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기 다른 세대의 기억 방법들

by NAHDAN

4부

세대, 공간, 감성의 구조들



1. 각기 다른 세대의 기억 방법들



세대별 기억의 지도


레트로는 개인의 취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대의 감정 구조를 반영하는 문화적 언어다. 기억은 각 세대가 경험한 역사와 감정의 차이를 고스란히 품고 있으며, 그것은 동일한 사물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기성세대는 레트로를 '실제 있었던 기억'으로 대하지만, 젊은 세대는 그것을 '놀이화된 이미지'로 소비한다. 이 장에서는 각 세대가 레트로를 어떻게 감정적으로 구성하고 기억하는지를 탐구한다.


세대 연구의 선구자 칼 만하임(Karl Mannheim)은 일찍이 "동일한 역사적 사건이라도 각 세대가 경험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고 지적했다. 이는 레트로 문화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아날로그 전화기, 비디오테이프, 브라운관 TV와 같은 물건들은 한 세대에게는 일상의 필수품이었지만, 다른 세대에게는 이국적 오브제이며, 또 다른 세대에게는 완전히 낯선 고고학적 유물이다. 이처럼 동일한 물건이 세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체계와 감정 구조 속에 위치한다.


문화사회학자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는 이를 "감정 구조(structure of feeling)"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각 세대는 특정 시대의 경험과 인식을 바탕으로 고유한 감정적 반응 방식과 해석 체계를 형성한다. 이는 명시적으로 표현되는 이데올로기나 가치관보다 더 깊은 층위에서 작동하는 '느낌의 문법'이다. 레트로 문화에서 세대 간 차이가 첨예하게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 감정 구조의 차이 때문이다.


미디어 리터러시는 다양한 미디어에 접근하고, 정보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며, 창의적으로 생산하고 윤리적으로 소통하는 능력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필수적인 역량이다.


21세기의 레트로 현상은 이러한 세대 간 감정 구조의 차이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과거의 이미지와 음성, 영상이 끊임없이 아카이브되고 재생산되면서, 특정 시대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들도 그 시대의 문화적 코드와 미학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경험되지 않은 향수(non-experienced nostalgia)"라는 독특한 감정적 현상을 낳았다. 자신이 살지 않았던 시대에 대한 노스탤지어, 자신의 기억이 아닌 집단적 아카이브에서 추출된 이미지를 통한 감정적 반응은 현대 레트로 문화의 핵심적 특징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대 사회의 세대별 기억은 단순한 연령 차이를 넘어, 기술환경·미디어 리터러시·문화자본의 차이에 따른 복합적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베이비부머·X세대·밀레니얼 세대·Z세대·알파세대는 각각 다른 역사적 사건, 기술적 환경, 미디어 경험을 바탕으로 고유한 기억의 문법과 감정 구조를 발전시켜 왔다. 레트로 문화는 이러한 세대별 감정 구조의 차이와 접점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문화적 현상이다.





기성세대의 실존적 기억 : 체험된 과거의 무게


기성세대, 특히 베이비붐 세대와 X세대는 레트로를 실존 기억의 재현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다방의 커피잔, 트랜지스터 라디오, 손글씨 편지는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라, 과거의 감정이 깃든 '살아있는 물건'이다. 그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은 레트로를 통해 잊고 있던 감정을 회복하거나, 사라진 세계에 대한 감정적 위로를 받는다. 이들의 레트로는 회상과 애도의 감정이 교차하는 복합적 서사다.


기성세대에게 레트로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살아낸 시간'의 회고다. 베이비붐 세대와 X세대는 과거를 기억하는 데 있어 실존적 무게감을 지닌다. 그들에게 과거는 기록이나 이미지가 아니라, 체험과 감각, 감정이 뒤엉킨 현실이다. 전쟁의 잔재, 산업화의 속도, 민주화의 고통, 아날로그 기기의 질감은 모두 그들의 몸에 새겨진 '감정의 증거'다.


