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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륜휘 Feb 20. 2021

서로를 바라보는 눈

구구와 루니

  구구가 신문지로 머리를 때리고 있었다. 눈 비비고 재차 확인해도 구구는 자신의 머리를 신문지로 때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문제는 나무였다. 나무가 깽깽 소리를 지르니 구구는 신문지로 자학하며 나무를 위협하고 있던 거였다. 나무는 뱅그르르 좋다며 제자리를 한 바퀴 돌기를 반복했다. 그가 미친 줄 알았던 것은 기우였다. 그가 혹시라도 미치게 되더라도 나는 그의 곁에 있을 예정이다. 

  “오빠. 나도 해볼래.”

  아직 띠지도 풀지 않은 신문지를 머리로 가져간다. 이내 신문지를 거둬들이는 나였다. 어찌 감히 양반인 내가 그런 기이한 행위를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 마음 그저 귀엽게 쳐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음에 감사했다. 구구가 혹시라도 꽉 막힌 누군가를 만났다면, 신문지로 두들겨 맞아도 됐을 희한한 행동이었다. 나는 글을 쓰면서 구구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졌음을 인지했고 구구도 나를 보는 눈이 있지 않을까 궁금해졌다. 

  “구구. 내가 언제 제일 희한했어요?”

  “남자 취향을 말할 때 이상했어요. 보통 자기보다 나은 점을 찾아서 이상형으로 삼기 마련인데, 루니씨는 옛날에 나에게 ‘저보다 모자란 남자요.’라고 말했어요.” 

  맞다. 내가 예전 남자친구들을 만날 때 기준은 나보다 모자란 남자들을 만났다. 근데 살아보니 나보다 나은  남 성(性)은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남자는 모자라요.”

  구구는 말한다. 

  구구의 말에 따르면 원래 그렇다고 한다. 사실을 알아서 취향이 모자란 남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십대의 자존감이 바닥이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남자는 생각이 짧아요.”

  “여자도 그래요.”

  “남자는 판단을 잘못해요.”

  “여자도 그래요.”

  “몰라요.” 

  “쳇.”

  이런 대화를 하면 구구가 얼마나 오래된 사람인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논리보다 직감에 가까운 말을 명제인 것처럼 정리를 해버리니 말이다. 그는 삶 속에서 수많은 여자를 보았을 것이고 자신과 비교를 해봤을 것이다. 경험 속에서 습득한 그는 ‘남자는 여자보다 모자르다’는 명제를 만들었을 테고. 어느 날 알바에게 이상형을 물었더니, “저보다 모자란 남자요.”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 그는 무릎을 탁하고 쳤다. 그리고 신기하게 나를 보았다. 마치 자신의 반백년 생에 터득한 진리를 내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 있었으니 그랬을 것이다. 

  지금도 나는 나보다 모자란 구구와 연애중이다. 나보다 모자라지만 나보다 빛나는 구구이기도 하다. 구구와 내가 서로에게 매력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안 보이는 부분에 가깝다. 영적인 것이라고 하기엔 모호하고 영혼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볍다. 지금도 내 앞에 앉아서 휴대폰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구구가 예뻐 보인다. 남들이 있으나 없으나 트림을 크억- 뱉어내는 저 주둥아리도 귀엽다. 방구를 뀔 때는 슬쩍 눈치를 보고는 부우웅 끼는 것도 신기하다. 운전 중에 차를 피해 가래를 멀리 내뱉는 것도 진귀하다. 이게 영적인 것 혹은 영혼과 무슨 상관인지 모를 일이다. 구구는 아우라가 있다. 

오늘은 오늘의 시를 적는다.


*


말말말


새가 말한다 

난 새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없다

바퀴가 말한다

난 바퀴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없다

나무가 말한다

난 나무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없다

모래가 말한다

난 모래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없다

구구가 말한다

난 구구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없다

바람이 말한다 나뭇잎이 흔들리고 새가 지저귀고 모래가 날리고 구구는 노래를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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