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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Jan 01. 2024

빛과 명암

 빛은 사물의 형태를 드러내고 색을 만들어요. 빛은 또 그림자를 만들고, 명암으로 인해 사물의 굴곡과 입체감이 자연스럽게 드러나죠. 그래서 대상을 재현하려 한다면 명암 표현을 피해 가기 어려워요.  

오늘은 재현 수업에서 명암 표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해요. 
명암 관련해서 제가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몇 년 전, 옆 자리의 50대 영어 선생님이 저에게 하셨던 이야기입니다. 

"샘, 나는 12년 동안 미술 수업을 받았는데, 아직 명암이 안 보여요. 학교 다닐 때 미술 선생님은 자꾸 명암을 그리라고 그러시는데, 난 그게 안 보이는 거야. 지금도 난 그게 뭔지 몰라요. 그게 대체 뭐예요?"

 이 이야기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저는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어요. 명암은 그냥 눈앞에 있는 거 아닌가요? 누구에게나 훤히 보이는데 다만 방법을 잘 몰라서 표현을 못했던 것이 아니었나요? 명암을 본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그러면 아이들은 어땠을까요? 그 선생님처럼 우리 아이들도 명암이 보이지 않았던 걸까요? 명암이 보이지 않아서 명암을 표현하지 못했던 걸까요?

사실 우리 미술 교사들은 시각적으로 잘 훈련된 사람들이에요. 우리들은 '마치 그런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스킬도 많이 알고 있죠. 예를 들면 반사광이나 하이라이트, 명도 대비 같은 것들이요. 그 모든 것들은 우리 머릿속에 이미 들어 있어서 무엇을 그리든 눈 감고도 슥슥 그려낼 수 있어요. 그런데 만일, 만일 말이에요, 우리가 명암을 실제로 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혹시 '그렇게 보는 눈'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라면요? 우리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것이라면요? 

만일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명암을 표현하라고 요구하기 전에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갖도록 안내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어떻게?

그 선생님과의 대화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딱 떠오르는 게 있었어요. 명암의 단계 그림이요. 이 그림에서의 광원은 하나지만 현실에서는 사방에서 빛이 오고 있잖아요? 교과서에서 보여주는 명암은 연출된 것이었던 거예요! 
오, 이거구나. 연출된 명암. 이것만 해결하면 다 될 거야.

조소를 전공하는 후배에게 사과를 하나 주면서 석고 외형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걸로 여러 개의 석고 사과를 만들어서 모둠 별로 나눠줬죠. 석고 사과에 랜턴을 비추니 교과서의 구와 똑같은 명암이 생겼어요. 반사광도 아주 잘 보이더라고요. 그러나 그것뿐이었어요. 아이들은 사과 모양 그리랴, 선 그으랴 골몰한데 그 모습이 여전히 즐거워 보이지는 않는 거예요. 갑자기 현타가 왔어요. 구를 그리는 것이나 석고사과를 그리는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석고 사과는 그 길로 뒷 방 신세가 되었어요. 

작년에 남자고등학교로 근무지를 옮겼어요. 다문화 학교에서 외국아이들과 수업하다가 오랜만에 우리나라 아이들과 한국말로 수업을 하니 명암 생각이 났어요. 소묘수업에 다시 도전해 보기로 했죠. 이번에는 방법을 조금 바꿔보기로 했어요. 

라이트 아트할 때 썼던 랜턴을 조명으로 사용해서 손 그리기를 해봤어요. 모둠별로 모델을 한 명 정하고 랜턴으로 손을 비추면 나머지 학생들은 모델이 된 학생의 손에 나타난 빛의 변화를 그리는 거예요. 재료도 바꿔봤어요. 늘 쓰던 연필 대신 목탄과 콘테를 사용했어요. 연필을 사용하면 손가락이랑 손톱만 열심히 그리다가 정작 명암 표현은 시작도 못하고 수업이 끝나더라고요. 세부 묘사를 못하게 하고 싶었어요.

이제, 문제가 해결되었을까요? 아이들이 빛의 변화를 보게 되었으니 이제 명암을 멋~지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당연히 아니죠. 보는 것과 표현하는 것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 우리 모두 알고 있잖아요. 하지만 이 수업으로 수업의 방향을 찾을 수 있었어요.

손 그리기 수업은 친구 모습 그리기 수업으로 이어졌어요. 마찬가지로 형태보다는 빛의 변화에 집중하는 수업이에요. 재료는 파스텔을 썼고, 이때도 조명을 사용했어요. 라이트아트할 때 썼던 작은 랜턴이 아니라 좀 더 본격적인 조명기구를 구입했죠. (제가 수업 시간에 조명기구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해 볼까 해요.)

연필로 그린 친구 그리기와 파스텔로 그린 친구 그리기를 잠시 비교해 볼까요? 

한 친구가 이런 질문을 하더라고요.  

'샘, 그러니까, 그림자를 그리면 되는 거죠?'

한 대 맞은 것 같았어요. 명암은 결국 빛 때문에 생겨난 그림자인 거잖아요? 이 당연한 것을 저는 왜 여태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빛에 의해 생기는 밝고 어두운 구분이 명암'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왜 빛을 빼놓고 가르쳤던 걸까요? 왜 그림자 이야기는 안 했을까요? 뭘 그렇게 복잡하게 설명했던 것일까요? 

결국 제가 그동안 가르쳤던 것은 진짜 명암이 아니라 명암이라는 '개념' 아니었을까요?

명암 학습이 필요하다면 먼저 교사는 아이들이 그것을 볼 수 있게 수업을 계획해야 해요. 명암이 무엇인지 설명할 것이 아니라 대상에 빛을 비춰보면서 무엇이 달라지는지, 어떻게 달라지는지 느낄 수 있게 해야 해요. 명암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눈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빛과 그림자를 감각하고 표현해 본 이후의 결괏값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명암은 미술과 학습에서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무언가로 향하기 위한 일종의 도구 같은 것 아닐까요? 

표현주의 작가인 뭉크는 인간 내면의 어두운 면을 끄집어내기로 유명하죠. 그의 자화상에서 넘실거리는 그림자를 보고 있으면 그의 내면이 빠져나와 춤추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렘브란트는 빛을 이용해서 인물의 주목도를 높였고요. 빛이 있어서 그들의 그림은 더욱 드라마틱해 지죠. 아니, 정확히는 빛과 그림자로 인해 그들의 그림이 더욱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거죠.

글의 서두에서 저는 빛은 사물의 형태를 드러내고 색과 명암을 만든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그것만으로 충분할까요? 아니에요. 뭉크의 자화상에서 보듯 빛은 우리의 상상을 자극하고 새로운 감각의 세계로 안내해요. 빛과 그림자, 명암의 학습은 물리적인 현상이나 기계적인 학습이 아니라 그것들을 통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는 그것들이 우리를 어떤 감각과 정서로 이끄는가가 되어야 할 것 같아요. 

빛이 무엇인지 과학 지식으로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진실은 지식에 있지 않는 것 같아요. 명암이 무엇인지 말로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죠. 진짜 중요한 것은 글자와 글자 사이, 단단하게 보이는 문장 너머에 있어요. '너머'를 보게 하는 것, '그것'이 실재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알아채는 것, 그것이 미술 수업에서 체험의 힘 아닐까요?


* 이 글은 전국미술교과모임 밴드 월요칼럼으로 실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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