이 세대에게 레트로는 생존의 흔적이며, 감정의 복원이다. 그들이 오래된 사진을 꺼내 보거나, 낡은 가게 간판을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그때의 냄새와 소리, 공기의 밀도까지를 동반한 '감정의 복귀'다. 그 기억은 해석 이전의 경험이며, 과거를 지금으로 다시 끌고 오는 통로다.


베이비붐 세대(1946-1964년생)에게 있어 레트로는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애도'의 성격이 강하다. 이들은 급격한 사회 변화와 기술 발전을 목격했고, 자신들의 청년기를 형성했던 물질적·문화적 환경이 거의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 문화인류학자 아릴라 로스(Arjun Appadurai)에 따르면, 이러한 급격한 변화는 "문화적 단절(cultural rupture)"을 초래하며, 이는 개인의 정체성과 연속성에 위협이 된다. 레트로 문화는 이러한 단절을 치유하고, 개인의 생애사적 연속성을 회복하려는 문화적 실천이다.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에게 특히 의미 있는 레트로 아이템으로는 흑백 TV, 선풍기, 다방의 커피잔, 손편지, 교복과 같은 일상 용품들이 있다. 이들 물건은 단순한 향수의 대상이 아니라, 근대화와 산업화라는 국가적 서사 속에서 자신의 개인사를 확인하는 '기억의 닻'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 1997년 IMF 위기와 같은 국가적 사건들은 이들의 개인적 경험과 긴밀히 연결되어, 집단적 기억과 개인적 정체성을 동시에 구성한다.


한국의복고.jpg 반세기 밖에 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한국의 복고, 추억과 향수의 콘텐츠 역시 한국적 압축의 결과물이다.


X세대(1965-1980년생)의 경우,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에 서 있다는 독특한 역사적 위치가 이들의 레트로 감성을 형성한다. 이들은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워크맨, VHS 비디오테이프, 초기 컴퓨터와 같은 아날로그-디지털 과도기 기술을 경험했고, 이러한 경험은 이들에게 특별한 '기술적 노스탤지어(technological nostalgia)'를 형성했다. 미디어 연구자 캐롤린 마빈(Carolyn Marvin)은 이를 "기술적 경계인(technological liminals)"의 경험이라고 설명한다. 두 세계 사이에 놓인 이들은 과거 기술에 대한 향수와 함께, 그 기술이 가졌던 '불완전함의 미학'을 특별히 가치 있게 여긴다.


한국의 X세대에게는 PC통신, 삐삐(무선호출기), 공중전화, 비디오방, 문방구와 같은 1980-90년대의 문화적 아이콘들이 중요한 레트로 요소다. 이들 물건과 공간은 민주화 운동, 대학 문화, 초기 대중문화의 폭발적 성장과 같은 사회적 변화와 결합되어, 세대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감정적 표지가 된다. 특히 X세대는 한국 사회의 압축적 근대화를 청소년·청년기에 직접 체험했기에, 급격한 변화 속에서의 '감정적 연속성 찾기'가 이들의 레트로 문화에 중요한 동기로 작용한다.


기성세대의 레트로 소비는 단순한 과거 회귀가 아니라, 자신의 생애사를 재구성하고 의미화하는 복합적 과정이다. 사회학자 프레드 데이비스(Fred Davis)는 이를 "반성적 노스탤지어(reflective nostalgia)"라고 부르며, 단순히 과거를 이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의 비교 속에서 과거를 재평가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기성세대가 레트로 카페에서 옛 음악을 들으며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향수를 넘어, 자신의 인생 여정에 대한 성찰과 의미 부여의 과정이다.


