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어도 더 나아가고 말테야.

[ep-9]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 (1)

by Rick

항암일정을 잡기 위해 아산병원을 찾았던 날이었다. 사실 아산병원은 병문안 온 거 말고 진료로는 처음이었는데, 일단 아픈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에 놀랬고 지하에 위치한 식당가며 빵집이며 그 규모에 두 번 놀랬다. 진료를 기다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었는데 그중 나처럼 젊은 나이에 사람들도 가끔 보였다. 희망과 절망 어딘가에서 각자의 싸움을 해나가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암병동에서 진료를 기다리는 분들 중에는 여전히 눈빛이 살아 있는 분들도 있었다. 그중 내 옆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여성분이 유독 기억이 난다. 항암을 18차까지 맞고 CT결과를 기다리던 그분은 은퇴를 앞둔 초등학교 교감선생님이 셨는데 진료를 기다리는 내내 빼곡히 적힌 다이어리의 일정을 체크하며 바쁘게 전화통화를 하고 계셨다. 퇴직파티일정, 여행일정, 강의일정 등이 빼곡히 적힌 그녀의 앞으로의 일정에는 다음 항암일정은 그저 한 달에 한번 있는 작은 이벤트에 불과해 보였다. 적지 않은 나이에 가녀린 체구로 고식적 항암을 이어가는 중에도 어찌 저렇게 흔들림 없이 주어진 이 하루를 보내고 계신 걸까. 외래를 마치고 나온 그분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고 오랜 시간 친분을 쌓아온 것으로 보아는 간호사분들과의 인사도 잊지 않으셨다. 아마 좋은 결과가 있었으리라.


사실 나는 아프기 전부터 직장생활 이후의 나의 삶에 대해 종종 고민하곤 했었다. 보다 정확히는 준비되지 않은 노후와 나를 진정으로 들여다보지 못한 채 은퇴라는 현실을 마주하는 분들을 보며 나이가 들어서도 인생을 행복으로 충만하게 하려면 나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를 꽤 오랜 시간 고민해 왔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뭘까?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은 뭘까? 그것이 나이 들어 늙고 유약해져도 여전히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때가 되어도 여전히 나를 즐겁게 할 만한 것일까? 에 대한 고민은 나에게 사실 지루한 대학원 논문을 쓰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고 가치 있는 고민이었다.


앞서 목격한, 채 준비를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은퇴라는 현실을 맞이한 분들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들이 삶 속에 어떤 행복이 깃들어 있는지 나는 알 수 없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단순하고 오만한 잣대로 평가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내 인생을 끝까지 보다 풍요로운 경험과 충만한 행복감을 채우기 위한 나의 노력은 인생의 모든 순간을 추체적으로 계획하고 싶은 내 의지였다. 그리고 본격적인 고민과 준비가 시작된 건 나도 더 이상 젊고 어리지 않다는 것을 깨닳은 40살이 된 어느 날이었다.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퇴근하다 우연히 최근 퇴직하신 것으로 보이는 분의 전화통화를 엿듣게 되었다. 굳이 들으려고 했다기보다 등산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으신 그분의 유쾌한 입담이 내 귀를 사로잡았던 거 같기도 하다.


“아 너무 일만 했던 거 같아. 막상 퇴직하니까 놀아줄 사람도 없고 무엇보다 뭘 해도 재미가 없네.. 내가 이렇게 취미가 없는 사람이었나.. 이제 머 하면서 시간을 때우고 사나.. 넌 요즘 머 하고 사냐? “


처음엔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었지만 이내 무서워졌던 것 같다. 나이, 금전적인 부족함, 가족과의 관계 등 여러 이유로 인해 삶의 후반전이 더 이상 주체적이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무엇보다 갈 곳을 잃은 사람에게 한 뭉텅이의 시간을 쥐어주니 어떻게 그 소중한 시간을 써야 할지 모르는 채 그 자리에 멈춰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순간 제대로 된 준비를 안 해나가면 나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청년들만 꿈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 청년들만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찾아야 하는 게 아니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살아있는 한 꿈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무엇이 우리를 기쁘게 하고 삶을 충만하게 하는지 찾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우주의 먼지같이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태어났지만, 우주의 다른 어떤 별들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인 이유인 것이다.


“무엇이 내 삶을 이읔고 충만하게 할 수 있을까?”


내 스스로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한 끝에 나를 즐겁게 하는 작고 사소한 것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1. 무심하게 머리를 묶은 해인이의 화장 안 한 얼굴

2. 갓 잠든 설현이의 깊어지는 숨소리와 부드러운 볼

3. 러닝 후에 비 오는 듯 쏟아지는 땀과 가쁜 호흡의 순간

4. 자연과 하나가 됨을 느낄 수 있는 백패킹과 카야킹

5. 새로운 장소로의 여행과 그 준비과정

6. 모두 잠든 시간 혼자서 집중해서 보는 오래된 영화 한 편

7. 매주 출간되는 원피스와 헌터x헌터를 보는 일

8. 버터향 가득한 크루아상이 막 오븐에서 나오는 순간

9. 복합적인 산미가 가득한 드립커피의 첫 한 모금

10. 맘 맞는 친구와 술 한잔 기울이며 나누는 진지한 인생의 철학적 고민들.

11. 아버님과 좋은 술을 마시며 듣는 주옥같은 인생얘기들.

12. 부동산시장을 분석하며 투자시장에 직접 뛰어들어 나를 증명해 내는 일

13. 크고 작은 목표를 세우고 이뤄내며 죽을 때까지 성취감을 느끼고 싶은 마음.


이런 사소하지만 나를 충만하게 것들이 나의 인생 후반에도 나와 함께 해주면 좋겠다는 소망.

그리고 지금부터 잘 준비하면 그것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즐거운 기대감은 어느새 40대에 세우는 또 다른 10년의 계획이 되어가고 있었다.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했던가.

하지만 난 이 말보단 준비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이 더 낫다고 믿는 편이다. 정상에 올라가야 한다는 집착에 사로잡히면 그 길에 무수히 뿌려둔 세상을 보지 못한다는 어느 스님의 말씀처럼 어쩌면 이 시간 자체가 나에게 무수히 뿌려둔 세상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값진 경험일 거라 생각한다. 물론 그 뒤에 맞이할 다채롭고 풍요로운 삶은 덤이다.

작가의 이전글나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어도 더 나아가고 말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