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펴본 한국 근현대사의 남성성 변화와 세계적 맥락을 종합해보면, 1-3장에서 본 현재의 남성성 위기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반복적으로 경험해온 구조적 변화의 연장선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남성들은 지난 150여 년간 적어도 다섯 번의 큰 정체성 위기를 겪었다 : 일제강점기, 해방과 전쟁, 산업화, 외환위기, 그리고 현재의 젠더 혁명 시기가 그것이다.
각 시기마다 나타나는 공통적 패턴이 있다. 첫째, 기존의 사회 구조와 가치 체계가 급격히 변화하면서 남성들의 역할과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 재정의가 요구된다. 둘째, 변화 초기에는 혼란과 저항이 나타나지만, 점차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새로운 남성성 모델이 등장한다. 셋째, 새로운 남성성이 안정화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며, 그 과정에서 세대 간, 계층 간 갈등이 나타난다.
하지만 현재의 위기는 이전과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무엇보다 변화의 주도권이 남성에게서 여성으로 넘어갔다는 점이다. 이전의 변화들은 대부분 외부적 충격(식민지배, 전쟁, 경제위기 등)에 의한 것이었고, 남성들이 그 변화에 주도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젠더 혁명은 여성들이 주도하는 변화이고, 남성들은 수동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둘째, 이번 위기는 남성성의 핵심적 영역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도전받고 있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특정 영역(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의 변화가 주를 이뤘다면, 현재는 가족, 직장, 연애, 사회적 지위 등 모든 영역에서 동시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는 남성들에게 이전보다 훨씬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적응을 요구한다.
셋째, 대안적 남성성 모델이 아직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전의 위기들에서는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새로운 이상적 남성상이 등장했다(산업 전사, 중산층 가장 등). 하지만 현재는 기존 모델의 해체는 진행되고 있지만, 이를 대체할 새로운 모델은 아직 사회적 합의를 얻지 못하고 있다.
현재 한국 남성들이 겪는 위기를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압축 근대화'와 '젠더 혁명'의 충돌이다. 이 두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1-3장에서 본 현상들의 근본적 원인을 파악하는 데 필수적이다.
'압축 근대화'란 서구 사회가 200여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룬 근대화 과정을 한국이 불과 60여 년 만에 달성한 현상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경제 발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농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전통적 공동체에서 개인주의 사회로,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모두 포괄하는 총체적 변화다. 1960년 1인당 국민소득 79달러의 최빈국이었던 한국이 2020년 3만 달러를 넘어서는 선진국이 된 것, 문맹률 80%에서 고등교육 진학률 80%로의 변화, 농업 인구 80%에서 도시 인구 80%로의 전환 등이 모두 이 압축 근대화의 결과다.
이런 압축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 남성들은 매우 독특한 경험을 했다. 이들은 문자 그대로 역사의 주역이었다. 6.25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나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것, 민주화를 이뤄낸 것, 외환위기를 극복한 것 모두 이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공장에서, 건설 현장에서, 사무실에서 땀 흘린 것이 바로 이들이었다. 가족을 위해, 조국 근대화를 위해 개인의 행복을 기꺼이 포기한 것도 이들이었다.
한국 사회는 지난 60여 년간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근대화를 달성했다. 이 과정에서 남성들은 국가 발전과 경제 성장의 주역이라는 강한 정체성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이뤄냈다'는 자부심은 힘들고 고단한 과정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정신적 지주였다. 이들에게 남성성이란 곧 '건설자', '개척자', '희생자'의 정체성과 동일했다. 현재의 풍요로운 한국 사회는 바로 자신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낸 성취물이라는 강한 자긍심이 있었다.
하지만 압축 근대화는 동시에 많은 후유증도 남겼다. 무엇보다 '과정'보다는 '결과'를, '균형'보다는 '성장'을 중시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빨리, 더 많이, 더 높이가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간적 가치, 관계의 질, 개인의 행복 같은 것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일단 성공하고 나면 그때 가서 생각해보자"는 식의 유보적 태도가 일반화되었다.