실존적 기억에 기반한 기성세대의 레트로 경험에는 '상실에 대한 애도'가 중심에 있다. 철학자 스베틀라나 보임(Svetlana Boym)은 노스탤지어를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그리고 어쩌면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었던 것에 대한 갈망"이라고 정의했다. 기성세대에게 레트로는 단순히 '옛 것'을 향한 그리움이 아니라, 시간의 불가역성에 대한 인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을 통해 과거와 연결되고자 하는 인간의 근본적 욕구를 반영한다.




MZ세대의 유희적 전유 : 이미지화된 과거의 재해석


반면 MZ세대는 레트로를 유희화된 방식으로 소비한다. 필름카메라, LP플레이어, 타자기, 브라운관 TV 등은 실제 경험이라기보다 '놀이 가능한 과거의 장치'로서 선택된다. 이들에게 레트로는 정통성이 아니라 스타일이며, 향수가 아니라 콘텐츠다. 과거를 '살아보지 않았지만 흉내낼 수 있는 것', '진짜가 아니어도 즐길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감정의 가상화, 기억의 시뮬레이션이라는 새로운 감정 구조를 만들어낸다.


MZ세대에게 레트로는 놀이의 언어다. 이들은 레트로를 소비하면서도 그 과거를 살았던 적이 없다. 그들에게 레트로는 체험이 아닌 상상이며, 의미보다는 분위기, 사실보다는 스타일이 중요하다. 이는 과거에 대한 해석을 '유희의 코드'로 변환한 결과다. 복고풍 영상, 필터 앱, 픽셀 그래픽, 카세트 플레이어 디자인, 인스타그램의 VHS 효과 등은 모두 '진짜 과거'가 아닌 '그럴듯한 과거'를 연출하는 장치다.


MZ세대는 감정을 직접 체험한 적은 없지만, 디지털 환경 속에서 수집된 단서들을 조합해 과거를 '유희의 경험'으로 재구성한다. 이들에게 레트로는 감정의 회복이라기보다, 자기 표현의 레이어이자 미학적 취향이다. 과거는 더 이상 무거운 실존이 아니라, 감각적 키트로 해체되고 재조합된다.


밀레니얼 세대(1981-1996년생)와 Z세대(1997-2012년생)를 아우르는 MZ세대의 레트로 문화는 "경험되지 않은 노스탤지어(non-experienced nostalgia)"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들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시대의 문화적 코드와 미학을 디지털 아카이브를 통해 접하고, 이를 창의적으로 재해석하여 자신만의 문화적 표현으로 전유한다. 이는 단순한 모방이나 회귀가 아닌,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문화적 실천이다.


문화연구자 사이먼 레이놀즈(Simon Reynolds)는 이를 "레트로마니아(retromania)"라고 명명하며, 과거 양식의 창조적 재활용이 현대 문화생산의 핵심 메커니즘이 되었다고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21세기의 문화적 혁신은 더 이상 '전례 없는 새로움'이 아니라, '과거의 창조적 재조합'을 통해 이루어진다. MZ세대는 이러한 문화적 메커니즘을 가장 자연스럽게 체화한 세대다.


젠지.jpg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Z세대의 사회적 성향에 대해 집중 보도한 뉴스위크, 이코노미스지의 표지(2025.07)


MZ세대의 레트로 소비에서 주목할 점은 그 '선택적 성격'이다. 기성세대가 실존적으로 경험한 과거는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이 뒤섞인 총체적 경험인 반면, MZ세대는 과거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요소만을 선택적으로 차용한다. 예를 들어 1980년대의 신시사이저 사운드나 네온 색상은 적극적으로 차용하면서도, 같은 시대의 사회적 억압이나 물질적 결핍은 배제한다. 이는 문화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이 지적한 포스트모던 문화의 특징인 "역사성의 약화(waning of historicity)"와 연결된다.


