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고양이는 행복해보여
지금 TV에서 '걸어서 세계 속으로'란 프로에서 터키가 나오고 있다. 며칠 전 저기에서 빵을 무한 리필해 먹고 돌을 자잘하게 박은 길을 걸었었는데.. 느낌이 이상하다.
관광객들을 위한 마차들이 나오고 마부와 여행자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채찍이 없네요"
"채찍을 쓸 필요가 없어요. 말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고 내 친구들이죠."(2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였다)
이스탄불에 처음 도착했을 때 고양이랑 대형 견들이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눈이 마주치면 꼬리를 흔들며 엄청난 녀석들이 달려오고 고양이들은 부비적 거린다. 먹을 것을 주면 좋아하고 안 줘도 그만이다. 사랑이 넘치는 아이들이었다. 누구든지 우쭈쭈 부르면 고양이들은 쪼르르 다가가 목덜미를 내주며 긁어주는 손맛을 즐겼다. 따땃한 볕에 달구어진 대리석 바닥에 누워있기도 하고 작은 빵 노점상 옆에도 벤치 위에도 자유롭게 볕을 즐겼다. 터키 곳곳을 다니는 동안 만난 고양이들은 모두 한결같았다.
터키의 개들은 귀에 인식표가 달려있고 나라에서 관리를 한단다. 평화로웠고 건강해 보였다. 타우르스 산맥을 넘을 때 휴게소에 있던 검둥이는 인적이 드믄 곳에 살아서서 인지 갈비를 살짝 드러내며 말라있었다. 빵을 뜯어주자 잘 먹었다.
때로는 너무 몰려다녀 위험할 때도 있다는데 아이바릑의 개들은 밤에 몰려다니며 영역 싸움을 해서 예민한 나머지 사람을 공격하기도 한단다. 한국인 관광객이 새벽에 산책하다가 허벅다리를 물려 곧바로 귀국한 일이 있다며 겁을 주었지만 너무 피곤해서 새벽에 산책할 일은 없었다. 그리고 덩치가 산만한 녀석들이 때로 몰려와 살랑거리는데 무서워할 수가..
고양이들은 애교덩어리다. 유적지를 중심으로 다니다 보면 고양이들이 마법처럼 나타난다. 어느 구멍에서 나왔는지 쏙 튀어나와 몸단장을 하기도 하고, 원래 있었던 듯 대리석 인척 보호색을 뽐내기도 한다. 쉬린제에서는 만난 순대(회색 얼룩이)는 왼쪽 눈이 크게 다쳐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아마도 영역싸움을 하다가 다친 듯했는데 보이는 눈 쪽에 빵을 놓아두면 소심하게 행동했지만 잘 먹었다.
에페소에서 만난 고양이들은 경비 보는 분들이 밥을 챙겨주는 듯했다. 아저씨들이랑 놀기도 하고 관광객을 따라 걷기도 했다. 원형극장까지 온 삼순이(노란 얼룩이)는 우리 일행 아저씨의 넬라판타지아를 모두 듣고 자리를 떠났다. 태풍으로 인해 매서운 바람이 무서웠지만 무너져 내린 대리석 틈바구니에서 쑝쑝 귀여운 얼굴들이 갑자기 나타나 다른 기쁨을 주었다.
고양이에 대한 내 사랑이 폭발한 사건이 있었다. 마지막 날 이스탄불에서의 일정이 모두 취소되었다. 대체일정으로 터키가 사랑한 작가 '피에르 로티'가 매일 차를 마시며 시를 쓰고 경치를 즐겼다는 카페에 갔다. 모스크들이 실루엣을 뽐내며 보이는 이스탄불의 모습은 기가 막혔고 마지막 날의 우울함을 씻겨주듯 살짝 비가 내렸다. 따뜻한 사과차를 마시며 작가의 기를 받고자 끄적거리고 있는데 웬 녀석이 내 무릎 위로 뛰어올랐다.
!!!
도착하자마자 바로 인사했던 아이인데 점원이 탁자 위의 빗물을 닦으려고 밀어내자 자리를 옮기는가 싶더니 내 무릎 위로 뛰어 올라왔다. 당황한 나와는 다르게 대뜸 위치를 잡더니 편안하게 눈을 감는 것 아닌가. 이런 사랑스러운 녀석!
돌아갈 시간이어서 인중을 쓰다듬어 깨우고 번쩍 들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어슬렁거리다가 나무 밑으로 자리를 옮겨 잡았다. 낯선 사람인 나에게 와서 깜찍한 기억을 선물해주다니 고마웠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여행을 돌아보는데 몇 천 년 전의 유적이나 멋진 기암절벽, 눈부신 바다보다 길 동물들이 눈에 밟힌다.
집에 돌아와 동네를 둘러보니 여전히 길냥이들이 곳곳에 보인다. 우리 동네 고양이들은 아프고 지치고 슬퍼 보였다. 몇 년 사이로 밥을 챙겨주던 사람들이 떠나버려 배를 곪는 아이들이 많아졌고 싸움도 잦아졌다. 멸치 다시를 건져 네다섯이 모여있는 곳에 던져주었더니 으르렁거리던 소리가 싹 사라졌다. 어서 돈을 많이 벌어야지 사료 한 푸대 못사는 처지가 너무 미안했다. 못 먹고 뒤쳐진 나옹이(흰 바탕에 까만 얼룩이)에게 가까이 다가가니 쏜살같이 길 건너로 도망가버린다. 왜 우리 동네 길 동물들은 사람을 저렇게 경계할까.. 도와주려던 것뿐인데..
백 명이 잘해주어도 한 명의 실수가 상처를 만든다. 길 위의 동물들은 길에서 태어나기도 할 테지만 집에서 나와 길 위에서 살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상처가 있는 아이들은 대대손손 사람을 경계하고 꺼리도록 배우겠지. 터키에서 만난 길 동물들은 어떻게 유유하게 살고 있을까? '말은 내 친구'라던 마부가 작은 힌트를 던져주는 것 같다. 터키 사람들은 동물들을 모두 친구라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 모든 동물들이 사람에게 우호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위협을 하거나 미워해서 사이가 벌어지게 만드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렸다. 우리 동네 고양이들이(강아지들은 보이지 않는다.) 부르면 다가오는 날을 상상해본다.
터키의 길 동물들이 부럽다.
뱀발 하나.
길동물 길동물 부르니 '길동무'처럼 발음이 된다.
친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