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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PD Apr 13. 2021

자신의 언어를 가진다는 것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읽고

<검은피부, 하얀가면>은 <정희진처럼 읽기>을 읽고 산 한 무더기의 책 가운데 첫번째로 읽은 책이다. 이 책의 저자 프란츠 파농은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자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서인도 제도의 한 섬인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났지만 청년시절부터 프랑스에서 공부를 시작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 나치에 대항해 프랑스인으로서 전쟁에 자원입대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뿌리깊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뿐. 그는 정신의학을 전공하고 정신과전문의로서 알제리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기도 한다. 여기까지 그의 소개만 읽었을 뿐인데도 나는 심장이 쿵쿵거렸다. 



그는 자신의 모국을 '프랑스'라 여겼다.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았고, 그 시스템에서 살았다. 그렇지만 백인들은 그를 흑인으로 여겼고, 흑인들은 그를 백인으로 취급했다. 그는 깨닫는다. 자신은 검은 피부를 지니고 있지만 하얀 가면을 쓰고 싶었다는 걸. 하지만 이런 흉내내기는 부질없는 짓일 뿐이라는 것을.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마음에 들 때 "네 피부색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한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네 피부색"때문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수많은 백인들에게 숱한 질문을 듣는다. "흑인도 철학자가 될 수 있나?", ""흑인들은 정말 신체능력이 뛰어나지?""흑인에게 그런 지적능력이 있다니, 당신은 나의 친구가 될 만하군." 백인들만 그럴까? 그의 주변의 흑인들 또한 이중적이긴 마찬가지다. 앤틸리스에 사는 흑인들은 불어 구사능력에 따라 백인화의 정도를 평가받는다. 그들은 잘 되지 않는 r발음을 연습하고, 거들먹거리며 특유의 발음을 구사한다. 흑인여자들은 흑인 남자들을 경멸하고 백인 남자에게 선택받길 원한다. 흑인 남자들은 자신이 백인으로 인정받는 욕망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은 백인 여성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간단명료하게 대답하자. 피부색 문제가 모든 신비의 핵심이다. 인간은 무엇을 원할까? 흑인은 무엇을 원할까? 유색인 동료들의 반발을 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흑인은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피부색'이라는 굴레, 그 순환론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고백컨대, 이 책의 단 한 장도 허투로 읽히지 않았다. 20대와 30대 중반까지 명예남성으로 살아왔고, 그게 좋은지 나쁜지도 모른채 그냥 그래야 하는줄 안채 살아왔고, 지금도 어느 면에서는 그들의 세계에서 인정받고자(편입하고자) 노력하는 나는, 나도 모르게 이 책에 나오는 '흑인'에 '여자'를 대입해 읽고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 



백인 문명과 유럽 문화문화는 흑인들에게 실존적 일탈을 강요해왔다. 나는 소위 흑인정신이란 백인의 전리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할 것이다. 17



자신의 문화적 기원의 피살과 매장 때문에 열등콤플렉스를 스스로 조장해 왔던 식민지 민중들은 문명국의 언어인 식민모국의 문화를 불현듯 직면하게 된다. 식민지인은 식민모국의 문화적 수준을 자신이 어느 정도 전유하고 있는가에 따라 밀림의 신분을 초월하기도 매몰되기도 한다. 식민지인은 자신의 흑인성이나 원시성의 폐기를 통해 백인화되는 존재인 것이다. 21



인종차별이란 한 인종이 다른 인종에 대해 갖는 근거 없는 증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또한 더 강력하고 부유한 인종이 자신듧돠 열등한 다른 인종에 대해 갖는 경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역으로 항상 핍박과 모역의 대상이 되어 왔던 인종들이 그 가해자를 대상으로 갖는 신랄한 분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피부색은 한 ㅇ니종이 지닌 가장 투명한 외형적 특성 중 하나이다. 따라서 그것이 한 인조으이 사회적 교육적 수준에 관계없이 인조으이 가치를 재단하는 기준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좀더 백ㅇ니에 가까운 피부색이 인종들이 흑인에 가까운 피부색으 인종들을 무시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흑인에 가까운 피부색의 인종들이 그들에게 부여된 열등한 위치를 더이상 아무런 저항없이 수용하기는 힘들다. 160..



