 사람인지 동물인지 모를 존재들을 그리며 혼자 1인 다역극을 즐겨했다. 앞서 말했듯 또래 친구를 만나기는 힘들었고 또래 강아지와 염소들만 무수했던 그곳에서 나는 끊임없이 무어라 재잘거리며 정적을 망쳐 놓았다. 그러다 간혹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할머니에게 시위라도 하는 마냥 요강이나 시계 같은 살림살이들을 깨부수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할머니를 기다렸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이면 나는 말썽 피운 것도 까맣게 잊고 할머니가 돌아오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언제나, 어김없이 돌아오셨는데도 말이다. 발갛게 그을린 얼굴을 하고선 집으로 돌아오실 게 분명한데도 오후가 깊어질 쯤이면 나는 불안을 못 이겨 앞마당을 서성이거나 할머니가 일하고 계신 밭으로 난 오솔길 위를 부리나케 뛰었다. 그러면 할머니를 조금 일찍 만날 수 있었다.


“아이구, 이 놈의 똥강아지야! 뭐하러 여기까지 왔어! 응?”


핀잔을 주시면서도 반가운 기색을 감추질 못하시던 할머니. 그렇게 하면 할머니의 미소가 그 어느 때 보다도 가장 환해서, 나는 할머니의 눈가를 자꾸만 예쁘게 접고 싶었다.


  그렇다. 굳이 뭐하러 내가 먼저 달려가지 않더라도, 할머니는 반드시 기다림의 시간은 끝이 난다는 교훈을 주셨다. 덩달아 그리움의 시간도 결국 기다림의 시간과 같다는 것을. 기다림을 잘 버텨냈듯, 그리움도 잘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영영 남겨진 슬픔은 몰랐다. 아빠가 돌아오고, 엄마가 날 데리러 오자 나는 주저 없이 할머니를 홀로 남겨두었다. 할머니는 그것이 당연한 당신의 역할인 양,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언제까지고, 작은 백미러 안에 덤덤히 갇혀 계셨다.


  내가 떠나고, 할머니는 한동안, 어쩌면 내 짐작보다 오랫동안 내가 엄마를 그리워했던 것처럼 나를 그리워하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린 손녀와 함께 지내던 그 시절만이라도 조금은 덜 외로우셨을까. 아니면 내가 할머니를 더 외롭게 만들었을까, 하는 죄책감이 지금의 나를 할머니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정말로 분명한 건, 내가 할머니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는 것. 그리하여 이 죄책감을 도저히 씻어낼 수가 없다는 것. 변명처럼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 당시 서너 살 배기에 불과한 참으로 어리고 어리석었던 나는 할머니가 있기 때문에 엄마, 아빠와 함께 지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할머니가 죽었으면 좋겠어.”


라는 끔찍한 말을 오래간만에 모인 가족들 앞에서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고 한다). 나의 기억에는 없었던 일인데 내가 중학생이던 때, 할머니께서 직접 그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약간의 원망과 섭섭함이 어려있는 목소리로. 나는 스스로를 책망했다. 십 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마음 한 켠에 담아두고 아파하셨을 할머니를 떠올리니 너무도 죄송스러워서, 더듬더듬 사과의 말도 제대로 건네질 못했다. 때로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면, 미안하다는 말도 쉽사리 꺼낼 수가 없다. 이렇듯 나는 어느 샌가 훌쩍 자라 제 생각밖엔 할 줄 모르는 무뚝뚝하고 못된 손녀가 되어있었다. 할머니와의 시간들을 추억하고, 할머니의 건강을 걱정하면서도 일 년에 전화 한 두통 걸어 적당히 안부만 여쭤보는 게 고작이니까. 왜 그 고작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나. 못 뵌지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내일 대외활동 일정이 잡혀있어 바쁘다는 이유로 오늘 칠순 잔치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할머니 덕분에 나는 기다림에 끄떡 않는 사람이 되었고 그리움도 잘 견딜 수 있는 씩씩한 사람이 되었기에.. 오히려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이런 나와는 정반대로 할머니의 마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야위어만 갔을까 봐 두려움에, 미안함에 그랬는지 어쨌는지.. 그러나, 할머니의 따뜻한 숨결이 내 유년기 대부분에 녹아있듯 할머니는 여전히 내 마음의 집, 가장 큰 공간에 함께 머무르고 계신다는 걸 꼭, 꼭 알려 드리고 싶다. 전하고 싶다, 솔직한 나의 진심을. 조만간 또박또박 커다란 글씨로 예전처럼 편지를 써서 보내드려야지.


 나를 믿어주시는 할머니. 못난 손녀, 그래도 내 새끼라 예뻐해 주시는 할머니.

    정말로 사랑하는 소중한 내 할머니.

 너무 늦지 않게 머물러 갈게요. 그러니 건강하게, 오래오래, 추억의 그 날들처럼 평화롭게, 행복하게


 같이 살아요, 우리.

 그 언젠가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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