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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기 Jan 01. 2022

2021년의 손을 놓고, 2022년의 손을 맞잡으며

2021년엔 내게 참 많은 변화가 있던 한 해였다. 일단 1년 동안 공부해온 에서 결실을 거뒀고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다. 낯선 곳에서 시작한 삶 속에 새로운 사람들이 등장했고 자연스럽게 나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보고 듣는 것들이 조금씩 달라지게 되었고 나도 조금씩 변해가는 부분들이 있었다. 변화를 순순히 받아들이면서도 내게 언제나 익숙하지만 놀라운 기쁨을 주는 것들을 찾아서 걷고 또 걸었다. 많은 생각에 잠겼고 그 생각 속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도 많았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진 만큼 나라는 사람을 아주 깊이 들여다보다가 질식할 것처럼 숨 막히는 고통을 느끼기도 했다. 새벽 늦게 창문을 타 넘고 들어온 가로등 불빛도 비껴간 캄캄한 천장을 보면서 숨죽여 울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엔 생각의 바다 위에 둥둥 떠서 한결 부드럽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유유히 흘러가는 날도 있었다. 어느 날은 세상이 참 잔인하고 너무한 것 같다 싶다가도 또 어느 날엔 인생이 아름다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동안 연체되고 분실된 행복을 모두 돌려받은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게 온갖 기쁨과 슬픔과 기대와 절망을 절절히 느껴가면서 하루하루에 충실했더니 한겨울 오후 다섯시 어스름이 내렸을 때 해가 넘어가듯 2021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어제, 그러니까 2021년 12월 31일에 일찍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저녁을 먹기 위해 이른 출근을 결심했다. 아침 7시에 일어나 7시 30분에 버스를 탔는데 버스를 타자마자 오늘의 분위기가 무언가 달리 느껴졌다. 단순히 평소보다 30분 더 일찍 버스에 탔기 때문이 아니었다. 2021년 마지막 날의 동이 터오는 풍경을 멀거니 눈에 담으면서 나는 그제서야 연말을 실감했다. 달력을 봐도, 한 살 더 나이를 먹는게 싫다는 푸념을 들어도 그닥 와닿지 않았던 연말이, 그리고 새해가 좀 더 빨리 가족들의 얼굴을 보겠다는 욕심으로 서둘러 시작한 아침 속에서 제대로 발견된 것이다. 묘한 기분이었다. 노래를 줄곧 들으면서 갔는데도 무슨 노래를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하루가 지난 지금 2022년 1월 1일 밤, 다시 곱씹어도 기억이 안나지만 살면서 처음 느껴본 그 생경한 기분만이 어렴풋이 남아 지금 이 글을 쓰게 하고 있다.


 오후에 갑작스런 일이 생겨 계속 시간을 확인하며 얼굴에 열이 몰릴 만큼 집중한 끝에 겨우겨우 5시 퇴근을 했던 그날. 같이 사무실을 쉐어하는 선생님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두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나도 덩달아 퇴근을 하며 직장 동료분들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며 인사를 전했다. 평소에 하지 않던 말로 인사를 나누니 헌 해와의 이별이 가깝게 느껴졌다. 그렇게 미적거리며 나오느라 코앞에서 타야 할 버스를 놓치고, 20분을 더 기다려 다시 돌아온 버스를 탔는데 별의 12월 32일이란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처음 듣는 노래도 아니고 이맘때쯤 질리도록 들려오던 노래였는데 왠지 모르게 가사의 깊이가 남달랐다. 연말을 실감하니 오늘 하루가 얼마나 애틋한, 우리가 부단히도 열심히 살아온 2021년의 숱한 날들 가운데 마지막으로 남은 단 하루라는 사실을 온종일 체감할 수 있었다. 내 앞에서 펼쳐지거나 혹은 스쳐지나가는 모든 장면들이 생생하게 다가와 어쩐지 뭉클한 기분이 되었다.