그러면서 어느 순간, 깨닫게되는 거다. 아, 나는 이제까지 전형적인 식민지 담론 속에 살고 있었구나.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제도 속에서 관습속에서 심리 속에서 살아왔구나. 그들 세계의 언어와 세계관 뿐 아니라 프레임까지 모두 내 것인줄 알았구나. 제대로 못하면 '여자라서 그런다'라는 말을 들을까봐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일찍 들어가면 혹시나 '집에서 애나 보지 일하러 나왔다'라는 말 들을까봐 자진해서 야근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니 왜 눈물이 나려고 하지 ㅠ.ㅠ  




모든 사회는 제작긱 자신의 독특한 카타르시스를 필요로 한다. 타잔 이야기나 열두살 탐험가들의 무용담, 미키마우스의 모험 등과 같은 "만화책"들도 사실 모두 집단적 공격성을 해소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마찬가지로 이런 백인 꼬마들을 위해서 백인 어른들이 마련한 잡지들도 많다. 문제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다른 식민지도 마찬가지지만 앙틸레스에서 발간되는 이와 유사한 잡지들도 앙틸레스 지역 아이들에게 매우 잘 팔린다. 그 잡지들을 보면 늑대, 악마, 악령, 악당, 야만인은 모두 흑인이나 인디언으로 나타난다. 승리한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화하려는 심리 때문에 흑인 꼬마들은 백인 꼬마들과 마찬가지로 탐험가가 되기도 하고, 모험가가 되기도 하며, "무시무시한 흑인에게 잡혀 먹힐 위험을 무릅쓰는" 선교사가 되기도 한다. 202



"무시무시한 흑인에게 잡혀먹힐 위험을 무릅쓰는 선교사"를 꿈꾸는 흑인들, "여자를 샘물이라 생각하고 온 몸이 녹신녹신하게 마셔버리면 그만이고, 혼자 자는 여자는 범해주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는 조르바를 꿈꾸는 여자들. 일상과 사랑은 진정한 삶과 예술의 세계에 비하면 하찮고 작은 것이기에 그것들에 연연하는 것은 속물이고 남자 발목을 잡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남자. 그런 그가 선택한 것이 결국은 타히티의 숲속에서 몇십년이나 어린 여자애인 아타를 아내로, 말이 좋아 아내지 하인이자 식모로 부려먹으면서 자신만의 예술혼을 불태우는 남자, 그를 욕망하는 여자들. 그녀들이 이상해보이는 것은 내가 너무 예민해서 그러는 것인가? 


이 책의 첫 부분은 '언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1장에서 내가 다루려는 문제는 바로 앤틸리스에 사는 흑인들이 불어 구사능력에 따라 백인화의 정도를 평가받는다는 사실이다. 불어 구사능력에 따라 인간을 평가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것이 존재를 대하는 인간의 다양한 태도 중 하나라는 사실을 잘 안다. 언어를 소유한 인간은 그 언어가 현상하고 내포하는 세계를 궁극적으로 소유한다. 이러한 인식을 통해서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소박한 진실은 "언어를 정복하면 말할 수 없는 힘을 선사받게 된다"는 사실이다. 21


자기의 언어가 없다는 것, 자신을 설명할 말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페미니즘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그들의 언어로 말하게 하라"이다. 근데 자신의 언어로 말하려하면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너가 말하는 게 너의 언어 아니냐고. 여기서 정체성, 위치성의 개념이 필요하다. 


여자들은 남자들의 언어를 내재화한다. "우리 오빠가 그건 아니래요""페미니즘이 아닌 양성평등이 중요한 거 아닌가요?""같이 일하는데 출산휴가는 민폐 아닌가요?"조르바처럼 절대적인 자유를 갖고 싶어요.""스트릭랜드처럼 진정한 예술을 위해서라면 사소한 일상다반사 같은 것은 좀 이해해줘야 하지 않나요?"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언어를 내재화한다.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요." 흑인들은 백인들의 언어를 내재화한다. "못 배운 흑인들이 문제예요." 


이것은 자신들의 위치를 알지 못하고 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정확한 위치를 안다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다. 위치는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위치성을 안다는 것은 타인과 나의 스텐스를 굽어보면서 그 스텐스의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가늠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미 주체에 의해 (백인, 남자들에 의해) 타자화, 대상화된 사람은 결코 자신의 위치를 알지 못한다. (그의 위치는 오직 백인, 남자들에 의해 자리매김될 뿐이므로) 정희진의 말마따라 인류의 반이 여자인데, 그들이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안다면 이처럼 남녀차별이 공고한 현실이 가능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정체성과 위치성을 자각하면서 나의 언어로 말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이 책의 마지막 문장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육체여, 나로 하여금 항상 질문을 던지는 인간이 되게 하소서." 파농은 결국, 흑인인 자신의 피부색 때문에 그리 괴로우면서도, 그 괴로움을 인식론적 자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책을 27살에 냈다니, 인간의 지혜란 나이와 비례해서 쌓이는 것이 아님을 또한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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