한국의 MZ세대 레트로 소비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 대한 향수'다. 이는 실제로 이들이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경험했거나, 바로 직전 세대의 경험을 미디어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한 시기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인기, 「토토가」와 같은 1990년대 캐릭터의 재발견, Y2K 패션의 부활은 이러한 현상을 반영한다. 특히 이들이 향수를 느끼는 대상은 주로 디지털 이전 또는 초기 디지털 시대의 문화적 아이콘들이다. 필름 카메라, 워크맨, 초기 인터넷 미학, 비디오게임 그래픽 등은 '충분히 아날로그적이어서 현재와 대비되면서도, 너무 오래되지 않아 접근 가능한' 레트로 요소들이다.


MZ세대의 레트로 소비는 또한 강한 '디지털 매개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들은 인스타그램, 틱톡, 유튜브와 같은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레트로 콘텐츠를 소비하고 생산하며, 이 과정에서 과거의 아날로그적 경험은 디지털 언어로 번역되고 변형된다. 예를 들어 필름 카메라의 질감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의 필터로, LP 레코드의 경험은 스포티파이의 '로파이(Lo-Fi)' 플레이리스트로 재해석된다. 이는 미디어 이론가 제이 데이비드 볼터(Jay David Bolter)와 리처드 그루신(Richard Grusin)이 말한 "재매개(remediation)" 현상의 전형적 사례로, 새로운 미디어가 이전 미디어의 경험을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통합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유희적 전유는 또한 MZ세대의 중요한 정체성 표현 방식이다. 레트로 스타일의 채택은 단순한 미적 선호를 넘어, 자신의 문화적 식견과 취향을 드러내는 '문화 자본(cultural capital)'의 일종으로 기능한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관점에서 보면, 특정 시대의 문화적 코드를 인식하고 창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은 일종의 '구별짓기(distinction)'의 수단이 된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아날로그 미디어와 기술을 향한 노스탤지어를 표현하는 것은 일종의 역설적 '차별화 전략'이기도 하다.




디지털 네이티브와 네트워크화된 기억


이러한 유희화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의 특징이기도 하다. 레트로를 영상으로 찍고, 해시태그로 분류하고, 밈으로 유통하는 감정의 조작 기술은, 기억을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화된 경험으로 만든다. 기억은 디지털 플랫폼에서 만들어지고, 강화되고, 변주된다. 감정은 개인의 내부가 아닌, 집단적 공명 안에서 형성된다. 레트로는 이들에게 자기표현의 도구이며, 정체성 구축의 장치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의 기억은 본질적으로 '네트워크화된 기억(networked memory)'의 성격을 띤다. 미디어 학자 호세 반 다이크(José van Dijck)는 현대의 기억이 더 이상 개인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플랫폼과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공유되고 집단적으로 구성되는 "연결된 기억(connected memory)"으로 변화했다고 분석한다. 페이스북의 '타임라인', 인스타그램의 '그리드', 유튜브의 '시청 기록'과 같은 디지털 인터페이스는 개인의 기억을 조직하고 표현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한다.


Z세대의 레트로 경험은 이러한 네트워크화된 기억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이들은 '공유된 아카이브'를 통해 과거에 접근하며, 이 과정에서 개인적 경험과 집단적 기억, 실제 역사와 미디어적 재현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예를 들어 유튜브에서 접한 1980년대 음악 비디오, 넷플릭스 시리즈에서 재현된 1990년대의 분위기, 틱톡에서 유행하는 Y2K 패션은 모두 Z세대의 '레트로 감각'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Z세대에게 레트로는 '밈(meme)'의 성격을 갖는다. 문화인류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제안한 이 개념은 원래 유전자처럼 복제되고 변이하며 전파되는 문화적 요소를 가리키지만, 현대 인터넷 문화에서는 특히 온라인에서 빠르게 공유되고 변형되는 문화적 콘텐츠를 의미한다. Z세대는 레트로 요소를 이러한 밈처럼 취급하여, 원래의 맥락에서 분리하고, 변형하며, 재조합한다. 1980년대 신시팝 사운드, 1990년대 시트콤의 한 장면, 2000년대 초반 휴대폰 디자인과 같은 레트로 요소들이 디지털 밈으로 재탄생하여 새로운 문화적 맥락에서 순환된다.


