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놀PD Apr 15. 2021

구조주의가 뭔데요?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가끔씩 서문을 채 다 읽기도 전에 단박에 좋아져버리는 책이 있다. 서문을 읽는 순간, '오, 이 책 대박인데~!!' 하며 자세를 고쳐잡고 연필을 찾는다(줄 긋고 메모하며 읽으려고) 그런 책은 다 읽고, 줄 그은 부분을 한번 더 읽고, 그 부분을 베껴쓰고 나서도 완전히 내것이 되지 않은 느낌에 언젠가는 그 책에 관해 꼭 글을 써야지, 하고 결심하게 된다. 최근 나에게 가장 그랬던 책은,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라는 책이었다. 


이 책을 처음 읽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구조주의'라는 게 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읽고 난 후 '구조주의'에 관심이 생겼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입문서를 찾다가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의 6페이지부터 나는 미친듯이 줄을 긋기 시작했다. 이 문장이다. 



"좋은 입문서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전문가가 말해주지 않는 것을 다루며 앞으로 나아갑니다.(이를 거꾸로 하면 변변치 못한 입문서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겠지요. 초보자가 모두 알고 있는 것에서 출발해 전문가라면 누구나 말하는 것을 알기 쉬게 고쳐 써서 끝내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입문서와는 다르지요) 좋은 입문서는 먼저 첫머리에 '우리는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에 대해 묻습니다. '왜 우리가 지금까지 그것을 모른 채 살아왔는가?'를 묻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p.6-7)


그동안 변변치 못한 입문서를 수없이 파던 수많은 나날들이 떠올랐다. 단순히 쉬운 문장, 알기 쉬운 예, 단순화한 정리 등으로 뭉뚱그려 넘어가는 수많은 '입문서'들에 얼마나 많이 당해왔던가? 그러나 그는 '입문서'의 다른 덕목을 말한다. '우리는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그리고 "왜 우리가 지금까지 그것을 모른 채 살아왔는가?" 이것이야말로 입문서에서 꼭 이야기해야하는, 오직 입문서에서만 이야기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것에 대해 모르는 것일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모르는 이유는 대개 한 가지뿐입니다. 알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자기가 무엇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지라고 하면 단순히 지식의 결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알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한결같이 노력해온 결과가 바로 무지입니다."(p.7)


그래서 저자는 '대답할 수 없는 물음'과 '일반적인 해답이 없는 물음'을 제시하고, 모르는 것을 책으로 쓰기 위해, 조사해가면서 쓴다. '알기 쉽게'쓰기 위해 '간단하게' 쓰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어서 '빨리 진행시키는' 방법을 택한다. 그래서 이 책은 내용이 쉽진 않지만, 생각보다 쉽게 읽힌다. 무엇보다 전체 프레임을 보는 지도를 그려주기 때문이다. 




1장 구조주의 이전의 역사에서는 우리가 '편견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고,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편향되어 있음을 인식하게 한다. 이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곧 구조주의에 대해 인식한다는 것과 같다. 저자에 따르면 구조주의란 간단히 말해 "우리가 속해 있는 어떤 시대, 어떤 지역, 어떤 사회집단이 우리의 견해나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 "자기가 속한 사회집단이 수용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기'마련이고, 그 집단이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애초부터 우리의 시야에 들어올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예는 최근에 스터디를 하면서 계속해서 느끼고 있다. 예전에는 미디어에서 진실만 말하는 줄 알았는데(우리 부모님은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신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미디어에서 그들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만 취사선택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또한 '법'이란 것이 민주주의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적인 틀로서 만인에게 평등한 것이라고(평등해야 한다고)생각했는데, 실은 법 자체가 사회를 다루는 사람들의 실질적 편익을 위해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먹는 많은 음식이 미국의 다국적 농업생물공학기업의 작품이라는 것, '관습'과 '문화'라는 것이 불과 몇백년 동안 조금씩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 이런 것들을 알아가는 과정이 아마도 '사회집단이 선택적으로 보여주려고 하는 것들' 이면의 사실에 대해 조금더 알고 싶어지게 된 동기가 아니었을까.



구조주의의 세계를 잉태한 것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니체라고 한다. 흔히들 이 세 명이 현대를 열었다고 하던데 이 세 명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계급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생각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채로 생각한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p.43) 니체는 먼 태고의 낯선 곳에 사는 사람의 몸속으로 편안히 들어가 한계를 모르는 신체적인 상상력으로 증명된 지성만이 적절한 '자기인식'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통찰한 것입니다...니체는 동시대인이 '억측에 의한 판단'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고 단정합니다"(p. 48)


그들은 알아채버린거다. 우리가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거나,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욕망하는 것이 아님을. 마르크스는 생산과 노동, 거기에서 생겨나는 계급을 통해 자신을 알수 있다고 말하고, 프로이트는 '자기는 무언가를 의식화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니체는 '어떻게 해서 현대인은 이렇게 바보가 되었는가?'를 계보학적으로 풀어보이려 한다. 그리고 '구조주의'의 창시자 소쉬르가 등장한다. 소쉬르는 우리에게 이것을 알려준다. 



