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겨울에게 어머님께 인사드리고 싶다는 얘길 어렵게 꺼냈지만 겨울이 난감해하는 모습을 보고 한편으론 실망스럽고 한편으론 불안했다.
겨울이라는 사람을 소개받았을 때 가을은 내심 놀랐다. 이렇게 예쁘고 마음 착한 사람이 아직 미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개받은 자리에 나온 걸 보면 비혼주의자나 동성애자도 아닌데 왜 지금까지 곁에 아무도 없을까..첫 만남은 그런 의문만을 남겼었다.
마음은 한주간 몇 번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전직한 직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려면 기본적으로 '나'보다는 '우리'를 챙기는 모습이 필요했다. 그들로부터 곧 떠날 사람이 아닌 한 팀, 한 가족이라는 인정을 받기 위해 야근도 마다 않고 주말에도 개인 시간을 할애해 일했다.
다행히 겨울은 크게 개의치는 않는 듯했다. 가을의 노력도 있었다. 선약을 했음에도 회사 일을 핑계로 바람을 맞히는 일은 없었다. 만날 수 있는 날과 없는 날을 최대한 사전에 계획하여 겨울과의 시간을 가졌고 혹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생겨도 당일이 아닌 전날 정도에는 양해를 구했다. 겨울은 같은 직장인으로서 그런 것들에 대해 이해 못할 것 없다는 입장이었다.
가을씨가 절 최대한 배려해서 시간 잡는 거 알아요. 가을씨한테 어떻게 들릴지 조심스럽지만..저도 결혼은 급하게 생각하진 않고 있어요. 가을씨 좋은 남자같고 시간 생길 때마다 뵈면서 더 알아가고 싶으니 너무 미안해하진 마세요.
그게 겨울이 들려준 얘기였다. 가을에겐 다행스러운 반응이었다. 겨울이라는 사람이 두명 세명을 동시에 만나며 상대를 저울질하는 타입도 아닌 듯해 특히 다행스러웠다. 연애나 결혼에 대해 그 정도로 적극적인 유형이 아니라고 해야하나..우연이든 인위적인 소개든 자신에게 주어진 인연을 수용하고 그 안에서 무엇인가 길을 찾는 사람이랄까. 차로를 바꾸지 않고 2차선 도로에서 달리는 자동차 같았다.
물론 겨울과 대화하다 보면 나오는 몇 몇 남자들이 마음에 남곤 했다. 친하게 지내는 직장 동료들, 대학교 친구들, 특히 후배라는 김 봄이라는 사람. 하지만 특정인을 마음에 두고 있는 느낌은 받질 못했다. 그 후배를 포함해서.
오히려 어머님이 마음에 걸렸다. 웃으며 얘기했지만 지난 몇 번의 연애의 끝이 좋지 않았던 게 어머님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어 보였다. 애증의 관계라는 말에서 더 자세히는 묻지 못했다. 어머님의 재가를 받는 게 큰 허들임을 느꼈지만 의외로 그 허들은 경쟁자들을 막는 수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든 허들을 넘는 것이 중요했다.
가을이 겨울과의 연애에 속도를 올리지 않은 이유는 직관적으로 그렇게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사회적 자리를 잡는 것은 자신을 위한 일인 동시에 겨울과의 미래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어머님은 계산이 빠르고 한 번 결정하면 뒤돌아보지 않고 실행하는 스타일. 사위로서의 자신을 평가할 때 겨울과의 애정의 돈독함이 중요할까 그의 사회적 지위, 벌어놓은 자산 같은 게 중요할까? 답은 불문가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심지어 연애의 상대방에게도 무형의 가치는 유형의 가치에게 늘 순위를 내어준다. 이 냉정한 현상은 사위나 며느리를 맞는 부모의 입장에선 더욱 선명해지고 겨울의 어머님 같은 유형에겐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가을로서는 이른바 준비된 사람이 돼야했다.
그렇게 지내왔다. 가을로서는 합리적이고 최선이었던 삶이었다. 겨울은 때때로 자신을 존경한다고 말해줬고 기대고 싶은 남자라고 치켜세워줬다. 겨울이 진심으로 한 말임을 안다. 자신의 기분을 맞춰줄 하등의 이유가 없으며 겨울이 그럴 수 있는 성정의 사람도 아니다. 겨울과의 애정 전선은 이상 무였다.
어느 날 겨울이 커피를 마시며 하는 얘기는 그래서 더 충격적이었다.
가을씨.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 뒤로 이어지는 여름이란 사람의 등장. 그와의 에피소드. 신중하게 말하고 있지만 감출 수 없는 즐거움. 2차선만을 달리던 운전자가 곁눈질로 사이드 미러를 보기 시작했달까.
겨울씨는 어떤 생각이에요? 그 사람에게 가고 싶나요?
가을로서는 어쩔 수 없는 질문이었다. 정말 묻고 싶지 않았지만 겨울이 먼저 말한 이상 묻지 않을 수 없었던.