한국의 Z세대가 보여주는 레트로 소비의 또 다른 특징은 '초국적 레트로(transnational retro)'의 성격이다. 글로벌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성장한 이들은 한국의 레트로뿐 아니라, 일본의 시티팝, 미국의 Y2K 패션, 유럽의 테크노 음악과 같은 다양한 문화권의 레트로 요소들을 동시에 소비하고 혼합한다. 이는 문화사회학자 아르준 아파두라이(Arjun Appadurai)가 말한 "탈영토화된 상상력(deterritorialized imagination)"의 한 형태로, 국가적·지역적 경계를 넘어 형성되는 문화적 정체성과 취향을 반영한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의 레트로 소비에서 주목할 점은 '큐레이션(curation)'의 중요성이다. 이들은 무한한 디지털 아카이브 속에서 특정 레트로 요소들을 선별하고, 이를 자신만의 미학적 감각으로 재구성한다. 인스타그램의 '게시물 컬렉션', 핀터레스트의 '보드', 스포티파이의 '플레이리스트'와 같은 디지털 도구들은 이러한 큐레이션 실천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프랑스 이론가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가 말한 "브리콜라주(bricolage)"의 현대적 형태로, 기존의 문화적 재료들을 창의적으로 재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는 실천이다.


이러한 네트워크화된 기억과 레트로 소비는 Z세대에게 일종의 '정체성 놀이(identity play)'로 기능한다.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가 지적했듯이, 현대 사회에서 정체성은 더 이상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구성되고 재구성되는 '성찰적 프로젝트(reflexive project)'다. Z세대는 다양한 시대와 문화권의 레트로 요소들을 자유롭게 차용하고 조합함으로써, 유동적이고 다층적인 정체성을 표현한다.




알파세대와 시뮬레이션된 기억 : 미래의 레트로 경험


알파세대에 이르면 레트로는 거의 완전히 시뮬레이션된 감정의 형태로 변모한다. 이들은 아날로그를 경험한 적도 없고, 과거에 대한 실질적 감정도 없다. 그럼에도 레트로는 이들에게 하나의 '가상적 감성 패키지'로 주어지며, 유튜브 키즈 콘텐츠, 게임 디자인, 애니메이션 배경 등에서 시각화된다. 이들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처럼 보이게 만드는 법을 배운다. 과거의 감정은 스스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제공받고 재연기하는 것이다.


알파세대에게 과거란 실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편집된 과거' 속에서 성장하고 있다. 이들은 과거를 실시간으로 접하지 않고, 플랫폼을 통해 가공된 레트로 콘텐츠 속에서 간접 체험한다. 쇼츠 영상으로 접하는 복고 음악, 게임 캐릭터로 구현된 옛날 교복, 유튜브 브이로그로 조작된 '할머니 집 감성'은 모두 이들이 '소비하는 과거'의 형태다.


알파세대는 감정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감정을 '설정'된 상태로 경험한다. 이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듯한 과거를 시뮬레이션한다. 그 감정은 정서적 경험이라기보다 시청각적 학습이며, 감각적 반복이다. 이들에게 레트로란 감정의 복원이 아니라, 감정의 시나리오다.


2010년 이후 출생한 알파세대는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 태블릿, 인공지능 스피커와 같은 디지털 기기에 둘러싸여 성장했다. 이들에게 '아날로그'란 이미 가상화되고 시뮬레이션된 형태로만 존재한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개념을 빌리면, 이들에게 레트로는 '시뮬라크라(simulacra)'의 성격을 띤다. 즉, 원본 없는 복사본, 실재보다 더 실재처럼 보이는 이미지로서의 레트로다.