"소쉬르가 가르쳐준 것은 어떤 것의 성질이나 의미, 기능은 그 사물이 그것을 포함한 관계망, 또는 시스템 속에서 어떤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는가에 따라 차후에 결전된다는 것으로 사물 자체에 생득적이거나 본질적인 어떤 성질이나 의미가 내재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p.77)




이 책은 3장에서는 푸코 4장은 바르트 5장은 레비스트로스, 6장은 라캉에 대해 핵심을 짚어준다. '복잡한 것을 복잡하게' 설명했다는 그의 말처럼 결코 쉽게 이해되지는 않지만 그들의 수많은 저작을 다 읽을 수 없고 용어의 개념도 잘 모르고 헷갈리는 나같은 입문자에게는 그들이 어떤 문제에 천착했고, 왜 그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무엇인지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게다가 군더더기 없는 심플한 문장은 덤. 이 책의 모든 장은 40페이지를 넘지 않는데, 바르트 같은 경우는 뭔가 후다닥 넘어가는 느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틀을 확인하면서 세부를 보는 저자의 서술방식은, 그들이 생각하는 방식의 차이를 알게 도와준다는 점에라도 큰 점수를 주고 싶다. 이쯤에서 각 장별로 각 철학자들을 비교할 수 있는 간략한 사실들을 정리해놓는다. 



역사의 흐름이 '지금, 여기, 나'에 이른 것은 다양한 역사적 조건이 예정 조화적으로 종합된 결과라기보다 다양한 가능성이 배제되어 오히려 훌쭉해진 결과가 아닐까 하는 것이 푸코의 근원적인 물음이었습니다. 푸코는 그때까지의 역사가가 결코 제기하지 않았던 문제에서 출발합니다. 그것은 '이들 사건은 어떻게 말해져왔는가?'가 아니라 '이들 사건은 어떻게 말해지지 않았는가?'입니다. 왜 어떤 사건은 선택적으로 억압되고 비밀에 부쳐지고 은폐되었는가? 왜 어떤 사건은 기술되고 어떤 사건은 기술되지 않았는가?(p.92)


일상적인 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확고한 견해를 가진 인간으로 텍스트를 읽고 잇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텍스트 쪽이 우리를 '그 텍스트를 읽을 수 잇는 주체'로 형성합니다.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 이처럼 '얽힌'구조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비평의 기본원리로 제시한 것이 바르트가 텍스트 이론가로서 남긴 가장 큰 업적입니다.(p.137)



문화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중심적인 발상을 단호하게 물리칩니다. 인간이 사회구조를 만든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가 인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인간적 감정이나 합리적 판단을 바탕으로 사회구조를 만들어내느 것이 아닙니다. 사회구조는 우리의 인간적 감정이나 인간적 논리에 앞서서 이미 그곳에 있고, 오히려 그것이 우리가 지닌 감정의 형태나 논리의 문법을 차후에 구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득적인'자연스러움'이나 '합리성'에 기초해서 사회구조의 기원이나 의미를 찾으려고 해도 결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p.172)



라캉의 생각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인생에서 두 번의 큰 '사기술'을 경험하고서 '정상적인 어른'이 됩니다. 그 첫번째는 거울 단계에서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생각하느 것에 의해 '나'의 토대를 얻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오이디푸스 단계를 통해 자기의 무력함과 무능함을 '아버지'에 의한 위협적 개입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정상적인 어른' 또는 '인간'이란 이 두 번의 자기기만을 제대로 완수한 사람입니다.(p.213)



'들어가는 말'부터 나를 설레이게 했던 저자는 마지막 '나오는 말'에 이르기까지 잠시도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소개한 사상가들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그들의 최신 연구 동양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고 어려운 논문은 가급적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그 철학자들에 대해 이렇게 자신만의 언어로 논평한다. 



"요컨대 레비스트로스는 '우리 모두 사이좋게 살아요'라고 한 것이며, 바르트는 '언어 사용이 사람을 결정한다'라고 한 것이고, 라캉은 '어른이 되어라'라고 한 것이며, 푸코는 '나는 바보가 싫다'라고 했음을 알게 된 것이지요"(p.217)

이 책은 일본에서는 2002년도에 나오고, 우리나라에서는 2010년에 나왔다. 그런데 아직도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아마도, 어떤 사고 혹은 문제에 관하여 자신만의 관점과 논리와 언어로 파헤치고 설명하는 것. 그 문제에 관한 모든 지식을 말할수는 없겠지만 관점에 따라 한줄로 지식을 꿰어내는 것, 이런 책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리라. 그 말은 곧, 그 욕구를 충족시킬수 있는 책들이 아직 충분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사실 아직도 '구조주의'라는 게 어렵게 느껴진다. 하지만 적어도 그게 무엇인지는 느낌적인 느낌으로는, 알 것 같다. 이 느낌을 좀 더 명확히 표현하기 위해 더 알고 싶은 것들도 생겼다. 적어도 나의 무지가 '근면의 성과'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일지도.  


작가의 이전글 열린 사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