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기사 Jul 30. 2017

베트남 스키부대

잘 생각해보면 고향은 몇 군데 더 있다.

오전 8시 30분.

지역별로 분류된 박스들을 싣고 2.5톤 아홉 대가 각 지점으로 나간다.


9시.

5톤 두 대가 들어온다.

김진수씨와 신형일씨가 각각 하역장과 도크에서 지게차로 입고 작업을 한다.

유병기씨가 비닐, 바인딩끈, 박스를 분리수거장에 버린다.


9시 30분.

권아저씨가 수레를 끌고 들어온다.

버려진 박스들을 모두 펴서 수레에 차곡차곡 쌓는다.

본인 성이 권씨라면서 '권아저씨'라 불러달라고 했다.


"아침부터 푹푹 찌네요. 냉수 좀 드시고 가세요."

"고맙습니다. 부장님."


권아저씨가 사무실에 들어와 냉수 한 컵을 들이킨다.


"요즘 불경기라 파지가  줄었어요. 아저씨한테 제가 괜히 미안하네요."

"여름이라서 그런 거겠. 여름엔 항상 그랬잖아요."

"그렇기도 하지만 거래처가 좀 줄었어요."


나이로 치면 아들뻘데도 여전히 존대를 한다.


10시.

권아저씨가 자신의 키보다 높게 파지가 쌓인 수레를 끌고 공장을 나선다.

'크악' 하고 목에 걸린 침을 으려 하지만 마른 침만 고인다.


10시 30분.

국밥집 안쪽에 이미 배달되어 있던 채소 박스를 주방으로 옮긴다.

메뉴는 국밥 한 가지뿐이므로 한 시간 정도 준비하면 충분하다.

식탁도 4인용 3개가 전부여서 준비할 것도 그리 많지 않다.


10시 50분.

동진동에서 온 권중사가 파지를 잔뜩 실은 수레를 국밥집 앞에 세운다.

사로 전역했다면서 본인을 '권중사'라 불러달라고 했다.

권중사가 '크악' 하고 목에 걸린 침을 으려 하지만 마른 침만 고인다.

국밥집에 들어와 냉수 한 컵을 들이킨다.


"고약한 노인네, 침 좀 뱉지 말라고 했잖아."

"이 할매가 마누라도 아니면서 맨날 침 뱉는 거 갖고 트집을 잡아? 나올 침도 다 말라서 안 나와."

"권중사 마누라가 침 뱉는 거 싫어서 먼저 갔다며."

"마누라 얘긴 하지 말랬지."

 

수 년째 똑같은 얘기로 실랑이를 한다.

냉수 컵을 내려놓자마자 길로 나서서 산더미 같은 수레를 끌고 간다.

권중사의 거뭇한 목덜미에 뜨거운 햇빛이 모래처럼 퍼진다.


11시 30분.

서진동에서 12년 정도 고물상을 했으니까 권형을 안 지도 그 정도 되었다.

두 살이 더 많아서 '권형'이라 부른다.

권형 나이 칠십쯤 지나더니 여러 군데 다닐 힘도 없고 여러 군데 돌아다녀봤자 이만한 양을 채우기 어렵다면서 동진동 식료품 공장에만 다닌다.

권형이 파지 실은 수레를 끌고 들어온다.


"권형, 오셨습니까? 쓸데없이 날씨가 좋습니다."

"박사장, 일하기 좋은 날씬데. 더운 것만 빼면."


저울에 수레를 올려놓고 무게를 잰 후 야적장에 파지를 쏟아낸다.


"17,500원요. 냉수 한 잔 드세요."

"고맙네. 박사장."


권형이 '크악' 하고 목에 걸린 침을 으려 하지만 구릿빛 땀방울만 바닥에 떨어진다.

생수기에서 냉수 한 컵을 받아서 들이킨다.

권형이 빈 수레를 끌고 고물상을 나선다.


오후 1시 30분.

아는 사이든 모르는 사이든 다닥다닥 붙어 앉아 국밥을 먹은 손님들이 얼추 빠져나간다.

국밥 한 그릇 3천 5백 원.

물가가 올라도 다른 식당 국밥 값의 절반 정도만 받아왔다.  

어차피 혼자만 먹고살면 되니까 3천 5백 원을 받아도 손해볼 건 없다.

서진동에서 온 권중사가 국밥집 앞에 빈 수레를 세운다.


"할매, 국밥 한 그릇 줘."

"할매라고 부르지 말랬지. 오늘은 굶고 싶어?"

"그러니까 국밥집 이름을 바꾸라구. 아주매 국밥이나 아가씨 국밥으로."

"올해까지만 하고 접을 거야."

"접는단 얘긴 벌써 10년 전부터 했잖아. 그러지 말구 정말 딱 1년만 더 하구 일흔일곱에 은퇴하자니까."