  시외버스를 타기 전에는 근처 편의점에 들러 괜스레 집에 가서 가족들과 함께 마실 와인을 한 병 샀다. 조촐한 축하를 하기 위해서, 연초부터 감당할 수 없고 믿기조차 힘들었던 일을 겪고도 희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열심히 살아남은, 축하받아 마땅한 우리 가족을 위해서 와인을 품에 안고 서둘러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내가 아무리 서둘러 걸음을 재촉해도 2021년의 마지막 날의 속도는 역시 더 빨랐다. 집에 도착하니 벌써 9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오늘이 다 가기 전에 멀리서는 차마 자세히 다 전할 수 없었던 쌓아둔 이야기를 쉴 새 없이 주고 받으며 그토록 바라던, 그토록 그립던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어느 덧 밤 11시가 되었고, 남은 1시간을 '도대체 무엇을 해야할까. 뭔가 뜻깊게 보내야 하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그저 동생들과 실없는 소리를 나누며 웃음을 터뜨리다 뿅!하고 새해를 맞이했다.


  그러고보니 2021년 첫날도 그렇게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로 얼렁뚱땅 새해를 맞았던 것 같다. 예상치 못한 시련에 엉거주춤하는 것 같다가도 그토록 바라던 일을 단숨에 이뤄내고 엉겁결에 행복해졌다. 물론 이루지 못한 것들이 더 많고 꿈꾸던 순간은 아직도 내게서 한참은 멀어보이지만 아쉬움은 없다. 후회도 없고, 미련도 없고 시원섭섭하지도 않다. 크리스마스 때 잠깐 들떴다가 다 내려놓은 채 어안이 벙벙한 연말을 보냈으나 2021년 마지막 날 느꼈던 그 기분은 잊지 않으려고 한다. 자연스레 시간이 등 떠밀듯, 혹은 순간이동을 하듯 훌쩍 뛰어 넘어온 2022년. 아직 아무것도 칠해지지 않은 새하얀 눈밭 같은 날들 앞에서 '그 위를 마구마구 헤집고 굴러도 끝이 없을 것처럼 숱하게 펼쳐져 있을 듯한 새 것 같은 날들이 결국엔 점점 바닥이 나 금세 애틋해지고 그리워질 거야.' 하고 먼 미래의 나에게 귀띔을 전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2년을 어떻게 잘 보내야 할지 구체적으로 짜놓은 세부적인 계획 같은 것은 없다. 원대한 포부도 없고 모두가 해보다 더 뜨거운 열망으로 두 손 모아 일출을 감상했다면 나는 그저 이불을 덮고 가만히 누워 새 날의 아침이 다가오고 있음을, 고요하게 밝아지는 사위를 두리번거렸을 뿐이다.


  2022년 1월 1일 오늘 보낸 하루처럼, 새해라고 해서 대단히 특별하지 않았던 가족들과 함께한 소소한 나들이처럼, 많은 날들이 그렇게 잔잔하게만 흘러갔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이 글에 살포시 띄워본다. 치밀하고 예리하게, 날카로운 눈으로 무언가를 겨냥하며 살기보다는 2021년보다는 좀 덜 숨가쁘게, 그러나 2021년처럼 일희일비를 반복하면서도 천진난만하게, 온갖 희노애락을 다 누리면서 '그래, 마음껏 울어(웃어)! 이건 내가 잘 살고 있다는 증거야.' 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한결같이 애정하는 것들을 챙겨가고 챙겨 할 수 있는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모두모두 노력한 만큼 경사스러운 날을 선물 받았으면 좋겠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랬으면 좋겠고, 또 얼떨결에 복된 일도 많이 만들 수 있기를 응원한다. 그래서 주위 사람에게도 내가 직접 지은 복을 나눌 수 있는, 유지혜 작가님의 소원처럼 코로나가 아닌 사랑이 유행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이렇게 계속 적고 보니 끝도 없다. 어쩌면 나 또한 올해를 향해 아주 커다란 열망을 품고 있는 것 같으니 오늘 밤 푹 자고 일어나서 1월 2일 중천에 떠있는 해라도 보면서 두 손 모아 빌어야겠다. 1월 3일, 1월 4일, 1월 5일.....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집을 나설 때마다 언제나처럼 하늘을 올려다 볼 것이다. 낮달과 마주치면 오늘은 분명 좋은 하루가 될거라고 어리석은 믿음을 간직하고 울창한 나무와 날아가는 새들을 눈으로 따라가며 그렇게 또 하루하루 매순간 진심으로 살아갈테니 얼렁뚱땅 이뤄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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