미디어 이론가 마크 프레나스키(Marc Prensky)는 이러한 세대를 "디지털 네이티브를 넘어선 세대(beyond digital natives)"로 정의하며, 이들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한 환경에서 성장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알파세대에게 필름 카메라의 셔터 소리, TV의 화면 끄는 소리, 전화 다이얼의 회전음과 같은 아날로그 경험의 흔적들은 모두 '디지털로 시뮬레이션된 효과음'으로만 존재한다.


Gamebuino-730x411.jpg 2024년 미국의 Gamebuino사가 개발한 코딩 교육 디바이스, 100여개의 코딩 게임을 작은 휴대용 기기에 담아 RETRO META Console 이라고 호칭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알파세대가 경험하는 '메타-레트로(meta-retro)' 현상이다. 이들은 레트로를 모방한 콘텐츠를 소비하면서도, 그것이 실제 과거가 아닌 '디자인된 과거'임을 인식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마인크래프트나 로블록스와 같은 게임에서 구현된 '픽셀 그래픽'은 초기 비디오 게임의 기술적 한계를 미학적으로 재해석한 것이지만, 알파세대는 이를 특정 미학적 선택으로 이해한다. 이는 레트로 자체가 하나의 미학적 장르로 코드화된 상황을 반영한다.


알파세대의 레트로 경험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현상은 '시간적 압축(temporal compression)'이다. 디지털 아카이브의 발달로 인해 1960년대의 팝 음악, 1980년대의 패션, 2000년대의 게임이 모두 동일한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동시에 접근 가능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알파세대에게 '20년 전'과 '50년 전'의 문화적 산물은 동등한 '과거'로 인식되며, 역사적 맥락이나 시간적 깊이의 차이가 희미해진다. 문화비평가 도우글라스 러시코프(Douglas Rushkoff)는 이를 "현재적 충격(present shock)"이라고 부르며, 선형적 시간 감각이 무너지고 모든 것이 영원한 현재 속에 공존하는 현상을 지적했다.


한국의 맥락에서 알파세대의 레트로 경험은 더욱 복잡한 층위를 갖는다. 이들은 「응답하라」 시리즈나 「쌈마이웨이」와 같은 레트로 드라마, 뉴트로(newtro) 마케팅, 부모 세대의 추억 공유를 통해 한국 특유의 압축적 근대화 경험을 '시뮬레이션'으로 접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실제 역사적 맥락이나 사회적 의미와는 분리된, 미학화되고 상품화된 형태로 전달된다.


이러한 시뮬레이션된 기억은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가 구분한 '1차 기억'과 '2차 기억'의 개념을 넘어서는 일종의 '3차 기억'으로 볼 수 있다. 1차 기억이 직접적인 경험에서 오는 기억이고, 2차 기억이 타인의 증언이나 역사적 기록을 통한 간접적 기억이라면, 알파세대의 3차 기억은 디지털로 시뮬레이션되고, 알고리즘적으로 큐레이션되며, 미학적으로 재구성된 기억이다. 이는 더 이상 '진실'이나 '사실'의 영역이 아닌, '경험 디자인'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뮬레이션된 기억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알파세대는 이러한 '설계된 과거'를 통해 역사적 공감 능력과 문화적 다양성을 발달시킬 가능성도 있다. 더불어, 이들은 '과거'라는 개념 자체를 더욱 유동적이고 창조적으로 접근함으로써, 미래의 레트로 문화에 새로운 차원을 열 수 있다. 미디어 교육학자 헨리 젱킨스(Henry Jenkins)는 이를 "참여 문화(participatory culture)"의 한 형태로 보며, 젊은 세대가 기존의 문화적 자원을 재해석하고 변형함으로써 새로운 문화적 의미를 창출하는 과정을 강조한다.




기억의 세대 정치학 : 노스탤지어의 충돌과 협상


기성세대는 기억을 삶의 일부로 간직하고, 그것을 통해 현재를 성찰한다. MZ세대는 기억을 패션처럼 착용하며, 그것을 취향과 정체성의 구성 요소로 활용한다. 알파세대는 기억을 시뮬레이션된 인터페이스로 경험하고, 감정마저도 알고리즘에 의해 제안받는다.