"또 그 소리."

"우리 인생 진짜 마지막 여행이 될 거라구."

"난 괜찮지만 권중사가 비행기에서 탈진할까봐 그게 걱정이야."


그릇 바닥이 보이도록 깨끗이 국밥을 비운 권중사가 빈 수레를 끌고 자동차 매연 찌든 길로 나서더니 동진동 쪽으로 간다.

몇 걸음 걷다가 멈춰 '크악' 하고 목에 걸린 침을 으려 하지만 마른 침만 고인다.

동진동 쪽으로는 서서히 내리막인 데다 빈 수레여서 권중사의 발걸음이 자못 가벼워 보인다.

권중사의 거뭇한 목덜미에 따가운 햇볕이 불꽃처럼 떨어진다.


2시.

5톤 두 대가 들어온다.

김진수씨와 신형일씨가 각각 하역장과 도크에서 지게차로 입고 작업을 한다.

유병기씨가 비닐, 바인딩끈, 박스를 분리수거장에 버린다.   


2시 30분.

권아저씨가 빈 수레를 끌고 들어온다.

그 사이에 또 배출된 박스들을 모두 펴서 수레에 차곡차곡 쌓는다.

단단하게 줄이 묶였는지 수레를 빙 돌아가며 줄을 잡아당본다.

흩어진 비닐과 바인딩끈을 모아서 분리수거장 안으로 던지고 주변에 떨어진 박스 자투리, 비닐 조각 같은 쓰레기를 쓸어 담는다.

분리수거장 주변이 깔끔해진다.

파지 가져가겠다는 분들이 심심찮게 찾아온다.

하지만 권아저씨에게 영업권을 드린 건 권아저씨가 분리수거장을 깔끔하게 정리해는 것도 큰 이유다.


"요즘에 목이 따끔거리고 기침이 더 많이 나네요."

"그러세요?" 

"부장님 어머니가 약사라고 했죠?"

"네. 어머니한테 여쭤보고 제가 약 좀 갖다드릴까요?"

"그러면 미안해서 안 되고, 약 이름만 알려주면 돼요."

"찻길을 하루 두 번씩이나 왔다갔다 하시니 매연을 많이 들이마셔서 그런 걸 텐데요."


3시.

냉수 한 컵을 마신 권아저씨가 공장을 나선다.

'크악' 하고 목에 걸린 침을 으려 하지만 마른 침만 고인다.


3시 50분.

동진동에서 온 권중사가 파지를 잔뜩 실은 수레를 국밥집 앞에 세운다.


"권중사, 파전 한 쪽 드셔. 막걸리도 한 잔 하구."

"할매가 나 먼저 보낼려구 또 술상을 차려놨구먼."

"어차피 몇 년 안 남았는데 뭘 마다해?"

"몇 년이라니? 베트남은 갔다 와야지."

"그럼 우리 단골 손님들 국밥은 누가 만들어주나?"

" …. 할매, 베트남 가서 국밥 장사 해볼까?"

"또 그 소리. 안 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그 사람들이 국밥을 먹겠어?"


23년을 같이 살던 남편이 세상 떠난 후에 30년을 혼자 살았다.

아무 말이나 던져도 흉이 되지 않을 인물이 권중사뿐이다.

나이까지 동갑이니까.

국밥집을 나선 권중사가 '크악' 하고 목에 걸린 침을 으려 하지만 마른 침만 고인다.

수레를 끌고 서진동 오르막길을 올라간다.

권중사의 거뭇한 목덜미에 날카로운 햇살이 유리 파편처럼 꽂힌다.


4시 30분.

저울 값에서 수레 무게를 빼야 하지만 권형에겐 지금까지 수레 무게를 뺀 적이 없다.

수레 무게를 파지 무게 값으로 치면 천 원 남짓 될 것이다.

매번 천몇 백 원을 더 쳐주는 셈이다.

형은 동진동 식료품 공장에서 여기까지 2km 정도의 거리를 한 시간 삼십 분 동안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온다.

빈 수레 값 더 받는 게 오져서 그런 것만은 아닐 거.


"권형, 이번 거는 16,800원입니다. 냉수 한 잔 하고 가요."

"그럼, 오늘도 3원은 넘겼으니까 내년에 베트남 여행 같이 가는 거야. 돈 잘 모으고 있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권형 근무하셨던 스키부대도 가봐야죠. 하하하."

"그 부대 지금은 없어졌을걸. 허허허."


권형이 빈 수레를 끌고 고물상을 나선다.

'크악' 하고 목에 걸린 침을 으려 하지만 구릿빛 땀방울만 바닥에 떨어진다.


우체국 뒤로 해가 넘어갔지만 아직도 볕이 뜨겁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