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산업화 시대, 남성 노동력의 변화와 위기

by NAHDAN

2. 탈산업화 시대, 남성 노동력의 변화와 위기



4장에서 본 산업화 시대의 남성성이 경제적 성취를 중심으로 구축되었다면, 21세기 들어 진행되고 있는 탈산업화는 이런 남성성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다. 탈산업화란 제조업 중심의 경제에서 서비스업과 지식산업 중심의 경제로 전환되는 과정을 의미하며, 이는 남성 노동력의 가치와 의미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한국 경제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 27.3%에서 2020년 25.4%로 소폭 감소에 그쳤지만, 고용 측면에서는 더 큰 변화가 나타났다. 제조업 취업자 비중은 1990년 27.6%에서 2020년 16.7%로 크게 줄어들었다. 반면 서비스업 취업자 비중은 같은 기간 47.8%에서 70.2%로 급증했다. 이런 변화는 전통적으로 남성이 우위를 점했던 육체적 노동의 중요성을 감소시키고, 대신 소통 능력, 감정 노동, 창의성 등이 중요해지는 새로운 노동 환경을 만들어냈다.


제조업 중심 시대에는 물리적 힘, 기술적 숙련도, 장시간 노동 능력 등이 중요한 경쟁력이었다. 이런 영역에서 남성들은 상대적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서비스업과 지식산업이 중심이 되면서 이런 전통적 남성적 능력의 가치가 하락했다. 대신 고객 서비스, 팀워크, 멀티태스킹, 감정 관리 등 전통적으로 여성적이라고 여겨진 능력들의 중요성이 커졌다.


정보기술의 발달도 노동 시장의 젠더 역학을 크게 바꿔놓았다. 과거에는 정보 접근이나 업무 처리에서 물리적 제약이 많았지만,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이런 제약들이 크게 줄어들었다. 여성들도 남성과 동등하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재택근무나 유연근무 등의 확산으로 육체적 조건의 차이도 상당 부분 극복되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창의성과 혁신이 중시되는 새로운 경제에서는 다양성이 경쟁력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동질적인 남성 집단보다는 성별, 연령, 배경이 다양한 집단이 더 창의적인 결과를 낸다는 연구 결과들이 축적되면서, 기업들도 적극적으로 여성 인력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남성들의 상대적 지위 하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교육 시스템의 변화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암기와 반복 학습 중심의 전통적 교육에서는 남학생들이 상대적으로 유리했지만, 창의성과 소통 능력을 중시하는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에서는 여학생들이 더 좋은 성과를 보이는 경우가 많아졌다. 실제로 한국에서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남성을 추월한 것은 2009년의 일이고, 그 격차는 계속 벌어지고 있다.


이런 교육 성과의 차이는 노동 시장에서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공무원 시험이나 대기업 입사 시험에서 여성 합격자 비율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일부 직종에서는 여성이 남성을 압도하는 상황도 나타나고 있다. 특히 법조계, 의료계, 금융계 등 전문직 영역에서 여성의 진출이 두드러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모든 남성에게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고학력 남성들의 경우 새로운 환경에 비교적 잘 적응하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학력이 낮거나 전통적 제조업에 종사하던 남성들의 경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들은 자신이 가진 기술과 경험의 가치가 하락하는 것을 직접 체감하고 있으며, 새로운 기술이나 역할에 적응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40-50대 중년 남성들의 경우 이런 변화에 가장 취약한 집단이다. 이들은 산업화 시대의 가치관과 근무 방식에 익숙해져 있지만, 새로운 디지털 환경이나 수평적 조직 문화에는 적응하기 어려워한다. 조기 퇴직이나 명예 퇴직을 당하는 경우도 많고, 재취업을 하더라도 이전보다 낮은 지위나 임금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청년 남성들의 상황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이들은 부모 세대의 성공 모델을 따라 열심히 공부하고 스펙을 쌓았지만, 막상 취업 시장에 나와보니 예상과 다른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여성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어렵고, 설령 취업에 성공하더라도 이전 세대와 같은 안정성이나 성장 가능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비정규직의 확산도 남성들에게 큰 타격을 주고 있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지고 고용의 불안정성이 증가하면서, 남성들의 전통적 역할이었던 '가족 부양'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1-2장에서 본 젊은 남성들의 연애 기피나 결혼 기피 현상도 이런 경제적 불안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프리랜서나 긱 이코노미의 확산도 전통적 남성성에 도전을 제기하고 있다. 이전에는 안정적인 직장을 갖는 것이 남성의 기본 덕목이었지만, 이제는 스스로 일을 찾고 관리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는 자율성과 창의성을 제공하는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불안정성과 고독감을 증가시키는 부정적 측면도 있다.