남성들은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개인적 희생이나 관계의 소홀함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학습했다. 가족과의 시간을 포기하고 일에 매진하는 것, 건강을 해치면서도 야근과 주말 근무를 감수하는 것, 개인적 취미나 관심사를 포기하고 오직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 '남자다운' 행동으로 여겨졌다. 이런 희생은 단순한 개인적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의무이자 남성으로서의 도덕적 책임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변화에 대한 적응력보다는 기존 방식의 고수를 통한 성공 경험이 더 강화되었다. 압축 근대화 시기에는 기본적으로 '더 열심히, 더 오래' 하면 성공할 수 있었다. 혁신이나 창의성보다는 근면성과 지구력이 더 중요한 덕목이었다. 따라서 남성들은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기보다는 검증된 기존 방식을 더욱 철저히 실행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압축 근대화가 만들어낸 남성성의 또 다른 특징은 강한 위계 지향성이었다. 급속한 발전을 위해서는 효율적인 조직과 명확한 지휘 체계가 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남성들은 위계적 질서에 익숙해졌다. 군대 경험, 기업의 서열 문화, 학연·지연·혈연에 기반한 인맥 문화 등이 모두 이런 위계적 남성성을 강화하는 요소들이었다. 이런 위계 지향성은 효율성 측면에서는 장점이 있었지만, 수평적 소통이나 창의적 사고에는 제약이 되었다.
그런데 '젠더 혁명'이라는 새로운 파도가 이런 압축 근대화의 성과와 후유증이 공존하는 한국 사회에 몰아쳤다. 젠더 혁명이란 2010년대 이후 본격화된 성평등에 대한 근본적 인식 변화를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여성의 사회 진출 확대나 법적 평등 보장을 넘어서, 기존의 성별 역할 분담 자체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를 의미한다. 가정에서의 역할, 직장에서의 관계, 연애와 결혼의 방식, 심지어 언어 사용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젠더 관점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2010년대 이후 본격화된 젠더 혁명은 매우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그동안 당연시되었던 성별 역할 분담, 남성 중심적 조직 문화, 가부장적 가족 구조 등이 일거에 문제시되기 시작했다. "남자가 데이트 비용을 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 "회사에서는 남성이 주도권을 갖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인식, "집안의 중요한 결정은 남성이 한다"는 관념 등이 모두 '성차별적'이라는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이런 변화가 '외부로부터의 강요'가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요구', 즉 한국 여성들 스스로의 요구에서 나왔다는 점이었다. 이전의 변화들(일제강점, 전쟁, 외환위기 등)은 대부분 외부적 충격에 의한 것이어서, 남성들이 '우리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젠더 혁명은 바로 옆에 있던 아내, 딸, 여동생, 여성 동료들이 주도하는 변화였다. 이들이 "지금까지의 방식은 잘못되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선언하는 상황이었다.
젠더 혁명의 또 다른 특징은 그 속도와 포괄성이었다. 메갈리아 등장 이후 불과 10여 년 만에 한국 사회의 젠더 담론은 완전히 바뀌었다. 미투 운동, 혜화역 시위, 온라인상의 페미니즘 확산 등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면서, 기존의 성별 관계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가 이뤄졌다. 이는 압축 근대화 못지않게 빠른 속도의 변화였다.
압축 근대화 세대의 남성들에게 이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들은 가족과 사회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실제로 놀라운 성과를 거뒀는데, 이제 와서 그 방식 자체가 문제라고 비판받는 상황이 된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살아서 여성들도 대학 갈 수 있게 되고, 사회 진출할 수 있게 된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우리를 비난하는가?"라는 당혹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더욱 혼란스러운 것은 젠더 혁명이 제시하는 새로운 기준들이 기존의 성공 경험과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점이었다. 압축 근대화 시대에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었는데, 이제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이전에는 "강하고 의지적인 리더십"이 남성의 미덕이었는데, 이제는 "소통하고 배려하는 협력적 태도"가 요구된다. 평생 옳다고 믿고 실천해온 가치들이 하루아침에 '구시대적' 또는 '독성적'이라고 평가받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인생 전체가 부정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밤잠을 설쳐가며 일한 것도, 가족과의 시간을 포기한 것도, 개인적 꿈을 접은 것도 모두 가족과 사회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었다고 믿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잘못된 남성성'의 표현이라고 비판받게 된 것이다.
