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겹으로 둘러싸인 깊은 곳.
https://m.youtube.com/watch?si=UbuwZpUZ43bgvkmf&v=Mi9uNu35Gmk&feature=youtu.be
연휴를 몇 주 앞둔 저녁, 왜 룸메이트의 길고도 평온한 통화가 내 심장을 두드렸을까?
벽을 타고 흐르는 “응, 그래” 같은 왕복이 왜 나에겐 경보음처럼 들렸을까?
기숙사가 임시 휴관한 탓에 4박 5일 간 바다로 도망치듯 숨구멍을 만들어 둔 계획, 그 계획을 지키려면 먼저 전화를 해야 했던 이유는 뭘까?
변명의 문장들을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예행연습한 건,
정말로 필요한 준비였을까,
아니면 또 하나의 방어기제였을까?
왜 집 근처 지역만 가도 죄책감이 먼저 올라올까?
발목을 잡는 건 장소일까,
목소리일까,
아니면 내가 붙여 둔 이름들.
가족, 의무, 미안함일까?
손가락이 발신 버튼을 누르는 순간 다리는 왜 그렇게 떨렸을까?
벨 소리 1초 만에 받은 아빠의 “어, 전화도 안하는 애가 웬일이냐?”라는 말에 나는 왜 먼저 건강을 묻고,
큰일 없냐고, 추석에는 못 내려갈 것 같다고 둘러댔을까?
일주일이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반년이 되고,
반년이 1년으로 늘어난 거리를 그들은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을까,
아니면 원래부터 이런 식의 침묵이 우리 가족의 생활 방식이었을까?
그날따라 유난히 힘 빠져 들리던 아빠 목소리는 무엇을 말하고 있었던 걸까?
“이번 연휴 땐 와야지, 암. 니는 가족도 없나?”
평소처럼 농담인지 아닌지 모르겠는 그 말에 왜 나는 또 ‘가족’이란 단어에 멈춰 섰을까?
내게 가족은 왜 오래 ‘속박’처럼 느껴졌을까,
그 틀을 벗어날수록 더 나다워지는 기분은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최소한의 자기보호였을까?
반대로 그들에게 가족은 유대였을까,
구속이었을까,
아니면 두 감정이 뒤섞인 일상의 다른 이름이었을까?
올해가 가기 전에 약을 복용하며 바닥까지 가라앉았다가 조금씩 올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해가 가능할까,
변명의 서사로 들릴까,
아니면 예상보다 담담하게 흘러갈까?
혹시 격분이 먼저일까, 침묵이 먼저일까?
내가 변한 이유를 또 다른 사람이나 사건에서 찾으려 들 때, 과연 나는 어떤 표정으로 듣게 될까?
오늘 내 글에 후원을 눌러 준 사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 그 사람은 어떤 문장에서 멈춰 섰을까?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라며 친구를 소개해주고 싶다던 그 말 뒤의 “하필 남자친구가 있다”라는 덧붙임은 어쩌면 애정 어린 농담이었을까?
병원에서 약의 g수가 줄어든 건 우연일까, 경과일까, 기대일까?
상담 선생님이 회복의 속도에 놀랐다는 반응을 들으며 왜 나는 기쁜 마음과 함께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를 동시에 느꼈을까?
그럼 왜 오늘은 글을 쓰다 그대로 잠에 떨어졌을까?
초집중이 끊어진 지점은 어디였을까?
운동을 열심히 한 탓일까,
피로가 쌓여 잠이 나를 먼저 데려간 걸까,
아니면 스스로에게 허락한 긍정적 회피였을까?
충전되지 않은 휴대폰처럼 마음의 배터리는 언제부터 빨간색이었을까?
악몽은 또 왜 그렇게 현실 같았을까?
좋지 않았던 군대 선임의 얼굴,
가족사가 다시 재연되는 장면,
상담 선생님의 현실에 쫓겨 바빠서 글 쓸 시간도 없다는 문장이 꿈 속에서 납처럼 가라앉을 때,
나는 무엇을 놓치고 있었을까?
늘 참극으로 마무리되는 결말은 경고였을까,
단순한 피로의 그림자였을까?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진 채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전 9시 28분.
이미 지나간 알람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었을까?
왜 오늘의 하늘은 그렇게 우중충했을까?
축제가 있는 날이라는데,
한 때 자주 듣고 위로 받았던 가수 다비치가 온다는데, 나는 왜 크게 움직이지 않았을까?
모자를 눌러 쓰고 마스크를 걸고 우산을 챙기는 이 작은 방어는 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사람들 속에서 숨 쉴 틈을 확보하려는 습관이었을까?
약을 은근히 감량한 의사의 판단이 내 꿈을 흔들었을까?
어젯밤 스크롤을 멈추게 한 인스타툰의 한 컷이 무의식을 두드렸을까?
아니면 내 의지라는 조그만 추 하나가 마지막 균형을 바꿨을까?
결국 원인은 하나로 모아질 수 있을까,
아니면 늘 그랬듯 복합적인 삼중주로만 설명될 수 있을까?
‘도망’과 ‘유예’ 사이에서 나는 무엇을 택할 수 있을까?
도망은 등을 보이는 일이라면,
유예는 체온을 식히는 기술일 수 있을까?
아직은 시기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지금조차 불안정하기에 결국 거짓말로 매듭을 지어야 한다는 사실을.
연휴 전에 다시 전화를 드린다면,
어떤 문장을 준비해야 할까?
어디까지를 지금 말하고, 무엇을 아직 말하지 않을지,
선은 어디에 그어야 할까?
유대와 구속 사이에서 답을 고정하지 않는 태도는 회피일까,
아니면 변화할 수 있는 나를 믿는 최소한의 여지일까?
오늘의 걸음은 무엇을 의미할까?
지각을 무릅쓰고라도 학교로 향한 발걸음은,
축제의 환호 속에서 내 호흡을 지키려는 작은 시도였을까?
사명감은 거대한 깃발처럼 휘날려야만 진짜일까,
흐린 날에도 쥘 수 있는 손잡이 같은 것이면 안 될까?
우산과 모자와 마스크처럼, 나를 잠시 가려주고 버티게 해주는 일상의 장비가 바로 그 사명감일 수는 없을까?
바다는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내가 바다에게 이유를 찾고 있을까?
이번 추석의 전화는 또 어떤 목소리로 시작될까?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어떤 질문부터 꺼내야 할까?
그리고 그 질문들이,
이번에는 나를 어디까지 데려갈까.
https://m.youtube.com/watch?si=S9fkwY4ySvT_q0It&v=sZvSU3b8CNw&feature=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