인공지능과 자동화의 발달은 이런 변화를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남성이 우위를 점했던 많은 직업들이 기계로 대체되고 있으며, 이런 추세는 앞으로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반면 돌봄, 교육, 상담 등 인간적 소통이 중요한 영역은 오히려 그 가치가 증가하고 있는데, 이런 영역에서는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

이런 구조적 변화들이 누적되면서, 남성들의 경제적 지위와 역할에 대한 근본적 재정의가 불가피해졌다. 더 이상 남성이 자동적으로 '주 소득원'이나 '가족 부양자'가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 시대가 된 것이다. 이는 개인적 차원에서는 정체성의 혼란을, 사회적 차원에서는 젠더 역할에 대한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반드시 남성에게만 불리한 것은 아니다. 새로운 경제 환경은 남성들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창의성, 혁신, 기업가 정신 등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 확대되고 있고,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할 수 있는 여건도 개선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변화를 위기로만 보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결국 탈산업화 시대의 남성 노동력 위기는 단순히 일자리나 소득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 정체성 전체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를 요구하는 구조적 변화다.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 없이는 1-3장에서 본 것과 같은 남성들의 혼란과 갈등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3. 미디어 패러다임의 전환과 남성 정체성의 혼란


전통적으로 미디어는 사회의 주요 가치관과 역할 모델을 제시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해왔다. 특히 남성성에 대한 사회적 기대와 이상은 영화, 드라마, 광고 등을 통해 형성되고 재생산되어왔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미디어 환경이 급격히 변화하면서, 남성 정체성을 둘러싼 혼란도 함께 증폭되고 있다.


과거 한국 미디어에서 제시되던 이상적 남성상은 비교적 일관성이 있었다. 1980-90년대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강인하고 책임감 있는 남성,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가장, 어려움을 묵묵히 견뎌내는 의지적인 남성이 주류를 이뤘다. 이병헌, 한석규, 송강호 등으로 대표되는 남성 배우들은 이런 전통적 남성성의 아이콘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꽃미남' 문화가 등장하면서 남성상에 중요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배용준, 원빈, 현빈 등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남성상은 기존의 거칠고 남성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섬세하고 부드러운 매력을 강조했다. 이는 여성 시청자들의 취향 변화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고, 동시에 아시아 전체로 확산된 한류의 영향이기도 했다.


K-pop의 글로벌 성공은 이런 변화를 더욱 가속화했다. BTS, EXO, BIGBANG 등 K-pop 아이돌들이 제시하는 남성상은 전통적 한국 남성성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들은 화장을 하고, 패션에 신경 쓰며,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팬들에게 세심한 배려를 보이는 새로운 남성성을 보여줬다. 이는 특히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고, 새로운 남성상의 기준이 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런 미디어 속 남성상과 현실의 남성들 사이의 괴리가 점점 커졌다는 점이다. 미디어 속 남성들은 외모도 뛰어나고, 경제력도 있으며, 감정 표현도 자유롭고, 여성을 배려할 줄도 아는 완벽한 존재로 그려졌다. 하지만 현실의 평범한 남성들이 이런 기준을 모두 충족하기는 불가능했다. 이는 많은 남성들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열등감을 안겨줬다.