젊은 세대 남성들의 상황은 또 달랐다. 이들은 압축 근대화의 성과는 누리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형성된 남성성 규범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부모 세대의 가치관 속에서 자랐지만, 성인이 되어 사회로 나오니 완전히 다른 규범이 적용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마치 한국어로 교육받고 자란 사람이 갑자기 영어로만 소통해야 하는 사회에 던져진 것과 같은 혼란을 겪고 있다.
부모 세대의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는 공식은 이미 작동하지 않는데,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은 없는 상황이다. 전통적 남성성을 추구하면 '독성 남성성'이라는 비판을 받고, 그렇다고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추구하자니 구체적인 롤모델이나 가이드라인이 없다. 1-2장에서 본 젊은 남성들의 혼란과 방황이 바로 이런 규범의 공백 상태에서 나온 것이다.
특히 이들에게 어려운 것은 '과도기적 상황'에서 어떤 기준을 적용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연애할 때 데이트 비용을 어떻게 분담해야 할지, 직장에서 여성 동료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 결혼 후 가사와 육아를 어떻게 분담해야 할지에 대한 명확한 사회적 합의가 없다. 같은 또래라도 사람마다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행동을 해도 비판받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불확실성은 젊은 남성들을 더욱 위축시키고 수동적으로 만들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규범의 혼재가 개인의 내면에서도 갈등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머리로는 성평등의 가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만, 감정적으로는 기존의 남성적 정체성에 대한 애착을 완전히 버리기 어렵다. 예를 들어, 여성이 데이트 비용을 내겠다고 할 때 이성적으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감정적으로는 자존심이 상하는 복잡한 감정을 경험한다. 이런 내적 갈등은 젊은 남성들을 더욱 피로하게 만들고 있다.
글로벌 트렌드와 한국적 특수성의 결합
현재 한국 남성들의 경험을 글로벌 맥락에서 보면,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전통적 남성성의 위기'라는 보편적 현상의 한국적 변형임을 알 수 있다. 서구에서는 1960년대부터, 일본에서는 1990년대부터, 중국에서는 2000년대부터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경험은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남성성의 위기는 근대화와 민주화, 여성 해방이 진행되는 모든 사회에서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다.
이런 보편성은 현재 한국 남성들이 겪는 어려움이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과정임을 의미한다. 미국의 경우 1970년대부터 '남성성의 위기'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유럽 각국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으며, 일본의 '초식남', 중국의 '샤오셴러우' 현상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한국 남성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런 혼란과 어려움을 겪는 것이 자신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런 보편성은 다른 나라들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시사한다. 서구 사회가 수십 년에 걸쳐 시행착오를 통해 축적한 경험, 일본이나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의 대응 방식 등을 참고하여 한국적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다. 특히 서구에서 발달한 '새로운 남성성' 담론이나 일본의 '초식남' 현상에 대한 사회적 대응 등은 한국에도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적 특수성도 무시할 수 없다. 무엇보다 변화의 속도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월등히 빠르다는 점이다. 서구가 100여 년에 걸쳐 경험한 변화를 한국은 20-30년 만에 압축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196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시작된 이후 60여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젠더 의식이 변화했다면, 한국은 2010년대 이후 불과 10여 년 만에 급격한 변화를 경험했다. 이런 속도의 차이는 단순히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경험을 만들어낸다.
급속한 변화는 적응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다. 서구의 경우 각 세대가 점진적으로 변화에 적응할 수 있었지만, 한국의 경우 한 세대 내에서도 완전히 다른 기준이 적용되는 상황이 나타났다. 20대 초반에 배운 연애 방식이 20대 후반에는 이미 구시대적인 것이 되어버리는 식이다. 이는 개인들에게 극도의 혼란과 스트레스를 가중시킨다.
또한 전통문화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한 가운데 급진적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어, 문화적 충돌이 더욱 극심하다. 서구의 경우 전통적 기독교 문화에서 점진적으로 세속화가 진행되면서 젠더 의식도 함께 변화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유교적 가부장 문화가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가운데 서구적 성평등 의식이 급속히 유입되면서, 두 가치 체계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상황이 나타났다.
