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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기 Jun 03. 2022

사려 깊은 밤

이제는 저문 시절의 인연이 되어버린 당신을 추앙하는 밤


  '추앙하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인생 드라마로 손꼽는 '나의 아저씨'  박해영 작가님의 신작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나서 결말까지  나온 드라마의 정주행 열차에 부랴부랴 올라탔다. 그리고  '추앙하다'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되고, 미정이가  씨에게 달려와 나를 추앙하라고 이야기하는 모습에 얼마나 울컥했던지.  씨는 처음엔 당황한  했지만 미정이의 물기 서린 외침  너머를 본다.  한번도 누군가로 인해 채워진  없는 마음의 밑바닥.  위로 찍혀있는 미정이의 희미한 발자국. 사람들 사이를 어설프게 서성이며 진짜 자신을 알아봐줄 사람을 기다려온, 홀로 배회하던 외로운 발자국을 올려다 본다. 미정이보다 더 진창인 삶 속에서 그저  다른 아침이 시작되었으니 마지 못해 살아가는  씨의   영혼에 미정이의   마음이 부딪혀 알게 모르게 서서히 둘은 공명했는지도 모르겠다. 미정이는  씨에게 봄이 오면 함께 다른 사람이 되어 있자고 말한다. 함께  눈부신 계절을 향해 가자고 말한다. 미정은  씨에게서 해방을 갈망하는 자신을 본다. 스쳐가는 사람들을 허투루 바라보지 않는 미정이는 얼마나 사려 깊은 캐릭터인지. 이제  8화를  보고, 8 끝에 미정이가  씨에게 어린 날의 당신에게 가서 옆에 앉아 있어주고 싶다는 말을   덩달아 위로 받았던  같다. 내가 일평생 누군가로부터 듣고 싶던 말을 드라마 주인공에게서 들었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미정이 다가와 곁에 앉았다. 나는 드디어 조금   있었다. 최근 2주간 너무너무 울고 싶었는데 드디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얼마 전 오래 만난 남자친구와 이별을 했다. 아주 사려깊은 이별이었다. 서로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짐을 덜어주려고 노력했던, 깊은 상처 하나 남기지 않으려고 웃으며 안녕을 말했던. 너무 좋은 사람이었고 아직도 사랑하는 사람이었지만 나는 차갑게 이별을 말했다. 나의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도 그는 끝까지 사려깊었다. 그래서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의 헤어짐이 슬프거나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는 나를 채워주던 사람이었고 나는 이별의 순간까지 가득 차 있는 사람으로 담담히 돌아섰다. 사실 5년의 연애 동안 울기도 많이 울었다. 우리는 너무 다른 사람이었고 나는 때로는 우리가 다른 게 좋았다가 또 어떤 날엔 너무너무 싫었다가 속상했다가 화가 났다가 모든 감정을 눈물로 표현하는 게 나의 주특기여서 그냥 많이 울었다. 그를 너무나 사랑해서, 행복해서 운 적도 많았고 어느 날은 그와의 다툼에, 사랑이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상황이 억울해서 가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참 많이 울었다. 어쩌면 헤어지고 겪어야 할 아픔을 그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모두 다 겪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새 나는 눈물을 양분 삼아 훌쩍 자라난 느티나무가 되어 있었다. 혼자가 되어도 묵묵히 버티고 설 수 있는 뿌리 깊은 나무. 튼튼한 나무. 마치 그가 처음부터 나무였던 것처럼.