특히 연애 드라마나 로맨틱 코미디에서 제시되는 이상적 남성상은 현실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재벌이면서도 순수하고, 능력도 뛰어나면서도 겸손하며, 강하면서도 여성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운 '완벽한 남자' 캐릭터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이런 캐릭터들은 여성 시청자들에게는 로맨틱한 판타지를 제공했지만, 남성 시청자들에게는 달성 불가능한 기준을 제시하는 부담이 되었다.


광고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나타났다. 과거 광고 속 남성들은 주로 일에 몰두하는 직장인이나 가족을 돌보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하지만 최근의 광고들은 외모 관리에 신경 쓰고, 패션 센스가 뛰어나며, 감정 표현이 풍부한 '새로운 남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는 화장품, 패션, 뷰티 시장의 확대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소셜미디어의 확산은 이런 변화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틱톡 등에서는 완벽하게 꾸며진 남성들의 모습이 일상적으로 노출된다.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근육질 몸매, 해외여행에서의 여유로운 모습, 고급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값비싼 브랜드 제품들이 끊임없이 전시된다. 이런 이미지들은 현실보다 훨씬 과장되고 선별된 것이지만, 이를 접하는 평범한 남성들에게는 비교와 열등감의 대상이 된다.


유튜브나 인플루언서 문화의 등장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성공한 유튜버나 인플루언서들은 자유로운 라이프스타일과 경제적 성공을 동시에 보여주면서, 기존의 직장인 중심 성공 모델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들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동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현실적으로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이기도 했다.


웹툰이나 웹소설의 확산도 남성 정체성에 미묘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여성 독자를 대상으로 한 로맨스 장르에서는 더욱 이상화된 남성 캐릭터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외모, 능력, 성격 모든 면에서 완벽한 존재로 그려졌고, 여성에 대한 배려와 사랑도 현실적이지 않을 정도로 과장되었다. 이런 콘텐츠들이 젊은 여성들의 연애관이나 남성관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했고, 결과적으로 현실 남성들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반면 남성을 대상으로 한 콘텐츠에서는 다른 양상이 나타났다. 게임, 스포츠, 액션 영화 등에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남성성이 강조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런 콘텐츠들도 점차 성평등 의식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여성 캐릭터의 비중이 늘어나고, 남성 캐릭터들도 보다 다양하고 복합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특히 페미니즘 의식의 확산과 함께 기존 미디어 콘텐츠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늘어났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거나 수동적 존재로 그리는 콘텐츠, 남성의 폭력이나 지배를 미화하는 콘텐츠들이 공개적으로 비판받기 시작했다. 이는 콘텐츠 제작자들로 하여금 더욱 신중하고 성찰적인 접근을 하도록 만들었지만, 동시에 창작의 자유나 다양성을 제약하는 측면도 있었다.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등 글로벌 OTT 플랫폼의 확산은 한국 미디어 환경에 또 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서구의 다양한 남성상들이 한국 시청자들에게 직접 노출되기 시작했고, 이는 기존 한국적 남성성과의 비교와 성찰을 촉진했다. 특히 서구 콘텐츠에서 보여지는 평등한 젠더 관계나 감정 표현의 자유로움은 한국 남성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변화들이 일관된 방향성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서로 다른, 때로는 상충하는 남성상들이 혼재하면서 더욱 큰 혼란을 야기했다. 전통적 남성성을 추구해야 할지, 새로운 남성성을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둘 사이의 균형점을 찾아야 할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남성들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었고, 1-2장에서 본 것과 같은 회피나 포기의 패턴을 보이게 되었다.


미디어 패러다임의 전환은 단순히 콘텐츠의 변화를 넘어서, 남성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과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에 근본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변화이며, 남성 정체성의 재구성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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