이런 문화적 충돌은 특히 가족 관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부모 세대는 여전히 전통적 성역할을 당연시하는 반면, 자녀 세대는 평등한 젠더 관계를 추구한다. 이는 단순한 세대차이를 넘어서 근본적인 가치관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젊은 남성들은 집에서는 전통적 남성성을 요구받고, 밖에서는 새로운 남성성을 요구받는 이중적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경제적 요인도 중요하다. 서구의 경우 남성성 위기가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상황에서 나타났다면, 한국은 여전히 경제적 불안정성이 높은 상황에서 젠더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 1970년대 미국의 경우 이미 중산층이 안정적으로 형성된 상태에서 젠더 변화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중산층조차 불안정한 상황에서 젠더 갈등이 겹쳐지고 있다.
청년실업, 주택 문제, 사회 보장의 미비 등이 젠더 갈등과 결합되면서 더욱 복합적인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젠더 평등까지 고려해야 하는 것은 젊은 남성들에게 이중, 삼중의 부담이 된다. 데이트 비용 분담 문제가 단순한 성평등 이슈가 아니라 경제적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한국 사회의 강한 교육 열정과 성취 지향성도 독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른 나라의 젊은 남성들에 비해 한국 남성들은 여전히 강한 성취 욕구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경로나 방법이 불분명해진 상황이다. 서구의 경우 개인의 다양성과 선택을 존중하는 문화가 발달해 있어서, 전통적 성공 경로를 따르지 않아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여전히 획일적인 성공 기준이 강해서, 이를 달성하지 못하면 사회적으로 낙오자로 취급받는다.
이는 좌절감과 분노를 더욱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성취 욕구는 강한데 성취 방법은 불분명하고, 성취하지 못하면 사회적 비난까지 받는 상황에서 많은 젊은 남성들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이런 상황은 1-2장에서 본 것과 같은 극단적 반응(사회적 고립, 여성 혐오, 정치적 급진화 등)을 불러일으키는 배경이 된다.
한국 사회의 집단주의적 특성도 중요한 변수다. 서구의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개인의 선택과 책임이 강조되지만, 한국의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집단(가족, 직장, 사회)의 기대와 압력이 여전히 강하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이 새로운 젠더 역할을 실험하기는 매우 어렵다. 혼자만 다르게 행동하면 집단으로부터 배제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미디어와 인터넷 문화의 영향도 한국적 특수성을 만들어낸다. 한국의 높은 인터넷 보급률과 활발한 온라인 문화는 젠더 담론의 확산 속도를 가속화시켰다. 메갈리아, 워마드 같은 온라인 커뮤니티가 짧은 시간 내에 큰 사회적 영향력을 갖게 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하지만 동시에 온라인 공간의 익명성과 극단화 경향은 젠더 갈등을 더욱 첨예하게 만드는 부작용도 낳았다.
미래를 위한 역사적 교훈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현재의 남성성 위기는 분명히 극복 가능한 성장통의 과정이다. 한국 남성들은 이미 여러 차례의 정체성 위기를 겪으면서도 매번 새로운 적응 방식을 찾아왔다. 일제강점기에는 근대적 남성성을, 전쟁 시기에는 전사적 남성성을, 산업화 시기에는 경제적 남성성을, 민주화 시기에는 시민적 남성성을 각각 개발해냈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들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이다.
