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성성의 해체와 재구조화를 위한 저항의 흐름
앞서 1-4장에서 살펴본 남성성의 위기적 특성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이 위기를 촉발한 구조적 동력들을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여성운동의 부상과 성평등 의식의 확산일 것이다. 이는 정치적 갈등과는 차원이 다른, 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한국의 여성운동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함께 본격적으로 태동했지만, 그 영향이 일반 남성들의 일상에까지 파급되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 이후의 일이다. 특히 2015년 메갈리아의 등장은 여성운동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전까지의 여성운동이 주로 제도적 개선이나 법적 평등에 초점을 맞췄다면, 메갈리아 이후의 여성운동은 일상 문화와 개인적 관계에서의 성평등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런 변화는 남성들에게 매우 직접적인 도전이 되었다. 이전의 여성운동이 '멀리 있는' 정치적 이슈로 느껴졌다면, 새로운 여성운동은 데이트, 직장 생활, 가족 관계 등 남성들의 일상 영역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 "왜 남자가 데이트 비용을 내야 하는가?", "왜 여성이 화장을 해야 하는가?", "왜 집안일은 여성의 몫인가?" 같은 질문들이 더 이상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 과제가 되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런 변화가 '아래로부터의' 변화였다는 것이다. 정부나 기성 여성단체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젊은 여성들이 온라인을 통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변화였다. 이들은 기존의 온건한 여성운동 방식을 거부하고, 보다 직접적이고 급진적인 방법으로 성평등을 요구했다. 미러링 전략, 남성혐오 표현의 사용, 기존 질서에 대한 전면적 거부 등이 그 특징이었다.
이런 '급진적 페미니즘'의 등장은 남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4장에서 본 바와 같이 한국 남성들은 지난 수십 년간 점진적 변화에는 비교적 잘 적응해왔지만, 이렇게 급격하고 전면적인 도전에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더욱이 이 도전이 '동등한 파트너'였던 여성들로부터 나왔다는 점이 혼란을 가중시켰다.
여성운동의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페미니즘의 고전적 명제가 한국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전까지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비교적 분리되어 있었다. 직장에서는 성평등을 추구하더라도, 개인적 관계에서는 전통적 성역할이 유지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새로운 여성운동은 이런 분리를 거부했다. 사적 관계에서의 불평등도 공적 문제로 제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남성들의 '안전지대'를 크게 축소시켰다. 이전에는 직장에서 아무리 성평등을 실천하더라도, 집에 돌아가면 전통적 가장 역할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집 안에서도, 연인 관계에서도, 심지어 친구 관계에서도 성평등 의식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남성들에게는 '도피처'가 사라진 셈이었다.
성평등 의식의 확산은 또한 남성들의 특권에 대한 가시화를 가져왔다. 이전까지 당연시되었던 많은 것들이 '남성 특권'으로 재정의되기 시작했다.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기, 외모에 대한 평가 자제하기, 성적 농담 하지 않기, 술자리에서 여성에게 술 따르기를 요구하지 않기 등이 모두 새로운 에티켓이 되었다.
문제는 이런 변화가 명시적인 매뉴얼이나 사회적 합의 없이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남성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 없이, 시행착오를 통해 새로운 규칙을 학습해야 했다. 어제까지 괜찮았던 행동이 오늘은 문제가 되고, 한 여성에게는 괜찮았던 것이 다른 여성에게는 불쾌한 것이 되는 상황이 빈번했다.
이런 불확실성은 많은 남성들을 위축시켰다. 1-2장에서 본 것처럼 많은 젊은 남성들이 여성과의 관계를 기피하게 된 배경에는 이런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선의로 한 행동이 악의로 해석될 수 있고,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불안감이 관계 형성 자체를 어렵게 만들었다.
동시에 여성운동의 확산은 여성들의 자기 인식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 세대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수동적이고 순응적이었다면, 새로운 세대 여성들은 훨씬 적극적이고 주장이 분명했다. 자신의 권리를 명확히 알고 있고, 이를 침해받았을 때 즉각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는 분명 긍정적인 변화였지만, 기존 방식에 익숙한 남성들에게는 적응하기 어려운 변화이기도 했다.
여성들의 경제적 독립성 증가도 중요한 요소였다. 여성들의 교육 수준 향상과 사회 진출 확대로 인해, 이들의 경제적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다. 2019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대 여성의 고용률은 남성과 거의 동일한 수준에 도달했다. 이는 여성들이 더 이상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음을 의미했다.
경제적 독립성의 증가는 여성들의 관계에 대한 태도 변화로 이어졌다. 이전에는 경제적 안정을 위해 불만스러운 관계도 참고 견뎌야 했다면,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여성들은 더욱 까다로운 기준을 가지고 남성을 선택하게 되었고, 만족스럽지 않은 관계는 쉽게 정리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남성들에게는 '관계의 주도권'을 상실한 것으로 느껴질 수 있었다.
미투 운동의 확산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여성들의 안전에 대한 우려는 2018년 미투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많은 남성들이 자신도 모르게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성추행이나 성희롱에 대한 기준이 크게 달라졌고, 이전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행동들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런 변화들이 누적되면서, 여성운동은 단순히 여성의 권익 신장을 넘어서 한국 사회의 젠더 질서 전체를 재편하는 강력한 동력이 되었다. 남성들은 이제 더 이상 '당연한' 특권을 누릴 수 없게 되었고, 모든 관계에서 성평등을 의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는 분명 더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는 긍정적 변화였지만, 동시에 기존 방식에 익숙한 남성들에게는 큰 도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