세대별 기억은 단지 연령 차이가 아니라, 기억의 '접속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거와 연결되는 통로가 체험이냐, 연출이냐, 시뮬레이션이냐에 따라 감정의 구조는 전혀 달라진다.


이처럼 다양한 세대의 기억 방식이 공존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기억의 정치학(politics of memory)'이 발생한다. 문화사회학자 모리스 할브박스(Maurice Halbwachs)는 일찍이 기억이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며, 현재의 사회적 관계와 권력 구조에 따라 재구성된다고 주장했다. 레트로 문화에서도 특정 과거가 어떻게 기억되고, 재현되며, 가치 평가되는지는 세대 간 권력 관계와 문화적 헤게모니의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응답하라」 시리즈와 같은 레트로 콘텐츠는 한국의 특정 시대(1988년, 1994년, 1997년)를 재현하면서, 어떤 요소들은 강조하고 다른 요소들은 배제한다. 이는 단순한 미학적 선택이 아니라, 어떤 기억이 가치 있고 보존할 만한 것인지, 어떤 과거가 현재에 적합한지를 결정하는 문화적·정치적 과정이다. 베이비붐 세대가 직접 경험한 1970-80년대의 기억과, 이를 미디어를 통해 간접적으로 소비하는 Z세대의 기억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간극이 존재한다.


이러한 '세대 간 기억의 충돌'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예컨대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의 레트로 소비를 '진정성이 결여된' 것으로 비판하고,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의 노스탤지어를 '시대착오적'이라고 여길 수 있다. 문화인류학자 아파두라이는 이를 "노스탤지어의 정치학(politics of nostalgia)"이라고 부르며, 과거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과 감정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집단 정체성과 세대 관계가 재구성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충돌은 동시에 세대 간 '대화와 협상'의 가능성도 제공한다. 예를 들어 디지털 플랫폼은 서로 다른 세대가 각자의 기억을 공유하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다. 유튜브에서 베이비붐 세대의 시청자가 Z세대 크리에이터의 레트로 콘텐츠에 자신의 실제 경험을 댓글로 공유하거나, SNS에서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가 특정 레트로 아이템을 중심으로 대화를 나누는 현상은 '세대 간 기억의 교차(intergenerational memory crossing)'의 긍정적 사례다.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이러한 세대 간 기억의 협상은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압축적 근대화, 급격한 사회변동, 디지털 혁명을 경험한 한국 사회에서는 세대 간 경험과 가치관의 격차가 특히 크다. 문화사회학자 박태균은 이를 "세대 단층(generational fault lines)"이라고 표현하며, 이러한 단층이 한국 사회의 주요 갈등 요인 중 하나라고 분석했다. 레트로 문화는 이러한 세대 간 단층을 가로지르는 '문화적 접점'을 제공함으로써, 세대 간 소통과 이해를 촉진할 잠재력을 가진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가족 내 기억의 전승과 재해석' 현상이다. 부모의 오래된 사진첩을 디지털화하고 SNS에 공유하는 밀레니얼 세대, 조부모의 옛 물건을 발굴해 틱톡 콘텐츠로 제작하는 Z세대, 부모와 함께 '응답하라' 시리즈를 시청하며 그 시대의 이야기를 듣는 알파세대 등의 사례는 레트로 문화가 가족 내에서 세대 간 기억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기능함을 보여준다.


