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어준다는 것
2010년 방영한 드라마 파스타. 세프 이선균과 인턴 공효진 사이에 오해가 생겼다.
"믿어준다고 했잖아요."
"믿을 만해야 믿지?"
"믿어준다고 했으면 그냥 믿어야지, 이것저것 다 따지면 그게 믿어주는 거예요?"
자식 교육에 대해 묻는 후배들에게 내가 자주 하는 말이다. 믿어주고 기다려주라고.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다. 잘 생각해 보면 믿어준다는 건 상대방이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이야기다. 믿음직스러우면 믿어주는 게 아니라 그냥 믿는 거니까.
다른 사람 말고 자신을 믿어주는 건 어떨까?
2010년 나는 미국 샌디에이고 골프 아카데미를 다녔다. 당시 수석 티칭 프로이던 마이클 플래너건. 그는 골프 퍼팅에서 가장 중요한 게 자신감이라고 강조했다. 들어간다고 믿고 자신 있게 퍼팅해야 한다고. 하지만 난 내 실력을 안다. 들어간다고 믿으라고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믿을 수가 있나?
어느 순간 깨달았다. 퍼팅 전에는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그린의 경사, 잔디의 속도, 오늘의 날씨 등등. 하지만 퍼팅에 들어간 순간에는 더 이상 생각 말고, 자신을 믿고 바로 퍼팅해야 한다. 그래야 성공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나를 믿어주어야 한다.
와인 블라인드 테이스팅. 처음에는 마술 같았다. 색깔과 향, 맛 만으로 포도와 지역, 연도, 생산자까지 맞추다니. 신기했고 잘 배우고 싶었다. 첫 시음날, 레드와인인데 체리향과 함께 바이올렛 같기도 하고 로즈메리 같기도 한 향이 난다. 옆에서 후추 향이 난다고 하니 그런 것도 같다. 맥심 선생님은 자신의 감각을 믿고 테이스팅 노트를 쓰라고 하는데 어떻게 믿나? 나이가 드니 후각도 떨어지는데.
와인 시음에는 당연히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 와인 품종, 지역 특징과 주조법에 대한 이해 없이는 블라인드 테이스팅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와인 향에 대한 어휘력도 키워야 하고. 체계적인 시음 순서와 방법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하지만 테이스팅 순간에는 자신의 감각을 믿어주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의심해 본들 뭐 하겠나? 어차피 이 순간 믿을 사람은 나밖에 없지 않나? 느끼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바로바로. 나중에 복기하며 오답노트를 쓰는 것은 꼭 잊지 말고.
3개월이 지난 지금 실력이 제법 늘었다. 얼마 전 블라인드 시험에서 화이트 와인은 정확히 맞추었다. 레드와인의 경우 답은 틀렸지만 추론 과정이 좋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인생도 비슷한 거 아닐까? 판단 이전에는 많이 생각하고, 판단의 순간에는 더 이상 생각 말고 자신을 믿고 행동하고, 그 이후에는 꼭 자신의 판단이 옳았는지 다시 생각해 보고.
하지만 우린 와인 테이스팅에서도, 골프 퍼팅에서도, 인생에서도 판단의 순간에만 많은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것도 자기 자신을 믿지 않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