과거의 경험을 살펴보면, 변화에 대한 저항보다는 능동적 적응이 더 효과적이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일제강점기나 외환위기 같은 이전 위기들에서 성공적으로 적응한 경우들을 보면, 새로운 환경을 빨리 받아들이고 거기에 맞는 새로운 전략을 개발한 경우가 더 좋은 결과를 얻었다. 반면 기존 방식을 고집하거나 변화를 거부한 경우에는 더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 일제강점기에 전통적 유교 질서만 고집한 이들보다는 근대적 지식을 받아들인 이들이, 외환위기 때 기존 방식만 고수한 기업들보다는 혁신을 시도한 기업들이 더 성공적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현재의 젠더 혁명도 마찬가지다. 이를 위협으로 보고 저항하기보다는 새로운 기회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젠더 평등은 남성에게만 손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새로운 자유와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감정 표현의 자유, 돌봄 역할 참여의 기회, 경쟁 압력으로부터의 해방 등은 모두 남성에게도 긍정적인 변화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가능성을 먼저 인식하고 능동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역사적 경험은 또한 개인적 차원의 적응과 사회적 차원의 제도 개선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교훈도 제공한다. 과거 성공적인 변화들은 개인들의 노력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교육제도, 법률, 사회 보장 등 제도적 뒷받침이 함께 있었을 때 가능했다. 산업화 시기에는 교육제도의 확대, 금융제도의 정비, 사회 인프라의 구축 등이 개인들의 노력과 결합되어 성과를 낳았다. 민주화 시기에도 제도적 민주화와 시민 의식의 성장이 함께 진행되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현재의 남성성 위기 해결도 개인적 노력과 사회적 지원이 결합되어야 한다. 개인 남성들이 새로운 남성성을 실험하고 추구하려는 노력을 하더라도, 이를 뒷받침할 사회적 제도와 문화가 없다면 지속하기 어렵다. 육아휴직 제도의 확대, 유연 근무제의 도입, 성평등 교육의 강화, 새로운 남성성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지원 등이 함께 이뤄져야 개인들의 변화 노력이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세대 간 소통과 협력의 중요성도 역사적 교훈 중 하나다. 급격한 사회 변화 시기에는 세대 간 갈등이 불가피하지만, 이를 건설적인 방향으로 풀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산업화 시기에도 농촌 출신 부모 세대와 도시에서 자란 자녀 세대 사이에 큰 가치관 차이가 있었지만, 점차 상호 이해와 협력을 통해 이를 극복해나갔다. 민주화 시기에도 권위주의 세대와 민주주의 세대 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대화와 타협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뤄냈다.
기성세대의 경험과 지혜, 젊은 세대의 새로운 감수성과 적응력이 결합될 때 더 나은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기성 남성들의 책임감과 희생 정신, 젊은 남성들의 평등 의식과 감수성이 조화를 이룰 때 진정으로 성숙한 새로운 남성성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세대 간 비난과 대립보다는 상호 이해와 학습의 자세가 필요하다.
성급한 해결책보다는 장기적 관점의 필요성도 중요한 교훈이다. 과거의 경험을 보면, 정체성 위기의 해결에는 보통 한 세대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일제강점기의 정체성 혼란이 해방 이후에도 한참 지속되었고, 산업화 시기의 급격한 변화에 대한 적응도 수십 년이 걸렸다. 외환위기 이후의 경제적 패러다임 변화에 대한 적응도 아직 진행 중이다.
현재의 위기도 단기간에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기보다는, 장기적 관점에서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하루아침에 완전히 새로운 남성성이 등장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대신 꾸준하고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조금씩 변화해나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교훈은 한국적 특수성을 살린 창조적 해결책의 필요성이다. 다른 나라의 경험을 참고하되, 한국의 문화적, 사회적 맥락에 맞는 독창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서구의 개인주의적 해법을 그대로 적용하기보다는, 한국의 공동체적 전통과 결합시킨 새로운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 일본의 소극적 적응 방식이나 중국의 국가 주도적 접근과도 다른, 한국만의 독특한 길을 찾아야 한다.
한국이 경제 발전에서 보여준 창의적 적응력을 젠더 문제 해결에도 적용할 수 있다면, 세계적으로도 모범이 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압축 근대화의 경험을 바탕으로 젠더 혁명도 창조적으로 수용하여, 전통과 현대, 집단과 개인, 남성과 여성이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사회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면, 이는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세계 사회에도 큰 기여가 될 것이다.
결국 현재의 남성성 위기는 한국 사회가 더 성숙하고 평등한 사회로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겪는 성장통이다.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한국 사회는 전 세계적으로도 주목받을 수 있는 새로운 젠더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압축 근대화라는 독특한 경험을 가진 한국이 젠더 혁명에도 창조적으로 대응한다면, 이는 인류 사회의 젠더 평등 실현에 중요한 이정표가 될 수 있다. 다음 장에서는 이런 새로운 가능성들을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