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풀도, 키 작은 나무도, 다 똑같은 숲의 일원
숲은 엄마이다
마음 산란하고 외로워
울고 싶은 날
숲 길 걸으면 바람이 빰을 어루만지며 내 마음 토닥토닥 다독여준다 (아직은 작은 나무라서 더 많은 찬 바람과 폭풍과 계절하고 만나야 할터인데 그래야 클터인데 아가! 어쩌나 걱정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주 오래전 여섯 살 꼬마아이가
온종일 뛰어놀다 "유모엄마! 배가 아파요" 하면
유모 엄마는 나를 눕히고 배를 살살 어루만져주며 "엄마 손이 약손이다 엄마손이 약손이다"
노래를 부르면 나는 스르륵 잠이 들었다
숲은 나에게 그런 엄마이다
경기도 별래면 산촌에 살던 나는
겨울 오후 다섯 시면 어둑어둑 어두워지는
산밑에 집에 살기에
"해지기 전에 들어오너라" 하는 말을 늘 들으며 살았다
밤이 되면 늑대와 살쾡이가
마을로 내려온다고 했다
산길을 걷다 보면 닭털이 가득하고
가끔, 미쳐 잡혀먹지 못한 닭이 알을 낳고 죽었다
시골집에서는 모두 아기씨라 나를 부르고
할아버지는 양반집 딸이
아무나 사귀면 안 된다고 우격다짐했다
얘는 어때서 안되고.
쟤는 어찌해서 안되어서 친구라고는 숲 속
다람쥐와 새들이 내 친구였다
할아버지는 글씨를 쓰고 그림 그리시고
책을 보는 동안, 나는 숲을 뛰어다니며
다람쥐 쫓아다니고, 새들 쫓아다니다,
피곤하면 할아버지가 펴놓으신
돗자리에 누워 숲의 냄새를 맡으며
바람의 자장가에 잠이 들었다
누워 나무들을 보면, 햇살에 반짝이는 나뭇잎이
나를 보며 손짓하듯 팔랑거리고
여기저기 새들이 날아다니며 노래를 한다
바쁘게 기어가는 개미떼들
꿈틀꿈들 기는 벌레들, 돌틈 사이에서
숨바꼭질을 하는 다람 쥐
모두가 내 친구들이다
비가 오려면 숲은 바쁘다
이따금씩 가쁜 숨소리를 내기도 하고
천천히 숨을 들이키며 혹여 숲에 사는 친구들이 다칠세라 나무들은 두 팔을 마구 휘저으면서
윙윙 소리 지른다
비가 오려나!
나비들이 떡갈나무 잎사귀 뒤에
매달리기 시작하고
개미는 바쁘게 달리고
후드드득! 후드드득! 빗방울이 떨어지면,
나와 할아버지도 짐을 챙겨
집으로 가기 바쁘다
숲이 우기를 맞이한 것이다
숲은 방학이다
창문 너머로 흔들리는 숲을 바라보며
오랜만에 목을 축이는 나무를 본다
나뭇잎들도, 땅도, 풀도
벌떡벌떡 물 마시며 싱글벙글 웃는다
한동안 비가 없어 목 마르던 세상 모든 것들이
축제라도 만난듯 신이 났다
며칠 지나, 나뭇가지 사이로 내미는
하얀 뭉게구름의 웃는 얼굴,
나뭇가지에 걸린 해가 둥그렇게 미소 짓는 날
나도 해처럼 싱글벙글 웃으며
숲 길을 달린다 얘들아! 잘 있었니?
싱글벙글 숲은 환히 웃으며
어서 오라고 나를 반긴다
개학이구나 숲 학교가 문을 열었다
엄마 숲은 살랑살랑 나뭇가지 흔들며 지휘하고
새들은 노래 부르면 툭! 툭! 떨어지는
알밤의 연주
늦여름 학교에는 으스대던 봄꽃은 간 곳 없고
나뭇잎만 푸릇푸릇 바람 불 때마다 초록 물결 출렁거리며 마스게임하면, 나무 뒤에 다시
고운 꽃들이 피어난다
숲에 오면 누구나 느끼는 사실이지만
영원히 시들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
잘 나가는 사람도 영원히 잘 나가지 않듯,
꽃은 일찍 피거나 늦게 피거나 한 번씩은 꼭 핀다는 것을 알았다 천천히 숲을 걷다 보면
작은 나무, 큰 나무 여기저기 많다
누가 더 좋은 나무인지 모르겠으나
내 눈에는 다 같은 나무로 보인다
하나님이 높은 곳에서 인간들을 보면,
누가 더 잘나고 못난 지 구별하지 않고
다 같은 자녀이듯 숲도 그럴 것 같다
작은 풀도, 키 작은 나무도 큰 나무나, 아름답고 비싼 꽃도 다 똑같은 숲의 일원이기에
숲이 보기에는 다 같은 자식이다
나는 숲에 뛰어다니며 사계절 숲 속에서
자란 덕분에 이걸 배웠다
누구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다만 그 시기가 언제 인지는 다 다르고 그 모양 또한 개성이므로 다 예쁘다는 것을, 신이 보기에도 그럴 것이다
지금도 가끔 꿈속에서 숲을 뛰어다니며 새들과 함께 큰 소리로 외치는 여섯 살 아이를 본다
능제가 있을 때 따라가 본 적이 있던 경기도 포천 숲, 남양주 금곡동에 있는 홍유능을 떠올려본다
가을이면 낙엽이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홍능에 할아버지와 갔던 날
큰 나무들이 가득해 낙엽이 많이 쌓인 숲을 보았다
큰 숲이 우거진 길을 걸으면
숲의 소리는 더 깊고 아름답다고
더 포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느낌인가! 어찌 잊으랴!
눈 감으면 나뭇가지마다
수많은 별들이 내려와 반짝이고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 날엔,
숲은 나의 마음을 토닥이며 자장가를 부른다
살다가 가끔, 많이 아파 잠이 들면
하늘로 가신지 오래인 엄마가 이마에 손 짚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가슴을 다독인다
" 어쩌나! 나 죽으면 개밥의 도토리 인 너를"
하시던 아직은 젊은 엄마의 소리가 들리는 듯
숲의 목소리가 들린다
시원한 바람이 창문 너머 들어와
얼굴을 비비다 사라지고,
창 너머로 숲이 웃고 있다 그럼! 그럼!
오늘 밤 지나면 새 아침 온단다
아! 개밥의 도토리가 수십 년을 살면서 궁금했다 어느 날 나이 들어 숲을 찾았다
우리 집 산이였던 밤산에 도토리나무들이 있다
비닐 봉지에 가득 담아 왔다
바둑이 밥그릇에 가득 부어주곤
개밥의 도토리가 어찌 될까 궁금해졌다
엄마 없는 세상에선 내가 개밥의 도토리! 왜 그러셨을까
오래된 후에 알았다 눈물이 방울방울
개밥에 후드득후드득 떨어진다
숲에 비가 오듯
내 마음에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엄마의 걱정을 알듯해서이다
오늘은
정희성 시인님의 숲이란 시를
떠올려본다
숲
정희성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