레트로 문화는 또한 '집단 트라우마의 치유'라는 측면에서도 세대 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독재, 경제위기와 같은 집단적 트라우마로 가득하다. 이러한 트라우마는 세대를 넘어 전승되기도 하고, 특정 세대에게는 직접적 경험으로, 다른 세대에게는 간접적 기억으로 존재한다. 정신분석학자 마리안네 허쉬(Marianne Hirsch)는 이를 "포스트메모리(postmemory)"라고 개념화했다. 레트로 문화는 이러한 집단적 트라우마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더라도, 과거와 현재의 정서적 연결을 통해 간접적인 치유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미래의 레트로, 레트로의 미래


결국 세대별 레트로의 차이는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기억을 구성하는 방식, 감정을 체험하는 구조, 시간을 인식하는 감수성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기성세대는 기억의 귀환을 통해 감정을 회복하고, 젊은 세대는 기억의 이미지화를 통해 감정을 창조하며, 가장 어린 세대는 기억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감정을 실험한다. 레트로는 이처럼 세대 간 감정 구조의 차이를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문화적 거울이다.


디지털 시대의 레트로 문화는 앞으로 더욱 복잡하고 다층적으로 진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디어 이론가 헨리 젱킨스(Henry Jenkins)의 '컨버전스 문화(convergence culture)' 개념을 적용하면, 미래의 레트로는 다양한 미디어 플랫폼과 문화적 맥락을 가로지르며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트랜스미디어 레트로(transmedia retro)'의 형태를 띨 것이다. 디지털 아카이브의 확장,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의 보편화는 과거의 경험과 기억을 재현하고 재해석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계속해서 창출할 것이다.


특히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은 '합성된 레트로(synthetic retro)'라는 새로운 현상을 가능하게 한다. 이미 현재의 AI 기술은 특정 시대와 장르의 음악, 패션, 시각 디자인을 모방하고 재생산할 수 있다. 앞으로는 '존재한 적 없는 과거'를 창조하는 일종의 '가상 노스탤지어(virtual nostalgia)'가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이는 보드리야르가 예견한 '시뮬라크라'의 극단적 형태로, 원본이 없는 복사본에 대한 향수라는 역설적 감정을 낳을 수 있다.


Capture_2025_1013_140017.png 신세틱 레트로(synthetic retro)'는 오래된 과거의 감성을 현대적인 기술과 방식으로 재현하는 현상이나 스타일을 의미한다.


미래의 레트로 문화에서는 '경험되지 않은 노스탤지어'가 더욱 복잡한 형태로 발전할 것이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과거에 대한 향수를 넘어, 기술적으로 시뮬레이션된 과거에 대한 향수, 다른 문화권의 과거에 대한 향수, 나아가 대안적 역사(alternative history)에 대한 향수까지 다양한 형태의 노스탤지어가 공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향수'라는 감정 자체의 정의와 경계를 재구성할 것이다.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미래의 레트로 문화는 세대 간 소통과 이해를 위한 중요한 문화적 자원이 될 수 있다. 급격한 사회변동과 기술 발전으로 인한 세대 간 경험의 격차가 더욱 커지는 상황에서, 레트로 문화는 서로 다른 세대가 과거와 현재, 기억과 상상에 대해 대화할 수 있는 공통의 플랫폼을 제공한다. 이는 단순한 문화적 향유를 넘어, 사회적 통합과 역사적 정체성의 재구성에 기여하는 중요한 사회적 실천이 될 수 있다.


궁극적으로 레트로 문화는 인간이 시간과 기억, 정체성과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경험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철학자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은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On the Concept of History)」에서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것이 아니라 현재와의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된다고 주장했다. 레트로 문화는 이러한 과거와 현재의 변증법적 관계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문화적 현상으로, 단순한 향수나 트렌드를 넘어 인간의 시간 경험과 역사적 의식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결국 레트로는 '과거를 기억하는 방법'이 아니라, '세대가 감정을 구성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다. 기억은 각 세대의 세계관을 반영하며, 우리는 그 기억을 통해 세대를 이해하고, 감정의 문법을 비교할 수 있다. 미래의 레트로 문화는 이러한 세대 간 감정의 문법을 더욱 풍부하고 다층적으로 발전시키며, 인간의 기억과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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