  사랑으로 모든 걸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바보 둘은 무수히 그렁그렁한 날들을 보내다 끝내 마지막엔 웃으며 서로를 보내줄 수 있는 이별을 했다. 이별 후 흘릴 눈물까지 사귀는 동안 모두 흘리게 한 그는 이렇게나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결국 자기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들고, 이제는 너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것 같다는 잔인한 말에도 그 말이 듣기 좋다고, 그럼 자기 마음도 잘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던 끝까지 사려 깊은 사람. 나를 힘들게 하긴 싫다고, 붙잡을 염치가 없다며 순순히 나를 떠나보낸 그 사려 깊음 때문에 결국 우리는 아름다운 이별을 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사실 실감이 잘 안 난다. 헤어지기 전 마지막 데이트가 참 좋았었는데. 따뜻한 햇볕 아래서, 그의 미소가 여전히 귀여웠고 그날따라 새로 산 옷은 그와 참 잘 어울려서 예뻤고, 우리는 언제나처럼 길을 걷다 문득 서로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가 먼저 뜬금없이 말하면 내가 갑자기? 하고 되묻는 식으로. 해가 질 때쯤 그는 언제나처럼 나를 두고 내가 없는 집으로 돌아가기 싫다고 투정을 부렸다. 그 모습이 언제나처럼 짠하면서도, 금방 다음주 주말이 올 거라는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도 어쩐지 나는 그의 얼굴을 오래 보고 싶었다. 내가 탄 버스가 그가 탄 버스 뒤에 있을 때 우리의 버스가 나란히 달려서 서로에게 한번 더 인사를 할 수 있는 찰나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언젠가 그로 인해 울게 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주 오래 전부터 나는 이미 우리의 이별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실감이 안 난다기보다는 오래 이별을 연습해왔기 때문에, 상상해왔기 때문에, 예감이 실감을 앞질러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열렬히 사랑하고 일찍이 이별의 아픔을 상상하느라 지칠대로를 지쳐버린 나는 더 이상의 연습이 필요 없어진, 철저히 혼자가 된 지금에 이르러서야 홀가분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서 추앙받았던 것 같다. 그로 인해 사람을 믿고, 사랑을 믿고 다시 사랑을 할 수 있는 힘이 내게서 태어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실된 사랑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과거의 나와 아주 딴판이 된 나를 발견한다. 덕분에 나는 그와 내가 함께 지나온 아름다운 봄날의 풍경을 기억하며, 다시 새로 올 봄날의 풍경을 기대한다. 이 다음에 올 사랑에는 더더욱 최선을 다해서, 역시나 아쉬움이 없이, 미련도 없이 더 잘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하는 내 모습을 본다. 아주 멀리서 천천히, 느리게 펼쳐질 이야기가 될 것 같지만 또 한 번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의 하루와 그의 마음에 대해서 아무것도 전해들을 수 없는 지금도 나는 나를 향한 그의 추앙을 느낄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그를 떠나 온전히 나에게 쏟기로 한 오늘과 내일의 하루를 더더욱 소중하게 보낸다. 이런 삶의 태도가 나 또한 여전히 그를 추앙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제 그를 계속 사랑할 수 없으나 사랑보다 더 깊고 넉넉한 마음으로 그를 떠올린다. 그가 어디서 뭘 하는지 몰라도 그가 하고자 하고 이루고자 하는 모든 일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잘 되길 바란다. 내가 그를 떠올리며 나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듯 그도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고 씩씩하게 잘 살아가길 바란다. 행복하길 바란다. 이 기도는 아마 내가 살아있는 동안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한동안 그런 의문을 품고 지냈던 적이 있다. 그와 나의 사랑이 계속 세월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을 보고 주위 사람들이 결혼 얘기를 넌지시 꺼낼 때 나는 왜 꼭 사랑이 결혼으로 완성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사랑을 그저 사랑으로 매듭지을 수 없는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지금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랑은 추앙이 될 수 있다고. 사랑을 넘어서는, 사랑만큼이나 숭고한 감정도 있다고. 사랑을 남김없이 다 써버린 후 추앙으로 귀결된 이 사랑의 결말이 나는 퍽 마음에 든다. 어떻게든 사랑에 결말이 찾아온다면 특별했던 우리의 사랑과 어울리지 않는 뻔한 결말은 아니길 바랐으니까. 지치지 않고 계속 열심히 사랑한 나머지 행복하게 잘 살았더라는 해피엔딩이면 더 좋았겠지만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끔찍한 새드엔딩도 아니다. 추앙하는 마음이 있는 한 어쩌면 우리 사이엔 끝이란 없는지도 모르겠다. 헤어져도 헤어진 게 아닌 것처럼 그는 내 삶에 오랜 여운을 남길 것 같다. 여운과 같은 새로운 삶을 내게 준 그에게도 축복과 같은 새로운 삶이 열리기를 바란다. 우리는 들여다 볼수록 막막한 슬픔에 아득해지고 먹먹해지는 마음의 구멍이 아니라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절과 빛처럼 찬란한 계절을 나눠가졌던 거라고, 훗날 더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오로지 기쁨과 고마움만으로 서로를 추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때의 당신은 지금보다 덜 사려깊은 사람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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