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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기 Jan 13. 2019

자취방에 찾아온 무지개 손님

song for now : 헤르쯔 아날로그 - 무지개

   2019년 새해가 밝았고, 부산에 살게 된 지 햇수로 5년이 됐다. 그리고 나는 이제 스물다섯이 됐고, 기숙사에 들락날락했던 횟수까지 합하면 이사만 거의 8번 정도 하지 않았나 싶다. 원래는 고향집에 가서 살 계획이었는데, 역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 특히 나처럼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인간의 인생은 섣불리 장담할 수 있는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확신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나이, 스물다섯. 그래도 용기 내서 결심하고 도전해 볼 수 있는 나이, 스물다섯이라고 생각해서 취업보다 배움의 길을 택해 부산에 (아마) 1년 더 머물게 됐다. 스무 살 때 대학교 따라 처음 부산으로 내려와 낯선 풍경과 사람들 앞에서 허둥대기 바빴던 새내기가 이제 졸업도 앞두고 있다. 친구들과 끌어안고 엉엉 울며 부산에서 어떻게 살지? 푸념을 늘어놓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고향 집만큼이나, 어쩌면 고향 집보다 더 편안하고 익숙한 장소가 되어버린 부산. 부산은 살아볼수록 계속 머물고 싶은 매력적인 곳이다. 부산 내에서 안 가본 곳은 이제 손에 꼽을 정도인 데다 특별히 좋아하는 동네도 많이 생겼다.

  그중 내가 좋아하는 한 동네에서 2019년의 새 출발을 했다. 부모님과 동생들의 도움을 받아 짐을 날랐고, 고단함에 지쳐 잠들 법도 한데 이사 첫날 보낸 하룻밤은 낯선 환경 때문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집 뒤로 산이 있어서인지 웃풍이 들어 천장의 공기가 차가웠다. 나 혼자만의 온기로는 채울 수 없는 허전함. 추위까지 더해져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쓸쓸함이었다. 이사 오기 전, 학교 근처 셰어하우스에서 5명의 친구들과 집을 함께 썼다. 물론 방도 함께 쓰고. 같이 방을 쓰던 룸메가 일찍 퇴실한 후로 혼자 방에 있는 시간이 많았지만 그래도 늘 함께 있는 기분이 들 정도로 복닥복닥한 인기척으로 가득했던 셰어하우스에서 혼자 자취를 하게 되니, 내가 바랬던 일이었지만 먹먹했다. 그토록 원했던 고요함이 나를 짓누르는 것처럼 무력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이튿날엔 금방 그 느낌을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화장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빚어낸 일곱 빛깔의 무지개가, 주춤거리는 내 마음을 힘껏 일으켜 세웠다. 이사 첫날부터 짐을 정리하면서 우연히 발견했던 무지개. 내가 호들갑을 떨며 무지개를 가리키자 아빠도 이 방에 무지개가 드는 걸 보니 예감이 아주 좋다며 환하게 웃으셨다. 무지개를 보며 기뻐 웃는 아빠의 모습이 예뻤다. 우리 아빠는 웃는 모습이 참 예쁜 사람이다. 원래 착한 사람이긴 하지만 보기보다 마음도 많이 여린 사람이고. 무지개 못지않게 다채로운 사람이라는 걸, 나는 최근에 서서히 깨닫고 있다. 아빠와 사이가 갈수록 좋아지는 것도 5년 동안 이뤄낸 엄청난 변화다.

  아무튼 나는 해가 쨍쨍하게 뜨는 낮이면, 맹숭맹숭한 벽지 위로 칠해지는 무지개를 볼 수 있는 7평 남짓 될까 싶은 내 자취방이 단박에 좋아졌다. 무지개를 보면 괜스레 얼토당토 않은 의욕이 샘솟았고, 내 인생에도 무지개가 뜨지 않을까 하는 설렘에 심장이 발을 굴렀다. 금방이라도 무지개가 뜨기 위한 비가 내릴 것 같았다. 시원한 소나기라던가, 매서운 장대비라도 그 영롱한 빛깔을 볼 수만 있다면 흠뻑 맞아도 좋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눈물도 무지개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막연하지만 산뜻한 행복으로 가득찬 그 느낌이 그저 착각에 불과하고 예감에 지나지 않는대도 고작 하나의 무지개를 발견하고, "내 인생에 윤기가 흐른다"고 믿는, 내 순진함과 천진난만함이 위안이 됐다. 항상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지만 충족되지 않는 메마른 마음으로 삭막한 하루를 건너가고 있다고 생각했다가도, 고작 하나의 무지개에. 한 줌의 햇살에. 한 떼의 구름에. 한 줄의 시에. 진심이 담긴 한 마디에 기뻐할 수 있고, 위로받을 수 있고, 엉망으로 구겨졌던 마음이 곧장 펴지기도 하는 내가 참 여전해서 좋다.

  무지개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고 생각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결국엔 나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고 있었던 나의 이야기를 쓰게 됐다. 이제 더 이상 나는 내 이야기를 쓰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싶다. (사실 여전히 두렵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오래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나의 꿈을 소중히 하고 싶기에 나를 너무 지나치게 소중히 여기지 않기로 했다. 나(내 이야기를)를 막 다룰 것이다. 나를 막 전해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막 사랑해줄 것이다. 내가 내 사람들을 엄청 많이 사랑하는 만큼. 그동안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의 믿음을 믿고 살아왔지만, 올해는 오롯이 나를 믿고 살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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