아니요. 그러려고 말씀드린건 아니에요. 그저 제 마음에 솔직하고 싶었어요. 금요일은 가을씨 만나고 토요일은 다른 사람을 만나면서 천연스럽게 두 사람 모두를 속이고 싶진 않았어요. 이게 얼마나 가을씨에게 혼란스러운 말인지 알아요. 입장 바꿔 가을씨가 제게 그런 얘길 한다면 저도 선뜻 수긍하기 어려웠을테니까요. 저를 비난하고 떠나신다고 해도 저는...말씀드릴 게 없어요. 무조건 제가 잘못한 거니까요..
가을은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모두가 떠난 사무실 한 켠에서 노트북 모니터만 켜 놓은 채 가을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겨울이 불륜이라도 저질렀단 건가? 생각해보면 이 상황 자체가 우습다. 자신은 무슨 자격으로 겨울에게 사과를 받고 있는 것인가? 백번 양보해서 자신과 겨울이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 해도 마음이 떠난 겨울을 비난할 수는 없다. 보이지 않는 손은 경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올 한 해에만 수십만 쌍의 연인들이 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운명이 바뀌었다. 일개 개인인 가을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란 것이 있는 것이라면..가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제풀에 포기하지 않고 그 흐름이 바뀔 때까지 버티는 것. 그것뿐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겨울씨. 겨울씨 만나 지금까지 너무 순조롭게 연애했던게 외려 큰 복이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여태 그걸 깨닫지 못했던 거에요. 올 게 왔을 뿐이죠. 겨울씨같이 너무 좋은 사람에게..다른 남자들이 애정을 구하는건 당연했던 거 같습니다. 제가 더 노력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나름 최선의 삶이라 생각하며 한 눈 팔지 않고 살았는데 그래도 부족했던 거에요. 하지만 아직 정해진건 아무것도 없고 다시 출발선에 선다는 마음으로 겨울씨에게 다가가고 싶습니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을 며칠을 고민한 제 미련함의 끝에 내린..겨울씨의 질문에 대한 제 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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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가을은 여름이나 봄에 대해 겨울에게 묻지 않았다. 겨울 역시 가을이 묻지 않는 이상 그들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가을은 겨울에 대해 더 알고자 했지만 연적의 이야기까지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여름의 이야기, 겨울이 여름이라 칭한 것은 아니지만 분위기상 그와 관련된 것처럼 느껴지는, 를 할 때 스치듯이 보이는 겨울의 미소를 느끼는 것은 가을의 마음을 아리게 했다.
겨울이 왔고 어설프게나마 시작했던 둘 사이의 인연도 한 해가 돼갔다. 그래서..불안했고 떨렸지만 겨울에게 어머님 인사를 부탁했던 것이었다.
가을씨. 너무 죄송해요..
그러고는 한동안 말이 없는 겨울.
엄마를 본다는 것은, 가을씨도 알겠지만,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는 거잖아요..아직 전..마음의 준비가 안된것 같아요..가을씨를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엄마를 보여드리는 건..그건 제겐..야생에서 싸워 살아남아야 하는 어린 사자를 곰과 대결시키는 잔인한 짓처럼 느껴져요. 열심히 싸웠지만 힘에 부친 사자가 피를 흘리고 있을 때 조련사인 저는 어쩌면 목숨을 걸고..곰으로부터 사자를 보호해야 할 테지만..제가 사자를 진심으로 사랑해야 가능한 일일 거에요. 제가 사자를 사랑하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수수방관한다면..사자는 죽게 될테고..저는 그걸 지켜볼 용기가 없어요..
겨울은 호흡이 가쁜지 말 한마디 한마디를 힘들게 뱉어냈다.
죄송합니다. 어설픈 비유로..
고개를 숙인 겨울을 보며 가을은 마음이 아팠다. 동시에 자신이 만나고 있던 겨울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멋진 사람이었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차라리 처음부터 사랑했을걸..이것저것 재지 말고 사랑만 했을걸..미래를 위해 오늘을 희생했던 그 전략이 과연 옳은 것이었을까에 대한 회의가 밑도끝도 없이 밀려왔다.
그럼..
두 사람 사이의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겨울이 말했다.
제 친구들과 우선 만나보시는 건 어떨까요. 저도 가을씨 친구들과 자리도 가져보구요..
아..그렇게 해주시면..고마워요. 겨울씨. 진심으로.
이 전개는 여름이나 봄에게는 결코 달갑지 않을 것이다. 언더독인 두 사람에게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지만...시간은 흘러가고 거대한 역사만큼이나 일개 개인의 역사도 '만약'이라는 가정을 용납하지 않는다. 가을의 용기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이 성공은 겨울과 세 명의 연인들,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까지 엮이는 연쇄적인 만남의 기폭제가 될 것이다. 세밑 그들 운명의 수레바퀴는 마침내 돌기 시작한 것일까...